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소셜디자이너 박원순
"직업을 드릴까요?" 만나자마자 그가 그런다. 직업이라니? 지난 9월, 경희대에선 대학생들의 가슴을 뛰게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가 1000개의 직업을 제안한 것. 반응은 폭풍이었다. 이른바 상상력과 새로운 발상의 직업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름은 시대의 아이콘이다. 검사,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 소셜디자이너.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기부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고, 희망제작소를 만들어 사회를 디자인하는 사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위한 행보, 과감한 도전. 때만 되면 범야권의 잠재적 대권주자로 오르락 내리락. 우리시대 나눔과 희망의 전도사, 원순씨를 만났다.(원순씨가 좋다고 했다.) 거침없는 발상, 자유로운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제주도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들, 막힘 없다. 일몰이 오기 전이었고, 서귀포 중문 바다에 해가 지기 시작할 때까지였다.

"트위터에선 오늘 지금 원순씨 논쟁이 붙었어요. 저는 원순씨라고 부르라고 하잖아요." 얼마전 낸 그의 책 「원순씨를 빌려드립니다」가 생각났다. 그렇다면 그의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상상력? 그게 제 직업이잖아요. 옹달샘에 물을 계속 퍼 보세요. 맑은 물이 깨끗이 계속 더 나오잖아요." 원순씨. 제주도의 디자인에도 한말씀이다.
"제주도? 모양과 색깔과 분위기와. 맘대로 하는게 자유민주주의 아니예요. 다 규정이 있어요. 곡선의 미학이 있잖아요. 자연과 주변경관과 색채를 조절해서 지어야지 이렇게 턱 허가해 놓으면. 제주도가 제주도만의 것입니까? 온 국민의 것이고. 심지어는 미래세대의 것이잖아요. 미국은 이런 경우 소송까지 걸게 합니다." 중문관광단지의 짓다만 건물을 두고하는 쓴소리다. 강도가 셌다. 분위기 생각 않고 무턱대고 건물을 허가해 놓는게 제주도를 망치는 거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위촉한 디자인 홍보대사이기도 한 그의 눈에 비친 제주도. 제주다운 디자인은 어디에 있는가.
# "공무원, 후손에 물려줄 심미안 키워야"
"제주도는 관광지인데 건물의 높이 하나 색깔 창 하나 놓고 노심초사해야한다고 봅니다. 바르셀로나 같은덴 가로등 하나가 예술품이예요. 제주자연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행복하게 살고, 좋은 자연경관 잘 가꾸면 사람이 저절로 오게 돼 있죠. 우선 공무원들이 공부해야죠. 다음 후손들한테 물려줄 심미안을 키워야 해요. 잘못하면 죄를 짓는 거잖아요. 이 땅과 역사와 시대와 사람들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다 지는 건데." 작년 희망제작소에서 공무원 5000명을 교육했다.
그는 문화적 감수성이나 생태적 감수성, 창의적 힘, 이런 것 없이는 맨날 뒷북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강 파헤치는데 몇 십조를 다 쓰는 거예요. 우리 후손들이 이러다가 강의 시멘트를 다 걷어내야 하잖아요. 죄 짓는 거죠. 몇십년 안가서. 우리가 좀 더 한 단계 비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부다. 현장을 철저하게 보고,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뛰어넘어야 된다는 것. 허나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들의 마음과 인식이 아닐까. "제가 아이디어 이런것 얘기하면 많은 공무원과 지식인들이 그런 것 다 알어. 그러거든요. 예컨대 그 사람이 가진 90%가 나빠도 10%로 배우면 되잖아요. 근데 더 나은 게 없다고 생각하면 다 버려버려요. 발전할 수 있는 사람과 발전하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남의 잘못된 것으로부터도 배우는데 많은 경우엔 안 배우는거죠."
# 제주4·3은 어마어마한 자산이죠
"4·3사건의 역사같은 건 어마어마한 자산이거든요. 유족들의 슬픔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런 비극이 오히려 자산이기도 해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사가 없는 거죠. 시간을 갖고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된다고 보거든요."
2002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장으로 큰 역할을 할때였다. 거기서 봤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현존하고 있더라구요. 그 두 살짜리 아이들이, 저항할 힘도 없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죽었는데 군인이 자기도 빌어야되는데 되레 큰 소리 탕탕 치잖아요. 이 희생을 딛고 미래의 한국사회나 전 세계 미래의 역사 속에서 다시 되풀이되지 않고 평화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제주도가 평화를 발신하는 섬이 됐으면 한다. 평화학교, 평화의 대학, 평화의 도서관이라든지 생겼으면 한다. 평화학에 관한, 전 세계 모든 자료를 갖추는 거다. 그러면 사람들이 연구하러 올게다. 자료를 제대로 모으면 학문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을 게다.
"후버연구소도 후버대통령을 연구하는 도서관인데 저절로 대학 비슷하게 됐거든요. 사실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보세요. 유태인들이 많이 죽었지만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많은 일들을 했죠. 제주가 4·3기념관 하나 세웠다고 끝나는 거 아니잖아요. 오히려 그것은 외형이잖아요, 껍데기를 만든 거잖아요. 그 안에 어떻게 속살을 채워서 평화라고 하는 정신이, 희생의 값어치가 새로운 형태로 드러날 수 있는 건지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어야 합니다."
