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한국무속연구가 알렉상드르 기예모즈
백발의 프랑스 노학자는 시종 겸손했다. 한국문화?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는 투다. 대신 말한다. 정확한 우리말로.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 우리가 태어났는데, 돌문화공원의 훌륭한 예술품인 돌의 기운에 기가 막혔다"고. 1973년 젊은 그는 제주칠머리당굿을 보러 제주에 왔었다. 동영상으로 그 독특한 굿을 찍었다. 그는 제주굿에 1948년 비극적인 역사가 깃들어 있음도 알았다. 그것이 스민 무속이므로 얼마나 이야기가 많을 것인가를 그때 알았다. 더 깊이는 얘기하지 않으려 했다. 한국의 무속을 연구하며 한국인의 내면을 사랑하는 사람, 프랑스에서 한국학 연구자들을 배출하고 유럽한국학회 회장을 역임한 한국무속연구가 알렉상드르 기예모즈. 그의 아내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빛의 화가' 방혜자이다. 잠시 제주에 온 그를 만났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
# 한국 무속문화 평생 화두…무속관련 책 출간

지난 4월 프랑스에서 이색적인 전시회가 열려 국내·외서 주목을 끌었다. 주불문화원에서 열린 한국의 무신도 전시회. 그 무신도를 관람객을 대상으로 상세하게 설명한 이는 백발의 프랑스 한국학자 알렉상드르 기예모즈. 많은 관람객들이 한국 무속의 세계에 흥미를 보였다. 이날은 이 노 한국학자에게 매우 의미 깊은 날. 자신이 평생 연구한 한국 무속 연구를 총망라한 책의 출판 기념회를 겸한 자리이기도 했다. 책은 「부채 무당 및 무당과 인류학자」. 한국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눈들도 빛났다.
"서울의 한 부채무당을 만난 이야기죠. '부채무당의 삶 이야기'와 '무당과 인류학자'로 구성됐어요. 무당과 인류학자와의 관계, 서로 어떻게 10년 동안 만났는지를 알 수 있어요. 몇 십년 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하다보니 아주 오래 걸렸어요." 부채무당? 무속에서 소도구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방울과 부채다. 방울은 무당이 신을 청할 때 손에 들고 흔들어 소리를 내는 강신용구이고, 부채는 무당이 춤을 출 때나 인간에게 복을 줄 때, 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모의동작에서 사용된다.
한국의 무속을 우리말로 듣는 것도 어렵지만 불란서말로 번역하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었음을 그는 에둘러 말한다. "매일 매일 조금씩 작업해야 돼요." 막상 책이 나오자 프랑스에서 한국학을 하는 학자는 물론 동양철학이나 민간신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프랑스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무가는 문학성을 띤 불어로 아름답게 재탄생됐다. 한국 구비전승 문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한 무당의 삶과 인생까지 깊이있게 다뤘다는 평을 얻었다. 가장 토착적인 한국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데 무속은 필수다.
# 부채무당 만나…한 문장을 열 문장으로 연구
"부채무당은 사투리가 아주 심했어요. 저는 전부 배웠어요. 녹음하고, 쓰고, 한 문장을 열 문장으로 연구했죠. '왜 그렇게 머리카락을 잘랐느냐?'서부터. 1917년생인 할머니가 1992년에 돌아가셨으니까 나이는 불란서 오실 때 나이와 제가 같은 나이가 됐어요. 그 할머니가 분명히 원하는 것을 저는 한꺼번에 발견하지 못했어요. 저는 학자로서 무당의 세계를 자세히 배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연구하기 위해서 할머니가 집에서 손님을 받을 때는 제가 옆에 있었어요."
당시는 무속인들이 박해를 받던 때, 미신타파 한다고 힘든 시기였다. 연구자들도 그들을 만나려면 힘이 들었다. 막강 민속학자 임석재 선생이 경찰을 직접 만나 이해를 구하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신설동의 부채무당과 그는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통돼지 있잖아요? 통돼지를 경찰한테 굿 끝나서 줬어요. 무당이 다음부턴 자기 집을 찾아 올 때 공중전화 찾지 말고 신설동파출소 와서 전화하라고 했어요. 굿할 때는 집 밑에 지하에서 하니까 소리가 안나요. 굿을 할 때는 하늘에서 부채 떨어지고 명도 떨어지고 등등 해요."
무당은 기가막히게 웃기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단다. "첫 결혼이 아닌 사람이 결혼하기 전 굿을 해서 조상들한테 물어봅니다. 결혼하면 되느냐 안되느냐 먼저 물어보는 것이죠." 엽전을 던지고 하는 점도 있었어요. 사진하고 동전을 놓고, 이렇게 하면 이런 뜻이지요? 대주가 다른 여자하고 갈까? 말까? 하는 것 다 나와요."
처음엔 무당의 사설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결국 이방의 젊은이가 맹렬하게 굿판에서 좌정했으니 부채무당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 "저를 양아들 삼았어요. 말씀이 어려워서, 일단 녹음하고 집에 와서 듣고 다시 물었지요. 손님 만날 때 재미있는 것 많았어요." 언어는 달랐으나 마음으로 통했단다. "이젠 이 책이 저하고 얘기하는 것이죠."
1986년 9월, 파리 그의 집 마당에서 부채무당 초청 굿판이 벌어졌다. "가족의 안녕과 액을 막기 위해 벌이는 제수굿을 했어요. 프랑스 친구들 50여 명이 모였어요. 굿을 하루 종일 했어요. 돼지 머리 올리고. 드골 대통령도 오셨어요." 어떻게? 놀라는 눈빛에 그가 웃으며 이어받는다. "대통령은 혼으로 오셨어요. 불란서 깃발도 마련했습니다. 제가 많이 배웠어요. 탈춤하는 친구들이 저 대신 도움을 줬고."
