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모슬포 '상어잡이' 이경익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대체 그 많던 상어들은. 마라도와 가파도 사이. 거기 살던 그것들. 그래도, 그는 기다린다. 왤까? 주낙을 당기면 하얀 물체가 흔들흔들 올라올 때. 수협에 팔아서 전표를 받아올 때. 또 있다. 모슬포 어민들의 수입원인 방어. 그것들을 먹어치우는 상어를 잡는 일은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하나도 못잡을땐? 허탈할 것도 없다. "오늘 못잡으면 내일은 잡힐거다 그런 희망 없으면 못하지. 상어만 죽 헌게 아니고 다른 것도 했으니까." 그런 낙관은 바다에서 얻은 거다.  2009 전주국제영화제 다큐 지원작으로 선정된 '모슬포 마지막 상어재비' 주인공 이경익. 주낙으로 원시의 상어를 잡는 전통 기술의 보유자. 그는 젊은 날부터 수백마리의 상어와 싸워왔다. 그는 다시 꿈꾼다. 대해에서 상어와의 한판 승부를. 미끼를 문 상어가 올라오기를. 그를 만났다. 모슬포 항구에서.

 예전엔 산제 지낼 때나 제상에 적을 만들어 올리기도 했던 상어. 이젠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옛날 상어를 사 가시던 제주상회 할머니도 안계시고. 상어가 나와도 살 사람도 없고, 잡으려면 경비도 많이 듭니다. 이젠 상어가 하늘의 별따기. 딴 데강 사는 모양인지. 마라도 가면 꼭 걸르지 않고 잡아왔는디." 오래도록 상어가 유혹했다. "바람 안 불고 물이 잔잔할 때 상어가 물 밑에서 좍 올라오는게 보여마씀. 150 정도까지. 그것들 올라오는 것 보는 기분따라 하다보니 세월이 이만큼 흘렀수게." 그 황홀한 풍경, 거기에 홀려 그렇게 세월을 흘려 보냈다.

 # 내년 전주국제영화제 출품작 '모슬포…' 주인공

 1942년 가파도 출생. 아버지는 가파도에서 고기잡이 배를 탔다. 초등학교 때 서귀포로 나왔으나 다시 모슬포에 정착했다. 네 아들 가운데 두 아들이 같은 길을 가니 삼대가 배를 탄 셈이다. 요즘 그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됐다.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 초대작으로 선정된 김대웅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모슬포 마지막 상어재비'. 3년 전. 모슬포 방어축제 때 김 감독의 눈을 잡아끈 것은 어른 키를 훌쩍 넘는 250㎏짜리 상어. 모슬포 수협에서 매달아 논 그것을 본 김 감독. 가슴이 쿵쾅거렸다. 누군가 사투를 벌였을 상어잡이의 풍경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때였다. 주인공인 상어잡이 이경익을 만난 것은. 이후 3년 동안 현지 자료조사를 하고 기획했다. 제2의 '워낭소리'를 꿈꾸는 이 영화는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이경익과 가족들의 이야기, 모슬포의 풍광과 바다를 담은 휴먼 다큐를 담아내고 있다.
 얼마전 그는 작은 상어 3마리를 잡았다. 영화촬영 차 나가서였다. "옛날 잡았던 데는 고기가 안 물고 주낙 당길 때도 힘들고…잡는 것은 검은 모들(검은 상어)하고 작은 것이 막쟁이. 크면 저런 까만 상어가 됩니다." 영화 촬영? 하다보니 제작사측에선 제작비가 어려움이지만 상어잡이에겐 마땅히 잡혀줘야 할 상어가 잡히지 않아 동동이다. 허나 기대를 접은 건 아니다. "5, 6월 장마철 안개가 낀 때는 잡힐 확률이 크니까 이제 다시 한번 도전해야지요."

