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11)제주 유배문화의 산물 추사체

   
 
  ▲ 추사 김정희는 55세 나이로 제주에 유배와 자기완성의 길을 택해 그만의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를 제주에서 완성한다. 김정희는 제주향교에서 교학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정향교는 단산과 산방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추사 김정희는 귤을 제주에서만 나는 특산물이라고 하여 자신이 유배지를 귤중옥이라 했다. 세한도를 모티브로 추사관이 올해 개관됐다.  
 
   
 
  ▲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된다. 조선시대 예술가의 자취를 품은 대정 추사유배지.  
 
   
 
  ▲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된다. 유배지의 가시울타리가 당시의 처절함을 전하고 있다.  
 
   
 
  ▲ 추사 김정희는 헌종 6년(1840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된다. 조선시대 예술가의 자취를 품은 대정 추사유배지.  
 
   
 
  ▲ 조선시대 예술가의 자취를 품은 대정 추사유배지.헌종은 제주에서의 김정희의 귀양살이를 묻는다. 제주를 3번 찾았던 소치는 김정희는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안에 벽에는 도배도 하지 않은 방에서 북창을 향해 끓어 앉아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좌정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하며 날을 보내는가라고 묻자, 동네 아이들 서넛이 와서 배우므로 글씨를 가르치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했다.(소치실록)  
 
   
 
  ▲ 대정향교 옆에 위치한 샘이물.  
 
   
 
  ▲ 추사유배지 가까이에 있는 수월이못.  
 
   
 
  ▲ 추사 김정희가 제자 우선 이상적에서 고마움의 의미를 담아 선물한 세한도.  
 
헌종 14년(1849년) 추사 김정희의 제자 소치 허련이 헌종을 알현한다. 헌종은 제주에서의 김정희의 귀양살이를 묻는다. 제주를 3번 찾았던 허련은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전한다.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안의 벽에는 도배도 하지 않은 방에서 북창을 향해 끓어 앉아 고무래 정(丁)자 모양으로 좌정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임금이 무엇을 하며 날을 보내는가라고 묻자, 동네 아이들 서넛이 와서 배우므로 글씨를 가르치며 외로움을 달랜다고 한다.(소치실록) 추사 김정희는 '귤의 재배지' 제주에서 자기완성을 이뤄냈고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 추사 김정희

추사 김정희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실학자로 1786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주김씨 집안의 김노경이다.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가 되는 김한신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에 책봉된다. 김한신은 아들을 낳지 못하고 39세에 요절한다. 이에 화순옹주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다 생을 마감하고 만다. 김정희는 4살 때 김한신의 제사를 하던 김이주의 큰 아들 김노영(김노경의 큰형)에 입양돼 조선왕실의 일원이 된다

12세때 양부 김노영이 죽는다. 1800년 15세의 나이로 한산이씨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이 무렵 북학파의 석학 박제가에게 글을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해(1800년) 정조가 승하한다.

20세에 한산이씨와 사별하고 23세 나이에 예안이씨와 재혼한다.

김정희는 이후 중국 연경(북경의 옛 이름)에서 평생의 스승인 금석학자 옹방강과 학자 완원을 만나 중국 청나라의 실학, 금석학, 고증학을  배운다. 이를 통해 순조 16년(1816년) 북한산에서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해 냈다.

하지만 순조-헌종 때 세도정치를 폈던 안동김씨 세력에 김정희 집안은 위기를 맞는다. 윤상도 옥사와 연루돼 생부인 김노경이 순조 30년(1830년) 고금도에 유배됐다가 풀려난다. 김정희는 헌종 6년(1840년) 다시 일어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6차례의 고문과 곤장 36대를 맞고 목숨만을 부지한 채 제주 대정에 위리안치 하라는 임금의 명령을 받는다.

#유배 예술의 백미 '세한도'

김정희가 제주 유배길에 오른 것은 나이 55세 때인 헌종 6년(1840년 9월)이었다. 김정희는 해남 이진에서 출발해 하루 만에 화북포구에 도착한다.

첫 유배지는 대정 성안 포교 송계순의 집이었다. 몇 년 뒤 강도순의 집으로 옮긴다.
김정희는 제주에서의 유배기간 자기완성을 위한 길을 걸었다. 또 신분을 뛰어넘는 교학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서체인 추사체를 완성한다.

