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10)선비는 상소로써 말한다

   
 
  ▲ 실천적 의리사상을 바탕으로 일제에 대항해 의병대장으로 나섰던 최익현은 제주 유배기간 송시열의 문집을 읽으며 의리사상을 구체화했다. 최익현이 유배가 풀려 방문한 방선문.  
 
   
 
  ▲ 면암 최익현은 제주에서 유배가 풀리자 한라산 등정에 나서 방선문을 방문해 마애명을 새겼다.  
 
   
 
  ▲ 면암 최익현은 제주 유배가 풀린 후 제주 유림 이기온 등과 함께 한라산에 오른다. 영실코스의 기암 절벽이 가을 한라산의 정취를 전하고 있다.  
 
   
 
  ▲ 면암 최익현은 제주 유배가 풀린 후 제주 유림 이기온 등과 함께 한라산에 오른다.  
 
조선시대는 유교사회였다. 유교정치에서는 언론과 학문이 중시됐다. 임금에게 문서의 형식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상소는 조선시대 중요한 언로(言路)의 하나였다. 지식인들은 상소로써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하지만 상소로 인한 화를 감수해야만 했다. 임금의 잘잘못을 직언한 상소의 대가는 처절했다. 임금의 노여움을 사 절해고도로의 정치적 추방 즉 유배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의병장 최익현
면암 최익현은 고종을 대신해 10년째 섭정을 펼친 흥선대원군을 상소로써 퇴출시킨 인물이다.

조선조 제25대 임금 철종은 5명의 아들을 뒀지만 모두 어린 나이에 일찍 죽는다. 1863년 철종이 죽자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 고종이 제26대 임금에 오른다. 당시 고종의 나이는 12세였다. 헌종의 모후 조대비는 수렴청정을 하다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위임한다.

당시 조선은 순조-헌종-철종에 이르는 60여년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 일부 유력 가문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시기였다.

외척 세도가문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세도정치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변질된 비변사를 폐지한다. 또 당쟁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전국 600여곳의 서원을 철폐한다.

최익현은 이에 반발해 1873년 상소를 낸다. 이 상소로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에 물러나고 최익현은 상소의 내용 중 왕을 능멸하는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제주에 위리안치된다.

최익현은 41세의 나이인 1873년 12월 이진-소안도를 거쳐 조천을 통해 제주에 왔다.  귀양지는  제주성안 칠성동(현재의 제주시 칠성로 인근) 윤규환의 집이었다.

최익현은 유배기간 「주자서」를 외고 제주향교에서 우암 송시열의 「우암집」을 빌려 읽었다. 이를 통해 최익현은 실천적 의리사상 또는 의리학풍을  바탕으로 의병운동을 이끌게 된다.

최익현은 유배에서 풀려 1875년 4월 제주를 떠날 때까지 1년 넘게 제주에 머무는 동안 제주 유림에도 영향을 미쳤다. 최익현이 유배에서 풀려 한라산에 오를 때 동행 했던 이기온과 그의 아들 이응호에 영향을 준다. 이응호는 제주 유림 12명과 제주도 항일 비밀 결사체인 집의계를 결성한 인물이다.

이기온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는 상소로 제주에 유배 온 경주이씨 국당공파 제주입도조인 간옹 이익의 후손이다.

최익현은 1875년 3월 유배가 풀렸다는 공문이 당도하자 귤림서원 옛 터를 찾아 제문을 올려 제사를 지낸다.

최익현은 제문에서 "저 귤림의 서원을 바라보니 제 마음이 즐겁지 못합니다. 서원 자리에 말을 방목하고 밭을 개간해 제사를 받들지 않으니"(「국역 면암집」)라며 제사 지냈다.

또 제주 유림 이기온과 함께 한라산에 오른다. 최익현은 방선문을 거쳐 한라산 정상에 올라 얼음 반 물 반의 백록담을 보고 또한 영실의 기암을 본 후고 이에 대한 감흥을 기록해 둔다.('한라산유람기')

최익현이 찾았던 방선문 계곡에는 '최익현 이기온 래'라는 마애명이 여전해 최익현의 행적을 전하고 있다.