 상어는 모래와 돌이 있는 데 잘 산다. "줄 같은 거 그물망 같은 거 엉켜있는데 살려고 합니까. 이젠 멸종되어버린 모양이라마씀. 아니면 다 죽진 안해실거고. 다른 바당으로 간 모양이라. 촬영할 때 서너번 주낙을 놓았는데 한번도 안 물어. 7~8년간 잘 안보여. 고기씨가 말랐는지. 비께도 옛날엔 그리 흔했는데." 그가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상어를 잡으려면 저녁 해가 두어발 있을 때 주낙을 놓았다가 만조때 가야한다. "아침에 물 때가 맞아야죠. 노련한 상어잡이는 감으로 안다. 한 50개씩 주낙 놓고 한번 롤러로 전부 잡아당겨봐야 상어가 문거 안 문거 알지. 참대로 낚시하는 것 하고 달라. 옛날은 20~30개씩. 200~300㎏ 짜리도 걸리고. 보통은 60~70㎏ 정도지만. 무거워서 올려놓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고래보다 작지만 상어도 자기보다 작은 것은 다 잡아먹어버려. 또 번식력이 강합니다. 죽상어는 열일곱에서 새끼 열여덟마리가 뱃속에 있어요. 그 새끼들은 바당에 던지면 살아납니다. 만삭의 상어가 올라올 때는 밑으로 알이 아니라 새끼들로 배태하기 때문에 나와서 헤엄쳐. 여기 상어는 사람 해치지 안헙니다. 상어? 우린 하나도 안무서워마씀." 

 # 상어 '외우네기'는 멸종되어버린 모양이라

 서른 살 즈음. 작은 배로 상어를 잡으러 나갔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상어잡이 배들이 많았다. 열척 정도. 지금은 나가는 이들이 없다. 간혹 그의 아들들이 함께 나서기도 하지만.

 상어잡이는 아버지네 동네 분들 하는 것 보고 배웠다. "학교에서 배운 것도 아니다. 가파도에선 롤러로 당기는 것도 없고 해서 손으로 당기지. 몇 년 있어서 롤러로 당겼지. 이젠 유압으로 하면 잘 올릴 수 있주. 선원들도 편하고. 큰 배로 갈 때는 선원이 3명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둘만 가도 충분합니다." 상어가 잘 잡히던 때는 70년대 후반. 가격도 좋았다. "예전엔 500㎏, 600㎏짜리도 잡았고 값도 좋았는데…이젠 수입이 터져서 그렇지. ㎏당 4500원,  7000원까지 했주."

 마라도 가파도 쪽이 물살도 세고 수심도 제일 깊다. 깊어야 상어가 산다. 그는 거기까지 가서 수심 150, 200까지 상어 잡는 주낙을 놓는다. 여기서 잡는 것은 수많은 상어 종류 가운데 '외우네기'. 고기가 왼쪽으로만 뱅뱅 돈다고 해서 그런가. 상어지느러미는 세계 5대 요리 가운데 하나다. 그의 상어 예찬. "상어는 깨끗하고 맛이 좋습니다. 상어는 던져부는 부위가 하나도 없주. 껍질까지. 외우네기는 특히 맛이 좋수다. 청상어는 잘 먹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바다. 사투를 걸어야할 때가 왜 없겠는가. 허나 그는 이미 초연하다. "상어 걷으러 갈 때 혼 나나수다. 파도가 세니까. 이젠 3일 주의보 있을 때니까 그렇지. 옛날엔 주의보도 맞지 않아서 배가 파도 속에 들어갔당 나오고. 절 따라 배질을 잘해야지. 선장이 노련해야주."

 # 열아홉부터 고기잡이 배…구룡포까지 조기잡이

 열아홉 시절부터 배를 탔다. 남의 배 2, 3년 타다가 무역선을 탔다. 흑산도, 연평도, 구룡포, 포항, 강원도까지 누볐다. "조기장사로, 오징어 낚으레로 안가본디 엇수다." 오징어 한두름(스무개)에 찐빵하나 바꿔 먹던 시절. 큰 조기하나 혹은 소라에 김치하고 바꿔먹던 시절. 돈을 모아 삼천포에 가서 170만원 주고 배를 샀을 때가 기뻤다.

 그새 어로 기술도 늘었다. 옛날엔 장비가 없어도 다녔다. 이제는 안개낀 날이나 어두워도 찾아간다. 바다장어 10㎏ 짜리도 올라오는 게 어탐에 찍힌다. "어두우면 망을 털지 못하는데 이제는 밤에도 조업합니다. 고기가 그러니까 견딜 수가 없겠지요. 그런 기술은 발달했는데 고기는 없습니다. 주낙 배는 미끼값도 비싸 하루 경비도 안나올 때가 많고. 미끼로 고등어를 쓰는데 그것도 경비가 만만치 않고. 돌민어·돌돔, 그거 놓으면서 해볼겸해야지. 배배 돈벌어봐도 그게 그거마씀. 한달에 조금이 두 번 돌아오는디 그 조금이 물때가 맞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한 조금이 돌아와도 안됩니다. "

 허탕치는 날엔 다음 물때(조금)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젊은날 보낸 바다밭. 바다는 아이들 넷을 키워주었다. 장성한 아들네랑 함께 일할 수 있는 덕승식당도 냈다.

