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재일3세 작가 강신자

 "붓으로 굿을 한다." 얼마전, 한 재일3세 작가가 제주에 왔다. 선인장 가시마저 졸고 있던 폭염이었고, 가벼운 차림새였다. 그가 처음 제주을 찾은 것은 지난 3월, 그때 만났었다. 이 말은 그때 그가 쓴 제주노트 한구절이다. 다시 만난 그는 몇달새 제주섬에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제주살이 15일. 그는 4·3의 현장, 굿, 오름, 마라도 곳곳을 찾았다. 그러면서 온전히 제주를 느꼈다했다. 머리가 아닌 피부로. 재일3세 작가 강신자. 그의 주제는 디아스포라(離散·이산 : 흩어진 사람들)다. "아, 디아스포라들은 육지에 있어도 섬에서 살고 있구나 생각해요." 제주도에서는 어떤 것들이 정리가 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작가. 스물넷에 논픽션 「가장 보통의 재일 한국인」으로, 제2회 아사히저널상을 수상했던 일본의 주목받는 이 작가에게 물었다. 왜 제주도인가? 홀로 배운 그녀의 한국말은 또박또박 명료했다.

 # 제주출신 고모부 "아픔은 비교할 수 없는 것"

 재일3세 작가. 1961년 요코하마생. 동경대학 법학부 졸업. 혜천여학원대학 객원교수(문예창작). 1986년 「가장 보통의 재일 한국인」으로 제2회 논픽션 아사히 저널상 수상. 저서로 「달팽이 걷는 법」·「노래선물」(아사히 출판), 「기향노트」(작품사, 2000), 「안주하지 않는 우리들의 문화 동아시아 유랑」(정문사), 「추방의 고려인」(안 빅토르와의 공저, 석풍사), 「노래-노스탈지아」·「이리오모테」(이와나미, 2009) 등. 2006년 그의 소설 「나미이-야에산 할머니의 노래이야기」가 「나미이와 노래를」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쓴 「나의 월경(越境) 레슨-한국편」, 개화기부터 90년대까지 한국 대중음악과 일본 음악 사이의 관련 양상을 살펴 본 「일한 음악 노트」를 펴내기도 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연구를 위해 10년 전부터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을 찾았고, 디아스포라가 주제가 됐다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4·3에 대해서 알고 싶다기 보다는,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는 기억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기억을 갖고 서로 알면서 살고 있는지, 내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싶어서 온 거잖아요." 그 섬, 꼭 오고 싶었던 섬 제주도. 그는 이미 5~6년 전부터 제주도에 오기로 되어 있었단다. 필연일까.

 "어느 곳을 가도 사람들의 말할 수 없는 아픔은 똑같다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느낌이 온 것은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연구하기 위해 사할린, 우즈베키스탄 동포들을 찾아 떠났을 때였다. "이 세계는 디아스포라 아닌 사람들이 국가나 민족을 만들고 있는데, 실제로는 디아스포라들이 갖고 있는 말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잖아요. 그들을 만나고 난 다음 생각했던 것이죠. 힘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역사가 있고, 디아스포라들이 갖고 있는, 기억이 만드는 지도도 있고, 세계도 있고, 인간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아주 중요했어요."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찾는게 그의 주제다.

 주위에선 재일교포라면 재일교포다운 글을 써야된다 했다. 허나 그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강신자. 그랬다. "일단은 자이니치라는 것을 떠나서 나는 멀리가겠다"고. 할아버지의 고향 전라북도 장수까지 가서 나를 '버린다' 선언했다. 그렇게 디아스포라 속으로 들어간 길이다.

