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민속학자 장주근

 기막히다 했다. 21세기에도 제주의 신화를 살아있는 종교로 부른다는 게. "한 민속학도로서 먼저 제주도를 필드로 삼았던 나는 제주도의 자연을 깊이 사랑하고, 제주도를 내 학문의 고향, 마음의 고향, 제2의 고향으로서 그 민속문화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현지조사가 어렵던 1950년대, 제주도의 그것을 누가 보석이라 했던가. 제주의 무속 본풀이를 '서사무가'란 이름으로 학문적 규명을 하고, 그것의 가치를 발견해낸 사람. 제주도연구회의 초대 회장을 맡는 등 제주사랑과 민속학의 한 길을 걸어온 한국 민속학의 큰 산 장주근. 갈 수 없는 고향을 둔 실향의 노학자 장주근, 그를 만났다. 굽이치는 한국현대사의 격랑에 고스란히 몸을 데인 그의 가족사는 이 나라 분단사, 한 편의 드라마다. 그의 청담동 자택 창가론 은행잎이 노랗게 뉘엿뉘엿 익어가고 있었다.

 1925년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 1944년 만주 무순중학교 졸업, 1947년 월남,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 도쿄대서 사회학박사. 1955∼1957년 제주대 전임강사,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국문과 교수 역임. 일본 도쿄대 객원교수. 1979년 캐나다 토론토대 객원교수, 1982년 일본 국립민족학박물관 객원교수. 국립민속박물관 전신 한국민속관 개관(1966년) 당시 전시담당을 하는 등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4년 한국문화인류학회 회장, 1978년 제주도연구회(창립회원) 회장 역임. 1985∼1995년 문화재위원회 위원, 박물관 분과 위원 겸임. 지은 책으로 「한국의 신화」, 「한국의 민간신앙」, 「한국민속학개설」 「한국의 세시풍속」, 「한국민속논고」 「제주도무속과 서사무가」 「민속사진에세이」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민속이야기들」(2009) 등이 있다.
 '하얀 구름이 흘러간다'니! 헤르만 헤세 시 '흰구름'. 학교에선 종일 군사훈련이니, 천황이니, 근로봉사니 하던 중3, 초등엔 「조선어 독본」이 있었으나 중학교부턴 한국말 공부도 없었던 시절, 서점 한켠에서 발견한 한편의 시는 딴소릴 하고 있었다. 군국주의와는 정 반대의 방랑과 자유의 언어에 그저 망연자실 넋 잃고 감전. 시 한편이 소년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돈이 모자라 못 샀는데, 한 친구가 산 것을 보고 노트 다섯권에 베꼈다는 그 시집. 결국 소년은 헤세식 흰구름처럼 자유주의와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것이 민속학이었다고 믿었던 것일까. 소년은 그게 민속학도의 길로 이끈 연유였음을 후일 자각했다.

 # 평북 용천 육체의 고향, 제주도 마음의 고향

 그에겐 두 개의 고향이 있다. 평안북도 용천은 육체의 고향, 마음의 고향은 제주다. 그 시대, 누구나 암울하던 시대. 그는 초등 2년부터 5년제 일본인 중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0년간 만주의 무순땅에서 컸다. 외가의 정미업에 참여하면서 떠난 만주 대륙의 이민이었다.

 "1930년대 동양사회는 한국 중국 일본이 전부죠. 그때 한국사람이 만주땅에 가서 일본인 중학교를 다녔으니까 말하자면 동양사회의 코스모폴리탄이었죠." 2차대전 전운이 감돌던 1939년, 집에선 고향에 와서 큰 정미소를 다시 차렸다. 거기까진 운이 좋았다. 허나 가로막힌 38선. 1946년 북한 토지개혁과 국유화 정책에 정미소 몰수. 두 손 들었다. "중학교 졸업할 때는 일제 강제징병령의 2기로 걸려있는 나이여서 고향에서의 3년간 초등교원을 했지요."

 대학에 가고 싶었다. 스물세살, 1947년 봄. 청운의 뜻 하나 품고 사선을 넘었다. 가족과의 생이별. 이어 넷째 형이 처자 거느리고 넘어왔고, 맏형 내외마저 아들 하나 데리고 월남했다.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3000t급 LST 마도로스도 잠깐. 사범대 부설 2년제 중등교원 양성소 모집에 합격. 경기중학교 교원생활도 했다. 대학 입학. "탈북자 신세가 되었지요. 제대로 졸업을 했지만 공부는 제대로 했을 까닭이 없는거죠." 세월이 그런 세월이었다.

