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11> 9코스 대평-화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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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의 숨겨진 비경으로 손꼽히는 안덕계곡은 추사 김정희가 즐겨 찾던 곳이다. | ||
현재까지는 그의 마지막 필모그래피로 기록되어 있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 이후 장선우의 삶에는 굴곡이 많았다. 언제부턴가 그가 제주도에 출몰한다는 소문이 나돌더니 급기야는 아예 정착했다고 한다. 나는 그가 과연 제주의 어디쯤에 정착했을지가 궁금했다. 제주의 모든 바다와 오름과 고샅길을 두루 섭렵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어디였을까. 그곳이 바로 대평 포구다. 그의 카페 물고기 앞마당에 서서 사방을 휘이 둘러본다. 그리고는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그는 아마도 박수기정에 홀려 이곳에 자리를 잡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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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기정 오르는 길. 조슨다리는 폐쇄되었고 몰질로 올라야 한다. 저 아래로 대평 포구가 보인다. | ||
박수기정의 절정을 맛볼 수 있는 길은 단연 조슨다리다. 이 길에는 서글픈 전설이 있다. 먼 옛날 기름장수 할머니가 바윗길을 호미로 콕콕 쪼아 지름길을 만들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그 이후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완성해낸 길이 바로 조슨다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길 위에 서면 그 전설이 피부에 와 닿는다. 고난도의 암릉등반에서나 맛볼 수 있는 장쾌한 시야와 아찔한 고도감이 일품인 것이다. 하지만 2009년 4월 이후 이 길은 폐쇄되어 버렸다. 토지소유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안타까울 따름이다.
박수기정에 오르는 또 다른 길이 '말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몰질이다. 원나라 치하에 있었던 고려시대, 박수기정 위의 너른 들판에서 키운 말을 대평 포구로 끌고 내려오기 위해 냈던 길이라고 한다. 모든 길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있다고 했던가. 몰질을 통해 만나는 박수기정은 조슨다리를 통해 만나는 박수기정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무엇보다도 그 깎아지른 절벽 위에 그토록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들판을 가로질러 박수기정의 벼랑 끝에 선다. 제주올레가 제공하는 가장 장쾌한 풍광이 거기에 펼쳐져 있다.
볼레낭 길 사이로 휘파람을 불며 박수기정을 내려오면 다시 한 동안 해안길을 걷다가 숨겨진 계곡 안으로 접어든다. 치안치덕(治安治德)하는 곳이라 하여 안덕계곡이다. 산으로 접어들어 고운 오솔길들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 순간 시야가 툭 떨어지는데 그곳에 신비한 계곡이 숨어 있다. 첫눈에도 영락없는 여근곡(女根谷)이다. 계곡에 가닿는 가파른 산세(山勢)와 계곡을 둘러싼 울창한 수세(樹勢)가 에로틱한 상상력을 대책 없이 자극한다. 계곡에 들고나는 길목마다 붙여진 산바든물, 올랭이소, 임금내 등 제주식 이름들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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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순해수욕장에 설치된 옛 뗏목 너머로 산방산이 보인다. | ||
제주로 유배되어 내려가던 길의 추사는 해남의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대흥사 대웅보전의 현판은 그가 '경멸'하던 원교 이광사가 쓴 것이었다. 추사는 그 글씨를 씹고 또 씹어 기어코 현판을 떼어낸 다음 자신의 글씨를 건다. 하지만 만 7년3개월, 햇수로 9년만에 제주유배를 끝내고 뭍으로 되돌아오던 길의 추사는 달랐다. 다시 대흥사에 들른 그는 자신의 오만불손을 자책하며 스스로 자신의 글씨를 떼어내고 원교의 글씨를 복원시켰다. 그를 이렇게 변화하게 만든 것이 바로 제주다. 그가 훗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추사체'를 완성한 곳도 제주였고, 그가 한국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세한도'를 그린 곳도 제주였다.
현재 대정읍성 동문자리 안쪽에는 추사적거지가 남아있다. 추사가 유배시절 머물던 곳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해놓은 곳이다. 나는 처음부터 제주올레가 이곳을 비껴간 것이 못내 아쉬었다. 그나마 현재는 내부공사 중이라 들어가 볼 수도 없다(공사진행 상황판에 의하면 2009년 말에는 완성된다고 하니 내년부터는 입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현재의 제주올레에서 추사를 추억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이 제9코스의 안덕계곡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 어떤 조형물도 남아있지 않아 하나의 전설처럼 허공을 맴돌 뿐이다. 이 아름다운 안덕계곡 안에 조그마한 정자 하나 지어 추사와 제주의 인연을 기릴 수 있게 되면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바람일까.
제주올레 제9코스는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장쾌한 절벽과 너른 들판과 은밀한 계곡이 있다. 그 동안 관광객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제주의 비경들이다. 그 비경들 안에 고통이 녹아있다. 작품 활동을 멈추게 된 예술가가 있고, 호미로 바윗길을 내야만 했던 기름장사 할머니가 있고, 정치적 박해로 억울한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던 당대의 지식인이 있다. 하지만 고통이 언제까지나 고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 속에서 피워낸 꽃이야말로 가장 아름답지 않던가. 언젠가 변방의 역설이 중원을 뒤흔들 날이 올 것이다. 안덕계곡을 빠져나와 화순을 향해 걸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주올레에서 가장 짧은 코스가 바로 여기다. 총연장이 8.8㎞에 불과해서 서너 시간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덕분에 제주에 가면 골프만 치다 오는 친구들에게 나는 자신 있게 권한다. 제주에서 올라오는 날의 비행기 티켓을 조금만 늦추렴.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제9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어봐. 넌 틀림없이 안덕계곡에 반하고 박수기정에 반할 거야. 그렇게 아침 산책을 마친 다음 물고기 카페 앞마당에 앉아 천천히 차를 한 잔 마시렴. 아마도 그 이전에 네가 쳤던 골프의 추억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체험이 될 거야.
글 심산(작가·심산스쿨 대표)/사진 김진석(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