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 추가답사 3

추자초등학교로부터 섬 작업 권리 사고 섬 쓰레기 수거 등 충실한 관리역 여전
상군도 버거운 섬 속 섬 작업…다음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 안타까움만 더해


‘섬에서 살기 위해서’라고는 했지만 ‘빈손’을 허락하지 않는 섬은 계속해서 잠녀들의 발을 붙잡았다.

“이번만”을 외치다가도 다시 사수도로 간다. 섬 구석구석 모르는 것이 없다.

가끔은 섬이 아니어도 새벽 아기 울음 소리 같은 괭이갈매기의 외침에 눈을 뜬다.

가면 편할 일 하나 없고 포기해야할 게 더 많은 섬 생활이지만 그녀들의 존재감만으로도 사수도는 생명의 숨을 이어간다.

#언제 데리러 오겠다 약속에서 휴대전화로

   
 
   
 
“20~30년 전만 해도 언제 데리러 오겠다는 날짜만 약속하는 게 전부였다” 원용순 선장(78)은 사수도와의 인연만 반세기를 채운다.

풍선에 노를 저어 가던 것이 발동선으로 바뀌고 지금은 날씨만 맞으면 그때그때 이동할 수 있는 최신 사양 낚시배로 바뀌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은 사수도에서 물질을 하는 잠녀들을 실어 나르는 일이다.

원 선장은 “쉽게 가기 힘들던 때는 한 번 들어가서 한달 정도 작업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며 “때를 보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곤 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흔한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무전기를 사용한 것도 채 10여 년이 안됐다. 결국은 감이었다.

원 선장은 “먼 섬이 아니기는 했지만 먹을 것이 떨어지면 구할 방법이 없는 곳”이라며 “지금은 생수며 얼음까지 가지고 들어간다”고 귀띔했다.

일제 시대며 해방직후까지 사수도에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작업을 하는 일도 많았다.

그때면 밥을 해주고 아기를 봐주는 사람이 동행했다. 큰 뽕나무 아래 집터에는 ‘온돌’비슷한 것도 있어서 생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스티로폴 쓰레기를 모르고 태우다 섬에 타르가 잔뜩 달라붙었던 일이며, 사수등대를 별로 본 안강만어선이 섬에 부딪혀 좌초했을 때 선원을 구하러 달려갔던 일들이 다 어제만 같다.

원 선장은 “아직도 현장에 가면 그 흔적이 남아있다”며 “힘들게 사람을 구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박금실 잠녀(56)도 말을 거든다. “섬 한쪽에서는 아직도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다”는 박 잠녀의 말에 원 선장은 “통신사 직원을 불러야겠다”고 한다. 세월이 정말 많이 변했다.

박 잠녀는 “비·바람을 피할 곳이 있고 발전기에 냉장고까지 있다고 섬 작업이 쉽다면 다 거짓말”이라며 “섬 작업 때문에 가까운 조카 결혼식에도 한 번 못 가봤다”고 말했다.

#잠녀들과 함께 하는 섬

   
 
   
 
박 잠녀가 눈을 지긋이 감는다. 사수도 바다가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눈치다. 웃샛개, 작은샛개, 큰동개, 아랫동개 하며 술술 바다 이름을 읊는다. ‘똥구녕 받친 듸’라는 뜻밖의 이름도 나온다. 박 잠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불렀던 이름”이라고 말했다.

물건이나 톳·우뭇가사리 등 해초 작업을 하려 들어갔다가 올라올 때는 누군가 뒤를 받쳐주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는 지점을 부르는 명칭이란다.

헛무레 작업을 할 때도 절대 혼자는 바다에 나서지 않는 잠녀들이고 보니 그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같은 물 속이어도 사수도 작업은 더 힘들다. 섬을 한바퀴 도는 것이 힘이 부쳐 바람을 따라 작업을 한다. 그래도 반나절 넘게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까지 힘든 작업이 벌써 몇 십년 째다.

이제는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섬 사정이며 슴새의 습격(?)에 한없이 약해져버린 지반이며 덫도 통하지 않는 섬쥐들까지 모른 것이 없다.

사수도는 추자도 영흥어촌계 몫이다. 대서리와 영흥리 잠녀만 작업을 할 수 있다. 대서리 잠녀들은 사수도 작업을 포기하고 지금은 박 잠녀 등 영흥리 잠녀 4명이 섬을 지키고 있다.

사수도는 추자도 교육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추자초등학교의 전신인 최성학교 때부터 학부모들이 섬을 사서 관리했다. 지금도 ‘육성회’ 이름으로 등기가 돼 있다.

   
 
  ▲ 1990년대 사수도 잠녀들의 연락수단이었던 무전기  
 
대서리와 영흥리 잠녀만 작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곧 이들 지역에서 돈을 모아 섬에서 작업할 수 있는 권리를 샀다는 말이다. 그 전통은 여전하다. 2년에 1번씩 입찰을 한다.

섬을 샀기 때문에 관리 역시 잠녀들의 몫이다. 자치단체에서 매년 50만원 정도 청소비가 나온다.

제주‘표류사’의 한가운데 있는 추자도, 그 옆 사수도다. 예전에는 난파한 배의 선원들이 떠내려왔다면 지금은 온갖 국적의 쓰레기가 섬으로 밀려온다.

한번 작업에 40~50포대를 수거한다. 많을 때는 100포대 가까이 쌓일 때도 있다.

   
 
   
 
# 기약없는 내일에도 물질 계속

박 잠녀는 추자도에서 제일 처음 고무옷을 입었다. 여수에 바깥물질을 나갔던 길에 고무옷을 챙겨 섬에 들어왔다. 바다 의존도가 높은 섬이지만 고무옷을 입은 지 34년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제주와 비교해도 5~6년은 늦었다.

박 잠녀는 “처음에는 동네에서 입지 못하게 했다”며 “소중기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작업을 많이 하니 좋게 보지 않아 몰래 입고 작업하곤 했다”고 털어놨다.

이제는 그것도 다 옛날 일이다. “더 사정이 나아질 리도 없고, 장비가 좋아진다고 해서 물질을 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 있겠냐”는 박 잠녀의 물음에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박 잠녀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작업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옛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동네 어귀에서 “아야 전복 따러 가야겄다”고 부르던 그 목소리다.

망사리 가득 물건을 하고도 “아이고 이놈 따야겄다, 저놈도 따야겄다” 억척을 떨던 모습은 어느새 자신이 됐다.

“우리가 물질을 그만두면 사수도는 아마 외지 사람들로 망가질지 모른다”며 끝내 경계를 풀지 않는 모습이 고마우면서도 안타깝다. 10년이 지나지 않아 제주 섬 바다 역시 같은 수순을 밟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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