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재일제주인생활사연구모임 대표 고정자

 1953년 오사카 출생. 국립종합연구대학원. '고성오광대' 주제로 문학박사. 고베대 외 강사. 재일제주인 생활사연구모임은 해방직후 오사카에 정착한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연구하기 위해 모였다. 제주해녀항쟁 등 제주관련 연구논문을 쓰고 있는 후지나가 다케시 오사카 산업대 교수, 제주도 묘지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현재 제주에 온 다카무라 료헤이 아키타대 교수, 제주에 살면서 생활사를 연구했던 이지치 노리코 에히메대 교수 등 일본인학자와 재일언론인 정경모 선생의 차남으로 1980년대 지문날인 거부운동에 참여했던 정아영 리츠메이칸대 교수, 황보가영, 무라카미, 교토대 박사과정에 있는 고성만 등 8명이 참여하고 있다. 주기적인 모임과 방학때 집중적으로 채록작업을 벌이며 활동을 한다. 채록한 구술자료집을 오사카산업대학 소논집으로 차곡차곡 펴내고 있다. 지금까지 8편을 펴냈다.
 그때 그녀를 처음 만났다. 4·3 60주년 동경에서 열렸던 4·3 기념 행사의 김석범 선생과의 대담에서였다. 유창했다. 얼마 전 제주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그녀를 두고 한 제주대 일본어교수가 그랬다. 그녀만큼 우리말을 잘하는 재일동포 2세를 본 적이 없다고. 80년대 마당극운동을 일본에서 전개했던 재일 문화운동가이자 문화인류학자 고정자. 그녀는 경술국치 100년. 살 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수많은 제주인들. 그렇게 떠나가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말을 듣고 기록한다. 그녀는 '재일제주인 생활사연구모임'의 대표다. 모임은 1998년부터 시작되었고, 재일동포 2세와 일본인 학자들로 이뤄졌다. 가을물이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한 제주에서 만난 그녀의 이야기는 아픈 가족사부터 시작됐다.

 # 재일제주인들의 증언은 중요한 역사 자료

 45세. 일본공립학교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과 두 아이의 엄마. 늦었다는 나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문화운동을 하다보니까 재일동포들이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어요."

 재일제주인들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 것은 1998년.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였다. "그때 재일제주인들에 대한 기록이 빠져 있는 것을 알고 지금부터 해야지 안그러면 돌아가시니까 급해졌어요. 그때부터 이지치 선생, 후지나가 선생, 정아영 선생 다섯명정도 시작을 한 거예요." 4·3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일본내에서도 막힌 입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증언채록이 시작됐다.

 허나, 처음 증언자 찾는 게 어려웠다. "정아영씨 장인 얘기 듣고, 어릴 때 일본에 있다가 제주4·3 겪고 밀항을 왔다는 체험자 얘기를 또 들었죠. 또 한분은 제 외삼촌 얘기였죠. 그 후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없어졌거든요. 그때 이분들이 말하지 않았다면 파묻히는 역사죠." 처음엔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냐고 하다가 옛날 묻혀진 기억들이 나올땐 보람이 있었다. "그들은 너무 자기 인생은 보잘 것 없다고 하다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을 하신거지요. 그런 인식을 하게 한 것은 보람이죠."

 4·3을 겪고 일본에 온 사람들은 당시의 기억만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에서 인식해온 '폭도'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말하자면 냉동된 것들이 녹아가는 거잖아요. 지금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일로 인해 좀 힘든 부분도 있지만, 나중엔 중요한 자료가 될거라고 생각되거든요."

 # 4·3으로 외삼촌, 이모부 희생 당해

 1931년 도일한 제주출신 아버지의 고향은 지금은 공항 활주로로 내준 도두리. 1945년 12월 현해탄 건넌 어머니는 동회천. "북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아버지는 중학교에 가고 싶어 일본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왔는데, 형편이 너무 어려웠대요. 온갖 고생을 하셨죠. 어머닌 야채장사, 바느질 등 하지 않은 일이 없었어요"

 모든 가족이 도일한 아버지쪽은 고향의 비극을 비껴갔으나, 어머니쪽 집안은 그렇지 못했다. 4·3의 큰 상처로 얼룩졌다. "열일곱 큰 외삼촌이 농고학생 때 동굴에 숨었다가 돌아가셨어요. 다섯명 여학생을 포함해서 동굴에 숨었다가 토벌대에 발각당해 질식사했다고 해요. 이십대 이모부는 사형선고를 받고 정뜨르 비행장에서 학살당했어요. 지난번 유해 발굴 후에 DNA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요."

 평생 가슴앓이하던 어머닌 1965년 한·일조약이 맺어지면서 여권이 나와 한국 국적으로 바꿔서 고향에 올 수 있었다. 다행히 친정 어머니 돌아가시는 것도 볼 수 있었다.

 2남2녀중 맏딸. 초·중학교는 조선학교를 나왔다. "1959년 당시만해도 엄마는 딸이 시집가면 시어머니가 한국말밖에 못할거다. 그래서 너는 조선학교에 가야한다 그래서 갔거든요. 조선학교에는 조선역사를 가르쳤어요. 거기서 제주4·3이 있었다는 얘기를 역사 안에서 배웠고, 엄마들의 얘기속에서도 들었어요." 재일동포 2세들이라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그녀도 일본학교에 들어간 고교시절 비로소 느껴야했다.

 "당시 재일동포들은 학교를 어디로 선택해야하나 흔들리는 과정이었어요. 점차 일본에 정착하기 위해서 일본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고등학교는 일본학교 간다 하니까 그때부터 일본 이름을 쓰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완벽한 일본사람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본의 아니게 말하지 않게 되는 거죠."

