[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10> 8코스 월평-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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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 덕분에 제주를 찾는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났다. 사진 속의 일행들은 이태리 와인 전문수입사 비노비노의 직원들. | ||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이유는 자명하다. 제주도요? 물론 두어 번 가봤지요. 이제 더 이상 가볼 데도 없어요. 좀 긴 여행을 즐기고 싶다면 차라리 동남아로 가지요. 그들의 답변에 이의를 제기하기란 쉽지 않다. 비용이며 만족도 따위를 꼼꼼히 따져볼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렇다. 거기까지가 제주관광의 한계였던 것이다. 적어도 제주올레가 개척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올레길이 열린 이후 가장 기분 좋은 변화를 꼽으라면 제주도를 찾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른바 관광 포인트 앞에 가서 기념사진을 찍으러 온 것도 아니고, 비싼 그린피를 내고 골프를 치러 온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올레를 걷기 위해 제주도를 찾는다. 국민소득의 증가에 따라 걷기운동 혹은 트레킹 붐이 막 일어날 즈음 올레길이 열린 것은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관광지로서의 제주가 어떤 벽에 부딪혔을 즈음 트레킹 대상지로서의 제주가 새롭게 떠올랐던 것이다.
월평에서 대평까지 해안선을 따라 줄곧 이어지는 제주올레 제8코스를 나는 유쾌한 젊은이들과 함께 걸었다. 이태리 와인 전문수입사 비노비노의 직원들이다. 생면부지의 그 젊은이들이 제주에 오게 된 것은 물론 나의 초청 때문이었다. 올봄 이태리 와이너리 투어에 나를 초청해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제주올레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됐다. 그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듯 이렇게 말했다. 제주를 재발견한 것 같아요. 아니 제주에 처음 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다음에 다시 와서 다른 올레길도 걸어보고 싶어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올레길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제주도 자체가 젊어진 느낌이다. 우연한 일이지만 그들과 함께 제주올레 제8코스를 걸었다는 것도 시너지 효과를 냈다. 발랄한 청춘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화려한 길이었던 것이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깔깔깔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청춘이라 했던가. 길이 아름답지 않아도 뜻밖의 낭패를 당해도 그들은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8코스의 모든 길은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다웠다. 밝고 행복한 웃음소리가 도처에 넘쳐났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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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길을 걷다가 너덜너덜해진 샌들 밑창이 결국에는 떨어져 나갔다. | ||
이 길에서 새로 만난 젊은이들 중에는 걷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그마한 핑곗거리만 찾아도 이쯤에서 숙소로 돌아가겠노라고 선언할 참이었다. 하지만 풍광은 빈 틈을 보이지 않았다. 마늘밭을 돌아 나오면 검은 바위 투성이의 신비한 해안길이 펼쳐지고, 해안길에서 과감히 방향을 틀면 때 이른 코스모스가 마치 꽃의 바다처럼 물결치고 있는 광활한 벌판이 앞을 가로막는 형국이다. 다리가 아프다는 푸념은 오이 한 조각에 쏙 들어가고, 배가 고프다는 투덜거림은 주먹밥 한 덩이에 입을 다문다.
시에스 호텔로 접어들어 잠시 길을 잃고 헤매는데 어디선가 홍실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사이 새 신발을 사 신고 돌아온 그녀가 언제 절룩거렸던가 싶게 활짝 웃는 모습이 의기양양하기 이를 데 없다. 배도 채우고 전열을 새롭게 정비한 일행은 이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제주올레에 녹아든다. 저마다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 서로를 찍어주며 걷는 모습이 영락없는 소풍길이다.
중문해수욕장에 다다르자 일제히 신발을 벗어든다. 이 고운 모래사장과 발바닥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들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다. 하얏트 호텔 산책로에서는 외국인 트레커들을 여럿 만났다. 제 멋대로 배낭을 내동댕이쳐 놓고 해변에 누워 영어소설책이며 지도책 따위를 보고 있는 모습이 편안하다. 해외 배낭여행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쟤네들이 저러고 있으니까 여기가 꼭 외국 같지 않아? 내가 농담을 던지자 일행이 맞받아친다. 그러게요, 굳이 해외로 배낭여행 갈 필요가 뭐 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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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코스를 걷다가 중문해수욕장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올레꾼들은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그게 마련이다. | ||
제8코스의 종점인 대평포구에는 간단히 술 한 잔 할 수 있는 선술집이 있다. 오랜 시간을 걸은 다음 땀이 식기 전에 벌컥 벌컥 들이키는 맥주 첫 잔보다 더 맛있는 것이 있을까. 어떤 때는 그 한 잔의 하산주를 마시기 위해 하루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며 산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과음은 금물이다. 맥주는 한 잔이면 족하다. 일행들이 모두 다 도착하면 우리는 곧바로 숙소로 이동할 것이다.
비노비노 사람들이 제주에 온 본래의 목적은 와인의 시음이었다. 내년에 수입할 와인들을 결정하고 평가하기 위한 수련회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날 밤 우리는 수십 병의 와인들을 숙소 바닥에 눕혔다. 낮에는 올레에 취해서 행복했고, 밤에는 와인에 취해서 행복했던 완벽한 하루였다. 부르튼 발바닥을 코르크 마개들로 문지르며 웃는 젊은이들이 있어서 즐거웠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낮에 걸었던 올레를 찬양하는 젊은이들이 있어서 기분 좋았다.
글 심산(작가·심산스쿨 대표)/ 사진 김진석(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