# 앞으로 올 미래는 핸드메이드 시대
부자의 큰 돈이 아니다. 평범한 시민들로부터의 모금이다. 그것을 시민들과 지역사회,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려는 단체와 사람들에게 배분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재단이 필요했다. 꿈일까? 1% 나눔의 문화, 이 나라의 아름다운재단은 그렇게 탄생했다. 개미군단이 모여들었다. 세상이 놀랐다. 올해 10년. '헌물건의 복덕방' 아름다운가게는 올해 8년째. 작년엔 200억 매출을 달성했다. 이 가게, 2005년 남아시아에 불어닥친 쓰나미로 고통받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2000만원을 전달했다.
그의 창의적인 도전은 계속된다. 이만하면 사업가 이상이다. 제3세계 농부들이 만든 아름다운 커피 같은 것을 제대로 팔아주는 가겔 내는 게 중요하단다. "미래는 거대한 공장 것이 아닌 핸드메이드 시대가 온다고 생각하거든요. 얼굴이 있는 생산자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신뢰도가 높아지잖아요. 내가 만들지만 어떻게 팔아야하는 건지 힘들잖아요. 우리가 그것을 가져와서 온라인, 오프라인 팔아주는 거죠."
자생력이 있을때까지 관여하지만 자신이 빠져도 될 땐 다시 다음 일을 도모한다는 이 소셜디자이너. 아직도 아름다운재단에선 자유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을 귀하게 생각해주는 것이 좋다. 가슴과 머리는 늘 상상이 날아다닌다. 그는 그러면서 수많은 책을 냈다. 다산처럼 유배의 생도 아닌데. 빽빽한 일정, 평균 한달에 한두번 외국의 초청 강연 등 나간다. 인터뷰 중에도 그런 제의들이 쉴 새 없다. "낼 모레 핀란드, 영국 가고 열흘 있다 오죠."
# 시골이 상상력과 감수성의 모태
그의 상상력과 감수성의 모태, 그것은 시골이었다. 왕복 30리 학교길. 오며가며 위대한 스승 자연을 만났다. "시골은 반복되지만 그 자체가 온 만물이 계속 사라졌다 태어나잖아요. 잠자리가 나타나고, 버들강아지를 꺾고. 이런 것들이 좋은 창의성 훈련, 학습에 도움이 된다고 봐요. 우리 아이디어 같은 건 비할 게 아니죠."
그는 앞으로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블루오션이 농촌이다. 앞으로 산촌 유학이 뜰 거라고. "올렛길이 단순히 걷는다는 것을 넘어서서 긴 길을 다니면서 계속 뭔가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자기가 살아온 날과 살아갈 길과. 자기 잘못했던 것과 이런 것들을 늘 성찰하고 늘 미래를 전망하고, 이런 길이잖아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성실과 근면, 그 자체였던 부모는 농사를 지었으나 어려운 이웃을 지나치지 않던 분들이었다. 부모의 유산은 그러했다.
거기에 인권변호사로서의 그의 삶을 결정지은 것은 1975년. 시골출신 소년이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한지 수 개월. 우연히 잠깐 시위에 참여한 것이 문제였다. 4개월 회색담장에 갇혔다. 대학 제적. 감옥은 완벽하게 면학분위기가 조성된 곳이었다. 대학 4년 읽을 책을 그때 다 읽었단다. 정의감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이 젊은 가슴을 데운 것은 그때였다. "늘 인생에서 약자의 편이 되고자 하였고, 역사의 중심에서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실천하게 되었다." 변호사를 걷어 치운 건 한참 돈 벌 때였다. 좀 더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소망과 관심으로 외국 유학길 2년. 선진국의 법조인 역할을 목도하고 시민운동가의 길로 나선다.
이쯤에서 물었다. 대중적 인지도와 참신성으로 매번 정치권의 러브콜 받는 사람. 실제로 현실정치에 관심이 없는가? "저는 영구집권하고 싶어가지고 안 하잖아요."
# 원시적인 모습이 아름다운 것
그는 열정 그 자체다. 방대한 「야만시대의 기록」도 2005년 미국 스탠포드에 가서 강의하면서 3개월 만에 쓴거다. "저는 어차피 일이 즐거워요. 취미예요."
원시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 놓는 것 만큼 아름다운 게 있겠는가는 박원순. 내년 일감도 이미 기다리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소셜디자인 비엔날레 참가, 전국을 다 돌면서 직업을 주문 받는 일. "3월 첫 주는 제주도서 시작해서 술을 먹자하든 토크쇼하자든. 좌악 신청하면 전국을 돌려고 해요. 강연료 모아서 소기업 발전기금할 거예요."
따뜻한 노을 앞에선 그의 미소가 깨끗하다.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인 것 같아요. 꿈!" 그의 꿈, 미래의 희망이 출렁이는 날을 꿈꾸는 원순씨가 그의 책에 사인해줬다.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들꽃처럼."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