 "고향을 떠나서 타향에서 살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디아스포라라고 부르자고. 그런 입장에서 사람들을 보게 된 거예요. 그들의 아픔이 있어요." 그러한 아픔을 고모부한테 이야기했을 때다. 제주 4·3을 알게 된 것도. "고모부가 그랬어요. 사할린동포들,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이 아프다고 너는 하는데, 여기에도, 너희 조국에도 아픈 상처가 있다. 어느 쪽이 더 아프다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때까지 고모부가 4·3이야기 안했는데, 고모가 옆에서 이 사람이 4·3을 겪었으니까 이런 얘기를 한다고 설명했어요." 4·3이 뭐냐고? 허나 고모부는 "너한테 말해도 알 수가 없다"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들을 수 있었다. 그러한 땅, 제주도였다.

 # "말할 수 없는 기억을 문학은 할 수 있어요"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한다. 허나 아버지들은 이야기를 잘 안한다. "10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못 들었어요." 제주에서도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역사나 민족이 그렇지만 기억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해요. 당연한 거잖아요. 그런데 사람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정리해야 하는 것은 말하지 못하는 기억 속에 있다. 그런 것을 느낀거예요. 아픈 기억 많잖아요. 창피한 것도 많고. 거기엔 보이지 않는 공백이 있죠. 그것을 전달해야할 사명이 있죠."

 강신자. 그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기억을 문학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거라고 생각해요. 우연히, 동시에 두 개의 인연이 있었죠. 고모부 얘기도 있고, 김시종 선생 이야기도 있고. 제주도 자체가 공백의 상징, 섬으로 저에게는 느껴진 거예요." 비로소, 그는 기억의 배후에 있는 공백에 부딪히고 싶다.

 # '나는 누구인가' 고교 졸업 후 느낀 정체성

 변호사가 되고자 했다. 일본 중앙대 법학과 출신 아버지는 변호사가 되고 싶었으나 될 수 없었다. 국적 때문에. 당돌한 소녀는 "그러면 내가 하겠다" 법과를 택했다. "근데 적성에 안맞았어요. 무의식적으로 문학쪽으로 가고 있었어요."

 고교시절, 그 역시 자연스럽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왔다. 그때까지는 일본 이름으로 다녔다. 대학 시절부터 한자로 쓰면 강신자, 일본식으로 교 노부코란 이름으로 들어갔다. 우리말도 몰랐다. 2세대인 부모도 우리말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을 보고 대학의 선배들이 찾아왔다. 교포들이 만든 모임에 나오라고. 너는 한국이름으로 살아야하고, 한국인으로 살아야 한다. 한국말 알아야한다 하는 거였다.

 "내가 피부로 느끼게 해달라고 했어요. 아무리 봐도 선배들도 그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일본사람이예요. 행동하는 방식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민족 의식 있잖아요. 그거하고 일본에 사는 재일교포로서의 민족의식은 똑같을 수가 없다 생각했는데 선배들이나 1세들이 하는 얘기는 한반도 사는 한국사람들과 똑같이 되라 그렇게 느껴졌어요."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어떤가? 1989년에서 1991년까지 2년간 충남도청에서 교환 공무원으로 일하게 된 일본인 남편을 따라 대전에서 살 때였다. 치열하게, 스스로 한국말을 배워나갔다. 주위의 시선은 어색한 모국어를 쓰는 그를 어렵게했다. "일본에서는 일본 사람이 아니란 것을 피부로 느꼈는데, 대전에서는 한국사람이 아니란 것을 느꼈잖아요. 웃기죠? 재일 한국인이 한국에 가면 한국사람이 된다 하는 것은 머리로는 그런데 한국에서는 전적으로 부정했어요." 이후, 그는 나름대로 한국과 일본의 가교를 했다. 그는 노래를 좋아한다. 문화운동가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역할을 하면서 가수 이상은과도 만났고, 그녀완 아주 가깝다.