 4·3때 죄없이 스물다섯 나이에 희생당한 아버지. 하여 그 얼굴 한번 못보고 자랐다는 1945년생 모슬포 토박이 아내와는 1968년에 결혼. 아들 넷. 모두 결혼시켰다. 그 아내, 함께 형제섬에 가서 한치 낚아 미끼 걸어주며 함께 배 타기도 했던, 미안하기만한 아내다.

 # 바당에 풀이 나야지…매립만 말고 물 흐르게해야

 그가 항구에 정박중인 자신의 '멜(멸치) 배'를 가리킨다. 자신의 목선과 아들의 배가 나란히 흔들리고 있다. "배를 유지하는 데도 돈이 많이 들어마씀." 가라하고 싶지 않았으나 스스로 아버지의 길을 가는 셋째와 막내아들이다.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여기는 다 돌아가면서 바다니까. 할아버지 아버지 살아계셨을 적에도 그렇고, 다 배만 타고 싶은 모양이라마씀." 어떨 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바다. 그래도 그는 정년도 없는 바닷사람이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요즘 걱정은 멸치. 멸치 잡을 준비를 하고 저렇게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도 기척이 없다. "이상하게도 금년은 멜이 하나도 안 나왐수다. 요즘 멜이 젖국이 잘 나올땐데. 수온도 차갑고. 작년엔 그런대로 많이 났는데. 더 살찌면 액젖이 잘 나온다고 해서 2월 돼야 잡았주."

 상어가 잘 물 적엔 마음은 언제 물때(조금)가 돌아올까 기다려졌다. 수입산에 밀리고, 바닷 것들이 씨가 말라가면 대대손손 다음은 무엇을 의지하고 살지를 걱정한다. "바다도 세고. 배하는 사람들이 매일 감척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다 늙고 조업은 헐거 없고. 앞으로 젊은 아이들 사는게 걱정이라마씀."

 옛날 테우 다닐 적엔   (모자반)이 물 위에 떠서 스쿠류에 감길까봐 걱정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구경하려해도 없다. "바당에 풀이 나야죠. 감태 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엇수다. 멜같은 것도 있어야 알 까고 허는데. 이젠 갯가에는 아무것도 엇수다. 은 일절 없고. 이젠 돌이 하얗게 돼버려. 전복도 귀하고. 가파도 살 적에 어머니 아버지가 콩나물을 모슬포에 가서 사다가 낭(나무)불 때서 먹을 때가 좋았지. 이제는 공해, 쓰레기 천집니다. 형제섬쪽으로 주낙 가다보면 깊은데 가면 깡통, 속내의까지 올라와요. 중국배들까지 와서 정박하다보니." 가정이나 배 선주도 그렇다. 인간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는 생각이다. 정화작업을 하는 체하지만 깊은 데는 제거를 못하고 있단다. "바당이 살아야 하는데 이러단 앞으론 몇 년 있으면 고기씨가 다 말라버릴거우다. 그 좋던 신영물도 이젠 막아버려서 탄약고 모양 만들어부난 물이 말라부런. 옛 추억을 갖고 오는 사람들도 아쉬워합니다. 옛날처럼 해야지. 국가에서 물물 하면서 있는 물은 막아불면 됩니까? 전부 매립해 버리니까."

 그는 제주도 만큼은 개발한다 개발한다 하지 말았으면 한다. "해안도로 밑으로는 일층 짓고, 산으로 갈수록 높아도 되는데. 바로 바당 앞에 짓고 그러니까 옛날 집 하나도 못 찾습니다. 새마을 사업 포장했는데 조그만 길에도 다 해안도로고 뭐고 세멘(시멘트)들 하니까 걷는 사람들도 불평합니다." 상어잡이는 이젠 거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이경익. '모슬포 마지막 상어재비' 영화가 희망이 됐으면 했다. 저무는 빛. 모슬포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꽂혔다. "내일은 잡히겠지 하는 희망으로 살아십주." 칠순을 앞둔 그의 도전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젊은날, 상어와 싸워온 그때처럼. 저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처럼.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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