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고분양태 도무형문화재 송옥수
"이거 받아 앉으민 아무 생각이 엇어마씀. 코 걸어야주 허는 마음 뿐이라마씀. 이제는 나이들어가민 학교 가주만 옛날엔 갓일만 베완. 우리 옛날엔 밭 하나 물려주지 말앙 기술을 베와주렌 허여십주" 그 옛날, 동생을 돌보다 아홉 살 되면 갓일하는 일청에 나가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잡았던 바농대의 삶. 올해 여든여섯, 그녀 송옥수. 고분양태 제주도무형문화재 장인입니다. 밥먹듯이 겯던 양태, 이것이 은퇴 없는 노년의 삶을 살게 할 줄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제자도 생겼습니다. 직접 삶고, 뽑아낸 누런 대나무실이 겨울 양광아래 부챗살처럼 퍼집니다. 그녀를 만나온 지는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우리 전통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마침 겨울한파 그친 틈새로 햇살 눈부신 날, 오랜만에 홀로사는 그녀 만났습니다. 그녀 손수 지은 초가 뜨락에서.
고분양태 도무형문화재 송옥수는 1924년 제주시 삼양동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시작 아홉 살부터 본격적인 양태를 시작했다. 탕건과 양태 두루 잘 한다. 열 일곱살에 결혼, 남편을 4·3때 떠나보냈다. 1988년 9월 제주국제사회복지회에 개설된 한백노인전통공예작업장에 나가 강경생씨 등과 갓일을 했다. 수차례 공예품 대회에 나가 상도 탔다. 2000년 1월 제주도 지정 무형문화재 고분양태 전수 장학생이 되었다. 2001년 기능보유자 강경생이 작고하자 2002년 제주특별자치도 지정 무형문화재 12호 고분양태기능보유자가 되었다. 그녀는 고분양태 외에 조선시대 양태의 종류인 제량(보통 넓이), 엉성하게 겯는 엉근양태, 광통(남성 어깨를 덮는 넓은 차양) 등을 결을 줄 안다.
# 가늘고 촘촘하게 짠 고분양태는 최상품 
열일곱 전에 양태 탕건 전부 알았습니다. 열일곱에 연지곤지 찍고, 가마타고, 신랑은 사모관대 쓰고, 결혼했습니다. 설개(삼양1동)서 시집가기 전 눈뜨면 양태 판 앞에 앉았던 초롱 눈. 이제 여든여섯의 눈은 옛날 눈이 그립습니다. 그때 할머니들은 그랬지. "아이고, 요년아, 초롱 닮은 눈에 무사 못 봐레느니 허연.(왜 보지 못하는냐 해서) 훤허연. 지금은 눈앞엣 것만 보여. 몸도 늙어지고, 눈도 왁왁 어둑어부난" 젊어서 며칠 걸리지 않고 완성하던 고분양태. 이젠 하나 완성하려면 한달쯤 걸리기도 합니다. 초롱같던 눈, 아마도 창호지 바른 초롱은 그땐 사방이 밝으니 그렇게 말했던 걸까요. 눈을 딱 뜨면 양태 저 끝까지 확 봐졌답니다. 그녀 일하던 양태판엔 엉글게 짠 엉근양태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습니다.
허나 그의 전공은 촘촘하게 짠 고분양태. "고분양태는 멩지(명주)라" 양태 중의 양태, 날의 수가 400개 넘는, 가장 가늘고 세밀한 솜씨가 발휘돼야하는 최상급의 극세공품. 그녀는 그런 핸드메이드 제품, 갓의 차양을 만들어냅니다. 현대 기계문명은 빨리 빨리 가는데 이 양태의 고수, 그녀는 한코 한코 느리게 가는 삶을 살 뿐입니다.
# 일곱 살에 바농대 잡아…소문나게 일 잘해
일곱 살입니다. 할머니 동무릎에 앉아서 양태 코 걸리는 것 배웠을 때는. "할머님은 우리 셋년은 착해부난 아무거나 허크라"(작은딸은 착해서 뭐든지 잘하겠다) 고사리 손 솜씨를 본 할머니는 그랬답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양태를 잘했습니다.