특히 제주에 있는 자신에게 연경(베이징)의 최신 서적을 보내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겨울에 되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세한도를 그려 고마움의 의미로 선물한다. 제주유배 5년째(1844년) 되던 해에 소나무와 잣나무, 초라한 집과 글을 통해 유배지에서의 처절한 고독과 자신의 그동안 쌓아왔던 자기완성의 성과를 형상화한다.
세한도는 고졸미(古拙美)를 전하며 국보 제180호로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김정희는 벗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마천십연)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은 각고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김정희는 제주 유배기간 다섯차례나 바다를 건너온 초의에게 차를 얻어 마신다. 김정희는 제주의 차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우암 송시열에 대한 존경심으로 제주목의 귤림서원을 찾아 오현으로 배향된 송시열에게 잔을 올렸으며 산지천, 안덕계곡, 한라산에 들리는 등 가시울타리에 갇힌 위리안치라고는 했지만 비교적 거동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의 제주 유배 생활

김정희는 자신이 머물던 집을 '귤중옥'이라 했다. 매화, 대나무, 연꽃, 국화는 어디에나 있지만 귤만은 오직 이 고을의 전유물이라며 자신의 집을 귤중옥이라 이름 지었다. 귤중옥에서 동네 아이들 서넛에게 글을 가르치며 외로움을 달랬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정희는 '돌에게 경전을 강의하자 그 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중국 양나라 고승의 설화와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 않고는 어떤 교육도 가능치 않다는 것'을 지론으로 스승의 길을 걸었다.

대정향교에 들려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제주 곳곳에서 김정희를 찾아 왔다. 대표적인 제주 제자로는 강도순, 이시영, 박혜백 등이 있다.
60대 나이에 많은 제자를 길러낼 수 있었던 근간에는 인삼장복, 차, 단전호흡이라는 비법이 있었다.

김정희는 인삼을 장복했다. 인삼을 배추나 무 씹듯이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단전에 대한 해박해 단전호흡을 했으며 차를 즐겨 건강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추사도 사람인지라  '홍진에 시달린 이 몸 육십년이 되었구나/나는 세상일 잊으려 자꾸 술만 마시는데'라는 시를 남기는 것으로 봐 나이 60세에 유배지에서의 처량함을 술로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는 아내 사랑이 지극했다. 아내 사랑은 예안이씨에게 보낸 한글 편지로 나타난다. 필요 물품 요구 등의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가정생활이 한글로 전해지고 있다. 편지를 보면 당시 제주에는 김치가 없었으며 부인이 보내준 소금 많이 친 김치를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정희는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를 보면 한문에도 능했지만 부인을 위해 한글도 썼다.

유배 8년 3개월만인 헌종 14년(1848년) 12월 유배에서 풀린다는 소식을 듣고 화북포구에 있는 해신사에서 해상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1849년 1월 제주를 떠난다.

대정읍 안성리 추사유배지는 1984년 터만 남아 있던 강도순의 집터가 복원된 후 2007년 10월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58호이던 추사적거지의 명칭을 추사유배지로 변경하고 사적 제487호로 승격됐다. 2010년 추사관(사업비 총 75억원)이 개관돼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를 전하고 있다.

 

====================================
"추사의 길은 인생 반추하는 중년의 길'
인터뷰=양진건 제주대 스토리텔링학과 교수

   
 
  ▲ 양진건 제주대 스토리텔링학과 교수  
 
"추사의 길은 잘 나가던 권력자가 제주에 와서 권력도 잃고 부인도 잃고 막장까지 와서 새로운 완성을 보여주는 것을 음미할 수 있는 길 즉 중년들의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중년의 길'로 만들고 싶다"

추사 김정희의 제주유배를 활용해 '추사의 길'을 개발하고 있는 양진건 제주대 교수(스토리텔링학과·제주대 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장)는 이같이 말했다.

양진건 교수는 "18세기 이후의 두드러진 특징은 양반의 몰락과 중인계급의 부상"이라며 "이런 현상을 실천적으로 잘 옮긴 사람이 추사로 새로운 중인계급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이는 제주의 위항문화운동을 촉발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제주에 오면서 추사가 기대고 있던 것들이 다 허물어 져 오만함(사대주의)이 유배를 통해 기가 꺾였다"며 "제주의 거친 환경 속에서의 인생역정은 한편으로 비참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더욱 성숙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추사체가 완성됐다"고 덧붙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