 # 아! 북의 어머니…50년만에 별세 소식 

 평북 용천군 역관의 외동딸이었던 어머니. 유머가 많던 '바람머리 2층집의 팔자좋은 노친네'였다. 5남3녀 가운데 다섯 아들 하나도 일제말기까지 징용 징병에 걸리지 않았던 무풍의 집안이었으니. 허나 아들들과의 생이별은 날벼락이었으리.

 그의 가슴을 친 가장 큰 충격은 그 어머니의 슬픈 사연을 50년 세월이 흐른 뒤 들었을 때다. 캐나다에 이민을 간 조카에게 북의 누이동생이 쓴 편지. "어머니가 93세에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1980년 무렵에 한국전쟁 속에서 두 형님의 생사는 어디가고, 막내딸 손에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는 70이 되었을 그 누이를 위해 그때부터 원고료 인세 등 따로 통장을 모았다. "이 '통일자금'을 이산가족 상봉하는 날 누이한테 전하고 싶었지요." 2005년 대한적십자사가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제작할 때, 20분 분량으로 편지 쓸 기회가 왔었다. "'어머니와 너는 나를 인도해준 내 구원의 여성'이라고 불렀어요. 실로 남한 땅에서의 온갖 고생마저 살아가게한 힘이었으니까요." 허나 이 또한 꿈. 지난 2006년, 캐나다의 조카로부터 이북의 그 누이동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 원초적인 풍경 매료…1955년 제주대 교수

 귀양가는 심정이 이랬을까. "그때 제주도는 부산이나 목포로 하룻밤 기다리면서 배를 타고 가곤했지요. 그땐 독신이었고, 헤세의 방랑기질이 몸에 밴 게 있어서 단신 이부자리, 책 뭉쳐가지고 부산으로 해서 15시간 넘는 뱃길로. 제주도 민속에도 뜻이 있었죠." 제주대학이 2년제에서 4년제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던 1955년이었다.

 "칠성통에 여관이 하나, 다방이 세 개였죠. 보리밭이 출렁이는데 한라산엔 구름이 끼고 말이죠." 원초적인 풍경, 감동이었다.

 "그땐 전부 돌길이었어요. 한림쯤에 가서 당 사진을 찍다보면 날이 저물어 거의 노숙하다시피했죠. 오후엔 버스편이 끊겨요." 그렇게, 중산간을 다니면서 밭 노인들과 얘기할 때면 제주말이 어려웠다. 허나 일본말이 튀어나오면 그것으로 통하기도 했다. 방언연구를 하던 현평효 선생(전 제주대총장)과 함께 나가기도 했다.

 "1956년에 고봉선 송당 메인심방이 있었는데, 이분 칠성여관에 모셔서 제주방송국에 부탁해서 녹음을 했어요." 제주무속에 대한 책이 전연 없었고, 해석의 이론체계가 서 있지 못한 때였다. 당굿한다는 말을 듣고 송당 마을을 처음 찾았다. 200여호 중 4·3으로 피난갔다가 50호 정도만 발붙일 형편에서 당굿하는 걸 처음 봤다.

 제주대시절 가장 큰 의의는 당시 그의 국문과 제자 1호가 된 제1세대 민속학자 현용준과의 만남이었다는 장주근. "앞으로도 그만한 업적 남기실 분 나오기 어려울거예요."

 # 오디세이는 서사시, 본풀이는 이중의 가치

 "참 놀라운 겁니다. 서사시가 살아서 사제자에 의해서 가창된다는게. 신화를 21세기에도 그대로 살아있는 종교로 부른다는게. 문명이 덜 된 원초상태에 있다는 부끄러운 면일 수도 있죠. 이것이 어떻게 신화로서 지금까지 전승됐는지를 보면 기막힌 현상, 기적이예요. 일리아드, 오디세이는 서사시에 그치는 거지만. 이것은 이중의 가치가 있다는 거죠." 가령 세경본풀이는 종교제의에서 사제자가 부르는 서사시인 동시에 신화라는 것. "신화라는건 신의 얘기 아녜요? 종교 사제자가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 본풀인데, 이게 살아있는 신화고, 한국 신화의 원모습입니다."