"혼클씩 혼클씩 베왕(배워서) 아홉 살부터 일청에 나가수게" 가물개(삼양2동)는 양태가 셌지요. 해 뜨면 친구 남선이네 집 일청으로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열 명 정도 되는 소녀들이 경쟁하듯 바농대를 잡았지요. 아침밥 먹을 새도 없이. "여름 낮엔 동네 우뭇에 강 목욕허고, 우리가 막 소문나게 일을 잘허엿수다. 지금도 벗들이영 양태허당 밤엔 호박타당 볶아먹고 헤난 생각납니께."
열 한 도리(둥글게 한바퀴씩 11회 돌아가며 짠 것), 열 두 도리쯤 결면 조반 먹으러 갔습니다. 해가 양태판 위에 오면 시간을 짐작했습니다. "열두시되면 마흔 세도리쯤 졸아 점심 먹엉 놀고. 양태 허라 허민 헷주. 어둑어질 때까지. 일흔 도리 되면 잘 발룬다고 헷수다. 나이 들어 열 두어 살 되난 모둠으로 보리쌀 가졍강 밥헹 먹고" 줴기떡 만들엉 먹고. 노래 부르면 일이 늦어진다고 그도 못하게 했습니다. 단지 "두어랑아~ 두어 두어 두어 두어~ 기여 기여 기여~" 노래했다지요. 낮엔 양태하고 밤엔 야학도 한 덕분에 이름자 정도는 쓸 수 있습니다.
# 대 좀진 거는 고분양태, 죽사 만드는 일 어려워
"열세 살 안엔 이것만 헷주. 고분양태만. 옛날엔 좀진 양태라고 헷수다. 대부분 여자덜은 갓일을 베와십주. 갇젠(결으려고)해도 여기로 시작하면 머럭(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가는 대)이 이렇게 돌아가야 하니까 잘 못헙니다. 대 좀진 거는 고분양태하고, 다른 건 광통하고. 총모자만 안헷주. 다른 건 다 헤낫수다. 젤 어려운 건 고분양태우다"
고분양태는 일반 양태와 달리 앞 판을 사선으로 겯고 다시 뒤판으로 잣습니다. 무엇보다 양질의 대나무 실(죽사)을 가늘게 뽑아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해서, 원 재료를 가공하는 기술과 그것을 갖고 양태를 잣는 일까지 해내야합니다. 그녀의 야무진 손매는 그런 세죽사를 뽑는 일이 남다른 데 있습니다.
잘 짜여진 양태는 오일장에 가서 팔았습니다. "관덕정 마당에 갓주마씀. 다섯 개씩 실로묶엉 름구덕(종이와 천으로 바른 대구덕)에 담앙. 육지 상인들은 좋아 뵌 걸로 이리 오라고. 얼마라고 하면 더 주는 사람도 이서수게. 탕건 들른 사람, 양태 든 사람 빙 둘러 앉앙이시민(앉아있으면)"
말총으로 만든 머리쪽의 총모자, 차양쪽인 양태로 구분되는 이 갓은 분업이 잘 된 형태지요. 갓방에서는 모자와 양태를 모아 갓을 완성합니다. 하여 멀리 통영 갓방에서 제주도까지 탕건 양태 구하러 들락거렸습니다. 어머님네 거래하는 상귀들이 있었습니다. 동네엔 여자 중상이 많았지요. "그때 돈이 오전이라. 우리 양태 좋다고. 그땐 양태 하나에 한 냥 두 돈 오푼을 받앗수게"
# "한국의 갓 인류가 만든 가장 멋스런 관모자"
"상립(상제가 바깥에 나갈 때 쓰는 갓)이요. 우리나라 풍속은 누구나 다 시묘살이를 하는데 불행하게도 나와 같이 표류당하거나 혹은 부득이 먼 곳으로 가는 사람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으므로, 피눈물나는 슬픈 마음을 이 깊은 상립 속에서 변함없이 간직하고자 하는 것이오." 성종 때, 제주추쇄경차관으로 왔던 「표해록」의 저자 최부가 한 말입니다. 부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가다 중국으로 표류했을 때 그곳 관리가 그가 쓴 갓을 보고 묻자 답한 대목이지요.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엔 총모자 만들려고 제주도 말총을 다 매점하는 바람에 갓 값이 폭등했다는 대목도 나옵니다.
세밀하게 결어진 아름다운 갓의 양태 사이로 그림자가 선비의 얼굴에 드리우면 갓의 품위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지금은 단지 영화나 사극에서나 빼놓을 수 없이 등장하는 갓이지만 한때 갓 쓴 모습을 본 어느 외국인들은 그랬답니다. "인류가 만든 가장 멋스러운 관모자"라고. 특히 제주의 탕건, 양태는 예로부터 유명합니다.