 한국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나를 자각하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서다. "학교에서 이름을 어떻게 하시겠냐고 해요. 이름이 다카시마라고 했는데, 졸업장은 한국 이름이 나온다고. 괜찮아요. 그랬죠."

 # "한국인이 우리말 못한다" 의사에 충격

 재일동포 3세와 결혼했다. 충청도 남자였고, 1977년이었다. 그때 제주사람들이 육지 사람들에게 차별을 받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쿠노쿠는 제주사람만 사니까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결혼하고 보니까 남편 시댁쪽에서 저를 보는 시각이 그렇지 않은 거예요. 경상도 사람을 보는 눈치하고 저를 보는 눈치하고 달라요. 그때부터 내가 제주사람이고, 제주도란 섬이 그런 곳이구나하고 인식하게 된 거죠."

 시댁일로 한국을 처음 밟은 때는 스물다섯이던 1978년. 갓난아이를 안고서였다.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비행기 안에서 아, 여기가 우리 한반도구나 눈물났어요. 그때 남편 하는 말이 '한국에 가면 절대 한국말 쓰지 말라' 그래요. 당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얼마나 시끄러웠어요? 혹시나 오해받을까봐서였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대충 알아듣긴 하는데 내가 말을 못했어요."

 그에게 한국어 열공에 빠지게 한 연유는 대전에서였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설사라는 말이 안나오는 거예요. 의사가 편하게 일본말로 하니까 그제야 저도 편하게 일본말로 했어요." 헌데, 그 의사가 그랬다. 중국사람들은 어느나라 가도 중국말을 잊어버리지 않는데 당신은 한국사람인데 왜 한국말을 못하는거냐고. 울컥했다. "억울했어요. '설사'라는 한 단어만 안 나온건데. 그때부터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 마당극 미국 순회공연도…우리 문화 전파

 우리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녀의 가슴을 움직인 것은 신명나는 마당극이었다. "80년대 당시 '이쿠노 민족문화제'란 재일동포 2세, 3세들이 모여하는 문화운동이 일어났어요. 재일동포 양민기 선생 지도하에 마당극 바람이 불기 시작한거지요. 거기에 들어갔죠." 거기서 접한 우리의 봉산탈춤은 충격이었다. 아, 이런 것이 우리것이구나 마당극 운동에 온 몸을 실었다. "마당극은 민중문화의 뿌리죠." 한국인의 정체성을 그 마당극에서 알았다는 고정자. '잠녀풀이'공연에선 해녀투사역을 맡기도 했다.

 이후, 춤꾼 이애주가 일본에 와서 원폭 피해 한판춤을 추었다. "이애주 선생은 히로시마, 오사카, 도쿄에서 공연했지요." 그녀도 한국으로 날아갔다. 이애주 선생과 서울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한판춤을 췄다. 1988년이었다. 다음 그를 사로잡은 것은 '고성오광대' 놀이. 신명나고 찡했다. 1991년도에 같이 하는 마당극 팀과 고성에서 열흘간 고성오광대 전수를 받기도 했다. 재일동포들이 단체로 해서 간 것은 처음 있는 일. "해학은 물론이지만, 마당극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아픔의 역사를 표현하는 거잖아요." 재일동포 공립학교에 다니는 2세, 3세 애들한테도 우리 문화를 가르치는게 중요했다. 문화교육 강사로도 나갔다.

 "1948년의 4·24 한신교육투쟁을 주제로 한 '우리의 소원'을 미국 여섯곳에서 순회 공연하기도 했어요. 윤한봉 선생의 도움이 컸죠." 미국으로 망명한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수배자'로 불리던 민족운동가 고 윤한봉 선생이 재미동포들에게도 좋겠다해서 재미 한 청년에 의뢰해서 공연하게 된 것이란다. 이젠 문화운동 차원의 일은 후배들이 맡아서 해 나간다.

 # 재일동포 전통예술 어떻게 계승하는가 탐구

 그녀는 지금 재일동포들을 통해 제주도와 4·3의 인식이 많이 달라진 것을 본다. 예전엔 친족들이 사촌형부나 사촌들이 밀항으로 오는 모습을 봤고, 그들의 움츠러진 말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가령 이모부가 돌아가셨는데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빨갱이때문이라고 그렇게 얘기했거든요. 대한민국 군인이고 경찰의 손에 희생당했는데도. 저는 황당했어요.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친족들이 4·3을 얘기하는 내용이 달라졌어요. 아주 긍정적으로 말씀하시고. 그런 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뭐랄까 정부나 그런 인식 안에서 틀을 벗어나기에는 아직도 미흡하고, 몸부림 치는 모습들이 안타깝게 보여요."

 간혹 찾는 고향 땅에서 그녀는 간혹 씁쓸하다. 재일동포들에 대한 시선이다. "고향에 와서 보면 학교같은데 재일동포들이 얼마나 도움을 줬는지 공덕비를 보면 알잖아요. 이분들이 자기 고향에는 이렇게 기부했어요. 근데 재일동포들도 60년대는 아주 어려웠잖아요. 우린 반찬도 없이 사는데 고향에는 소포로 보냈어요. 그런데도 고향에서 이것을 받아서 우리는 4·3사건 모진 세월을 살았으니까 이렇게 도와주는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그들의 삶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게 아쉬웠어요."

 마당극을 통해 재일 2세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고정자. 손자를 두고 60을 코앞에 둔 그녀지만 여전히 명랑하고 앳된 모습, 씩씩한 제주여자 얼굴이다. "재일동포들의 전통예술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가에 대한 탐구와 제주도에 대해서도 계속 연구할 겁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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