 # 「가장 보통의 재일 한국인」 아사히 저널상

 일본에서는 버블경제라고 했다. 1985년 졸업시기. 학생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었다. 특히 명문 동경대 출신의 경우 더 그랬다.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 마이니치 시험을 봤다. 결과는 탈락. 국적이 한국인이란 이유였다. "경험을 통해서 일본에서는 설 자리가 없구나. 억지로 한국말을 배우는 것도 이상한 느낌이었죠." 사춘기에 누구나 3세대라면 진지하게 고민하는 아이덴티티를 생각해야 한다해서 쓴 책이 「가장 보통의 재일 한국인」. "신문사 시험도 떨어지고.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거 써야 되겠다해서 쓴 거예요." 그 책이 센세이널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줄은 전혀 몰랐다.

 "1세, 2세들이 화를 냈어요. 자기들이 갖고 있는 민족의식을 부정했다고. 특히 오사카 쪽에서 더 심했죠. 근데 같은 또래 아이들은 니가 우리들의 생각을 대변해줬다 했지만." 재일의 시각과 일본의 중간에서 태어난 '중간'사고를 솔직하게 썼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공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25년이 걸렸다.

 "얼마전 시인 김시종 선생님을 만났는데, 「가장 보통의 재일 한국인」 중심에 있는 것은 공백이다 했어요. 25년 전에 들었으면 이해가 안됐을 이야기죠. 그때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만 가지고 책을 썼지요." 그 말은 눈에 안보이는 것, 안들리는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사람끼리 이야기를 해도 못하는 것이 있잖아요. 그것을 느끼는 것이 문학이잖아요. 제겐 공백을 상징하는 것, 그것이 4·3이었어요." 그만큼 4·3은 강렬했던 걸까. "재일동포 사회에 있어서는 제주인 비중이 커요. 그 사람들의 문화, 역사, 기억은 교포사회에서는 중요한 부분이예요. 그것을 제가 몰랐던 거예요."

 # 디아스포라들이 갖고 있는, 기억이 만드는 지도

 강신자. 그는 리얼리스트다. 문학만이 아닌, 그의 글쓰기의 영역은 넓다. 강신자(교 노부코)만의 장르가 있다는 말도 듣는다. 열권이 넘는 저서는 세태에 영합하는 글들이 아니다. 왜 그는 줄곧 어둡고 무거운 소재에 매달리는가. 단지 쓰고 싶은 것을 쓸 뿐이다. 그의 유랑의 흔적을 보자. 그의 시선은 험한 역사를 헤치고 살아남은 오키나와 85세 할머니의 노래가락속에도 닿아 있고, 이리오모테섬의 무속에도 닿아 있다. 물론이다. 쓴다는 일은 고통스럽다. 제주를 떠나는 즈음에 그는 아주 큰 전환기에 선 사람처럼 말했다. "앞으로 아주 소설다운 소설, 일반적인 소설을 쓸지도 몰라요. 일반적인 모노가타리(物語, 이야기),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 같은…."

 뭔가 분명, 앞으로 들어가야 할 세계가 있다면 그녀는 지금 그 입구에 서 있다. 재일3세 작가로서. 여태까지 쓴 세계와 달리. 제주도라는 섬이 그녀를 그렇게 이끌고 있는 건 아닐까. 분명, 그는 제주에서 뭔가 풍부한 이야기를 축적한 듯 했다. 현장을 밟은 자에게만 느껴지는.

 "4·3당시 뭐가 뭔지 모르면서 죽고, 도망가고, 그리고 서로 무서워하고 그렇게 된거라고. 너무 논리적, 학술적으로 공부하면 안된다는 거예요. 오히려 곤란하게 됐잖아요. 결국은 인간에 대해서 써야 되니까. 4·3은 이것이다 쓰면 보편적인 문제를 개별적인 작은 문제로 만드는 거잖아요. 핵심에 있는 보편적인 문제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거, 그렇게 이야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무명천 할머니쉼터'가 있는 월령리 선인장 바다를 돌고 나올 때였다. 그녀가 툭 던졌다. 제주도, 참혹한 아름다움이 떠오르는 섬이라고. 제주 부둣가는 떠나는 이들의 열기로 더 뜨거웠다. 그의 눈이 자꾸 한라산에 머물렀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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