최익현은 1876년(고종 13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이에 대해 상소, 흑산도에 유배된다. 흑산도 천촌마을 입구 바위에 새겨진  '지장암' 글씨는 최익현의 유배생활을 기록하고 있으며 진리마을의 옛 샘은 '서당샘'이란 이름으로 전해지며 후학 양성에 대한 열정이 현재에까지 전한다. 3년만에 해배되지만 벼슬에 나서지 않는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 개혁정치를 편다. 조선은 1895년 8월 친러 정책을 이끌었던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 낭인과 군인들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을 겪는다.

최익현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의병을 일으킨다. 하지만 74세의 고령이던 1906년 6월 전북 태인에서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하며 싸움을 중단했다. 일본군에 의해 일본 쓰시마섬(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일본인의 주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며 거절하다 1906년 12월 생을 마감한다.

△유배가 풀려 돌아가다 비운 맞은 유헌
조선조 성종시대는 평화로웠다.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뒀다.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데에 질투,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긴다. 이 때문에 세자의 어머니인 왕비(폐비윤씨)는 폐비되고 끝내 사약을 먹는다.

폐비윤씨의 아들이 바로 조선조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과 신경전을 펼쳤다.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했으며 학문을 권했다. 1498년 사림들의 화를 입는 무오사화로 사림 세력이 축출된다. 이어 1504년(연산군 10년) 임사홍의 밀고로 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에 대한 사연을 알게 된 연산군은 당시 관련자들에게 처절한 복수극을 벌인다. 이를 갑자사화라 한다.

갑사사화와 관련돼 임사홍을 탄핵하는 상소를 냈다가 유헌이 제주에 유배된다.

제주에 미녀를 선발하는 관리를 보내기까지 하며 등 전국의 미녀를 선발한다. 기녀(흥청)를 궁중에 불러 들여 연회를 열던 폭군 연산군은 1506년 중종반정에 의해 몰락한다.

유헌은 중종반정으로 유배가 풀려 제주에 유배 왔던 김양보 등 5명과 함께 배를 타고 제주를 떠나다 해적을 만나 죽는 비운을 맞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한글의 수난이 기록돼 있다. 1504년 연산군은 폭정을 비방하는 한글(언문) 투서를 빙자해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전해진다.

△ 신명규-신임 부자의 유배
조선조 제20대 임금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의 아들이다. 경종은 비운의 임금이다. 14세 때 어머니 장희빈이 사사됐다. 경종은 1720년 왕위에 올랐지만 자녀 없이 4년 2개월만에 병으로 죽는다.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경종시대는 연잉군의 왕세제(왕위를 이을 왕의 아우) 책봉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치열했다. 1722년 신임옥사(신축옥사, 임인옥사)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상소를 냈다가 84세의 고령으로 제주 대정현 감산리에 위리안치된다.

신임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유배가 풀리지만 제주의 거친 바다를 이겨내지 못한다. 1725년 제주를 출발했지만 풍랑으로 5일만에 해남에 도착한다. 고령인데다 바다에서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해남에 도착,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맞았다. 유배인들에게 제주바다는 녹록치 않은 장벽이었다.

신임의 아버지는 신명규다. 신명규는 현종 14년(1673년) 효종능 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제주 대정현 예례촌(현 서귀포시 예례동)에 유배된다. 7년동안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과에 급제한 정의현 유생 오정빈이 신명규의 문하생이다.

신명규는 제주도의 인정, 풍속, 견문 등을 기록한  「묵재기문록」을 남겼다. 신명규는 천제연폭포를 구경하고 '특이하고 아름다고 유수한 풍치'라며 '천하의 절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명규는 1680년(숙종 6년) 진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신임-신명규 부자는 나란히 절해고도의 섬 제주에서 유배형에 처해지는 운명을 나눠 가졌다. 글·사진= 장공남 기자 gongnam@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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