 1957년 서울로 갔으나, 계속 제주를 드나들었다. 1962년, 엿새동안 본풀이를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채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심방들은 그 긴 본풀이를 다 욀수 있을까? 그비밀에 대한 깨달음이 온 것은 세경본풀이를 한 여심방에게서였다. "긴 400∼500페이지 되는 분량을 어떻게 외웠느냐?" 그 심방 왈. "4·3사건 나던 해에 입학하고 난리통에 학력은 거기서 끝, 초등학교 문턱 밟아 본게 전부요."라며 말한다. "선생님! 텔레비전 드라마보고 다음날 남에게 얘기해 달라고 하면 말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했더니 그거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유고슬라비아 서사시도 그렇게 댓구 반복입니다. 그 여심방 설명 한마디에 됐다 이겁니다. 제주도는 정말 보물 창고예요."

 # 일본서 「한국의 민간신앙」 37년만에 복간

 이즈미세이치. 1966년 3부작으로 낸 「제주도」의 저자이며 동경대 문화인류학과 당시 주임교수였던 그와의 인연? 1969년에 동경대학 객원교수로 갔을 때다. "고대중 심방 일반신본풀이를 갖고 동경학회에 갔더니 이즈미 교수가 엉뚱하게 '제주도무가연구회'모임을 자꾸 갖자고 해서 6개월간 했어요."

 그 결과, 1973년에 「한국의 민간신앙」이란 이름으로 일본 출판사에서 나왔다. 제주도 당신 본풀이 일반신 본풀이 논고편, 자료편 두권. "손톱의 때니 눈곱이니 다 일본말로 가능하니까 썼죠. 어려운 것이 제주도 무가니까 생선이름들이 많이 나와요. 사투리를 표준어로 하는 게 어려워요. 방언사전하고 일본 표준말 사전 대조하며 고된 작업을 마쳤죠. 일년 정도 걸렸죠. 이즈미씨가 없었으면 이 책이 나오진 않았죠. 제주도에 대한 집착이 나보다 더한 사람이었죠. 둘이서 공저로 제주도 관계 책을 일본에서 내자고 했지요."

 허나 이즈미는 이 책을 보지 못했다. 1970년 귀국, 제주도 무속을 재조사하고 마무리 원고를 쓰던중 날아온 이즈미의 별세 비보. "금년 12월에 일본 출판사에서 37년만에 이 책이 복간 출판이 돼요. 그 출판사 사장이 얼마전 제주에서 열린 이즈미세이치 세미나때 저를 만나려고 왔었어요. 참 우연의 합치지요."

 # 인적드문 제주도에 원조 신혼여행

 1957년 1월 하순. 천지연, 정방폭포에도 인적없던 제주도. 그들은 제주의 원조 신혼여행자가 아니었을까. 남국에서 미래를 설계했다. 서울미대 회화과 출신 아내는 산수 수려한 평북 영변 출신. 열 여섯살 때 최연소로 1949년 1회 국전에서 서양화 입선한 화가. 지금은 채색수묵화를 그린다. 제주 바다도 많이 그렸다.

 그는 나이를 초월한 듯 청정한 모습이다. 수영, 물구나무서기, 걷기 덕일까. 소년때부터 즐기던 담배와도 이별, 그는 만보계를 찬다. 7000~8000보 이상돼야 200m 이상의 수영효과와 맞먹는단다. "내가 팔십 넘어서 책과 자료를 전부 민속박물관에 기증하고 학문세계는 손들고, 수필을 쓰기 시작했어요. 3∼4년 동안에 수필집 하나 냈는데, 자서전이죠." 이젠 무장해제. 1남2녀 건강하니 다행이다.

 "신앙쪽은 마음속에 있고 방언도 어려우니까 그 지방 사람 아니면 사실 어려운 태생학이죠. 제주출신 학자들이 더 나와주고 무속의 비교연구가 있어야 합니다." 헤세의 스케치를 보며 초심을 생각한다는 경운(耕雲) 장주근. 그 휴머니즘은 민속학의 근원을 이루는 인도주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눈빛이 깊어진다. 슬픈 실향의 길, 그 길 위에 선 민속학자 위로 은행잎이 툭 떨어졌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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