"옛날엔 구르마도 엇어부난 등짐으로 지곡, 고지(곶자왈)에 강 지들커(땔감) 허여당 삶곡, 숯 지어당 팔곡. 숯 허젠 허민 눈 우이도 걷곡." 고분양태장 송옥수,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일제강점기 땐 농사한 것 다 공출 당했지요. 놋그릇도, 자굴도 비어다 바쳤습니다. 양태가 밥이 되지 않아 오랜시간 그것을 놓아야 했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기다리던 해방이었으나 이후, 제주사람 누구나 그렇듯이 4·3의 한복판에 그녀도 있었습니다.
# 4·3때 어느 오름인들 다니지 않은 곳 없어
"난 어느 오름인들 안 다녀난 디 엇수다. 지금이라도 어디 어디 가민 눈에 훤허여. 총 맞앙 죽느니 눈에 강 빠졍 죽어야지. 도망다니당 보면 죽은 사람 천지라. 난 죽을때랑 나허고 세살 먹은 딸애기허고 같이 죽어져시민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이신가헷수다. 애기만 등에서 빠져나가지 안허게 업어십주" 스물셋 어린 어미였다.
토벌대 피해 도망치다 눈 피해 돌 위에 앉으면 아이는 낭섶(나뭇잎)만 만지며 꼬물락거리다가 되레 엄마를 조심시켰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기침허지 말아. 기침하면 비행기가 와랑탕하고 총은 팡 허여" 했답니다. 손은 시리고 땀은 좔좔 났습니다. 사람들 쫓아가다보면. 고무신은 칡으로 동여맸습니다.
"민오름, 다나오름…노로손이 오름 굴에서 스무며칠 살앗수다. 그땐 산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안. 다 죽어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지금도 사람이 그렇게 많아" 도망가고 도망가던 산에서의 삶, 물 없으면 눈 녹여 쌀을 익혀서 조금씩 먹었습니다. 평범하게 살다가 4·3의 와중에 휘말려 피신하던 남편을 중산간 서회천에서 만났습니다. "아기 손 심엉 밥 먹언디야? 너도 사나이로나 낳지. 헙디다" 남편은 끝내 그날이 마지막이었습니다. 4·3은 남편과 시아버님, 둘째 시아버님, 둘째 시동생, 한집에서 넷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녀 사는 이 집도 가물개서 둘째 안가는 네칸 집이었습니다. "남편도 없주만 무조건 여기서 살쿠다. 시집이선 좋아헷주마씀. 그저 아무 생각도 없이 이 집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엇수다. 그 아기 업고 음력 오월 그믐께엿수다. 비가 막 새니까 어욱 비어당 덖으멍 살앗수다" 살았으니 무조건 살아야했습니다. 시동생들도 지켜야했지요. 그 시절, 산에서 살다 왔다고 하면 곱게 말해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바로 보지도 않고 곁눈질로 보았습니다. 살단보난 살아지긴 헙디다만 농사하고 한복하고 일이란 일 다했습니다. 여자 홀로 열 번 넘는 식게하고 명절하고 그 곡절의 삶을 수없이 이어갔습니다.
# "살암시난 이젠 명예회복도…정말 고마운 일"
4·3후 먹고 살자니 양태를 설렀었습니다. 집에서 둠비(두부)도 만들고, 술항아리에 술도 빚었습니다. 나이들어 다시 잡은 양태, 그래도 손은 기억했지요. "나 엇어도 이젠 이런 거 전수해줘사주 허는 마음입주. 하나 있는 딸은 육지 시집갔지만 이 일도 잘헙니다" 양태의 삶 송옥수. 이 양태판만 앞에선 마음이 정리된다는 그녀.
이제는 4·3평화공원 가서 남편 이름자만 보여도 얼굴을 보는가 한답니다. 툭하면 폭도가족이라고 스무날 80명 정도 격리 수용되며 살았던 세월도 멀리 있습니다. 동척회사(제주시주정공장)에서도 수용되어 살았습니다. "노대통령이 직접 나완 4·3사과 헐 때엔 정말 고마웁디다. 비석도 4·3평화공원에 이름도 확실히 나온 걸 보난 살암시난 이젠 명예회복 되어시난. 아무죄도 어시 죽은 사람도 낭(나무) 속으로만, 곶 속으로만 돋단 이젠 활발하게 다녀졈신가 허여집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