# 동해별신굿 조사연구 위해 2년마다 현장답사
그는 어떻게 한국의 굿에 빠졌을까. 1968년 유학생 방혜자와 파리에서 결혼하고 한국에 인사하러 왔을 때였다. 국제 결혼이 드물던 시절, 아내가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한국식 절하는 법. 대강 교육을 받고 공항에 도착했다. 장모는 "외국인과 결혼해서 딸 하나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들 하나 얻었구나" 좋아했단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한국인 장모한테 시멘트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을 했으니 첫 인상은 무조건 통과.
잠시 다니러 왔던 그에게 당시 불란서 대사가 한국에 있는 동안 무속 연구를 해보라 했다. "대사가 무속에 관심이 깊은 사람이었어요." 마침 불어교수가 공석중이었다. 서울대, 성균관대, 외대 등에 출강을 나가기 시작했다. 무속? 호기심도 있었다.
"시골에 무속 연구하러 가면서 버스를 타면 재미있었어요. 10원짜리 버스 탔어요. 사람들 연구를 하는 거죠. 어떤 할머니가 자세히 쳐다보다가 조선사람? 해요 '물론!' 그랬지요."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1970년 음력 9월9일 풍어를 기원하기 위해 거행되는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리의 동해별신굿을 보고서였다. 문화적 충격이었다. 깊은 울림이 왔다. 심리학을 연구했던 그에게 한국인의 무속은 새로운 정신세계를 알게 해주는 문화였다. 농어촌마을 사람들이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있는 무속신앙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후 2년마다 갔다. "결국은 마을 중심으로 연구를 시작했어요. 삼신할머니에 관한 무가를 번역 시작했는데, 번역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던지 결국은 민간신앙에 대해서 얘기했어요. 무속적인 면은 미루기로 했고. 아직도 발표하지는 않았어요. 기성리에서 잠을 자고 나면 온 몸이 축축해졌어요. 바닥이어서. 그래도 한국의 굿을 연구하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프랑스에 가서 영사기를 샀다.
# 제주도 무속 신앙, 48년 역사가 있는 섬 달라
1976년 다시 파리에 가서 한국의 민간신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의 동양학 박사학위 논문은 동해바닷가 농어촌 민간신앙에 관한 논문 「미역, 노인들, 신」.
"심리적으로도, 또 제가 한국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속을 연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장모님은 조금 반대했지만. 다른 연구하면 어떨까했지만 집사람이 자유롭게 해줬어요."
"1970년대는 굿을 '미신이야'했을 때였지만 아주 재미있었어요. 그래도 굿이 있었지요. 새마을 지도자들은 우리가 내부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상관없다했어요. 굿을 통해 마을의 힘을 봤습니다." 그는 굿을 통해 마을민들의 공동체의식을 봤다. 임석재 선생과 동행해 별신굿, 강릉단오제 등도 조사했다.
임 선생과 제주칠머리당굿 조사차 제주섬에 닿았을 때는 1973년. 독특한 굿판을 그때 영상으로 남겼다. 제주의 민속학자들과도 만났다. 제주칠머리당굿이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고 하자 그도 놀란다.
"다르지요. 제주도 무속은 다른 지방하고 많이 달라요. 물론 전통이 다르고 역사가 다르니까요. 난 그렇게 느껴요. 1948년에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잖아요. 재일동포들이 그때를 위해 굿 하러 오기도 했잖아요. 우연히 봤습니다. 제주도 사건 말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젊은 세대들이 차차 잊어버릴 거예요." 그의 표정이 굳어진다.
# 프랑스 한국학자와 한국 화가의 만남은 인연
"한국의 근현대사는 물론 「삼국유사」도 안 읽고 뭐했느냐고 해요. 제주 4·3도 이미 알고 있고, 5·18광주항쟁에 대해서도 남편이 더 잘 설명해줘요." 곁에 있던 아내 방혜자가 한말씀 거든다. 그녀도 그의 설명을 듣고 2년후 광주에 갔을 때 망월동 묘지에 가서 참배했단다.
한국생활은 매력적이었다. 9년만에 파리로 돌아가 한국학 교수의 길을 걸어가면서 그는 한국을 잊지 못했다. 한국학 연구소를 만들어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으나 정작 자신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낮춘다. "젊은 사람들이 우리 연구소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하면 그러라고 해요."
화가 방혜자와의 만남? 그것은 인연이었다. 젊은 화가 방혜자가 불란서 유학시절 어느 지방에서 쉬고 있을 때,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동양을 좋아하는 어느 집안에서 중국 아이를 초대했는데 없으니 네가 대신 그 지방에 가있으니 가보라했던 것. 그 전에 해발 3000m 페레네 카니구 산정에 올라가니 고산증으로 머리가 터질듯이 아팠다. 그때 한 프랑스 여인이 아스피린을 주어서 먹었는데 그이가 나중에 그의 시어머니가 된 것.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던 집안이 그녀의 그림을 좋아하는 알렉상드르 기예모즈의 집안이었다. 자연스럽게 분석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한국학자와 화가의 만남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던 아내의 그림세계였다. 다시 그는 어떻게 들여다 보고 있을까. "어디에서 그런 그림이 나왔는지 모르듯이, 무당들도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게 하지요." 한국에 살다 떠날 때는 이미 한국인이 된 듯했다는 노학자의 백발이 초록을 배경으로 빛났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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