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심산의 제주올레 사랑고백] <19> 15코스 한림-고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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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지인 한림항에서 걷기 시작하면 곧 솟대 위의 나무 갈매기와 바다 위의 진짜 갈매기가 어우러지는 멋진 풍광을 만나게 된다. | ||
제주올레 15코스는 금년 정월 초에 걸었다. 폭설이 내린 사려니 숲길과 한라산을 오르내리며 한겨울의 정취를 흠뻑 만끽했던 나날이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15코스를 걷던 날도 간간이 싸락눈이 흩날리고 있다.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리고, 올레길에는 채 녹지 않은 눈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으며, 함께 걸은 일행들 모두 두터운 겨울옷으로 중무장한 상태다. 그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득 그리움에 젖는다. 이리 저리 뒤엉킨 시절 인연 덕분에 한겨울의 올레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다.
이번 올레길의 새로운 동행은 네 명의 여자들이다. 가장 오래된 인연은 전주에서 내려온 초등학교 교사 최상. 2005년 가을, 전주에서 약 서너 달 간 시나리오 워크숍을 주재한 바 있는데 그때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녀는 이후 심산스쿨의 열혈 수강생이 되어 와인반, 인디반, 신화반, 사진반 등을 수료했다. 매주 전주와 서울을 오간다는 것이 꽤나 벅찬 일일 텐데도 언제나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멋진 아가씨다. 겨울방학을 맞은 그녀는 여중에 재학 중인 예쁜 조카 김나형을 데리고 제주로 와서 올레길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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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레길을 걷다보면 집 안에서 담벼락 위로 뛰어올라 매섭지 않게 짖어대는 다양한 개들과 만나게 된다. | ||
마지막 동행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고명현이다. 그녀가 나의 시나리오 워크숍에 참가한 것도 극영화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수영과 등산에 능한 그녀는 내처럴 본 아웃도어 걸이다. 사진 속의 그녀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봤더니 이 삼복더위에 지리산 능선을 걷고 있단다. 새로 맡게 된 '한국기행'이라는 프로의 첫 번째 주제가 '지리산'이어서 보름 동안을 꼬박 지리산에서 뒹굴게 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못 말릴 아가씨다. 나는 전화기에 찬바람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함께 걸었던 15코스를 떠올리며 이가 시리던 겨울 바다의 바람을 다시 한 번 느껴봐.
그들과 함께 걸은 15코스는 아름다웠다. 풍광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들과의 인연이 소중했기 때문이다. 유쾌 발랄한 열네살의 소녀 나형이는 길이 방향을 틀 때마다 가파른 소프라노의 탄성을 냈다. 우리는 길이 아니라 그녀가 예뻐 웃었다. 한림읍 대림리를 지나갈 때였다. 길가의 비닐하우스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할머니 한 분이 다짜고짜 우리를 잡아끌었다. 어안이 벙벙한 채로 끌려들어갔더니 날도 차가운데 커피나 한잔 하고 가란다. 무엇을 사가라거나 이야기나 좀 나누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따뜻한 커피나 한잔, 그뿐이었다. 할머니가 손수 끓여주신 커피를 홀짝이자니 가슴 한켠이 따뜻해졌다. 물론 스쳐지나가는 인연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인연인가. 문득 밥 딜런의 노래가 생각났다. 길 떠나기 전에 커피나 한잔(One More Cup of Coffee for the Ro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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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설들이 드문 드문 남아있는 농로가 고즈넉한 느낌을 준다. | ||
내 생각에 15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애월읍에 위치해 있는 고내봉과 그 둘레길이다. 봉우리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고내마을은 15코스의 종점이기도 한데, 제주도 전역에서 '한라산이 보이지 않는' 몇 안 되는 마을들 중 하나다. 무엇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을지는 빤하다. 다름 아닌 고내봉이다. 해발 175m에 불과한 고내봉이 남한 최고봉인 1950m의 한라산을 가린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시인 이성부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쓴 165편의 시를 한 데 모아 산시집(山詩集)을 상재한 바 있다. 그 시집의 제목이 고내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그래서 고내마을 사람들은 고내봉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20분만 걸어 올라가면 고내봉 정상이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이야말로 최고의 경관이다. 탁 트인 전망 속에 한라산을 감상할 수 있는 마을 뒷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내마을 사람들의 특혜요 자부심인 것이다.
고내에 올라 한라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그 작은 산에 올라야 큰 산이 제대로 보인다. 그래서 작은 산이 더욱 소중하다. 우리들의 인연 역시 마찬가지다. 소소한 인연들의 실타래가 한없이 뒤엉켜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 하나 하나의 작은 인연들이 모두 소중하다. 그 인연들을 한 자리에 모아 이렇게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바로 제주올레의 힘이다. 제주올레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인연인 것이다.
글 심산(작가·심산스쿨 대표)/ 사진 김진석(사진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