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65. 재일제주인 화가 김영일
탈 그림 그리는 경계인 예술가의 염원, 통일 위한 민족 보편적 미학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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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일 화백 2005. 제주도 | ||
한 화가를 올바로 조명하는 것은 미술사가의 몫이다. 예술가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신중한 분석과 비평적 접근이 따라야함에도 불구하고, 늘 부족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로지 예술정신만으로 경계인(境界人)의 일생을 살아 온 노화가(老畵家)의 미학이, 세대를 넘어 제대로 이 땅에 뿌리내리기를 고대해본다.
제주인의 일본 왕래는 100년이 넘는다. 일본 어업 잠수기선이 제주도에 첫 진출한 것은 1879년경이다. 이는 1876년 일본인들의 한반도 진출 기회를 열어준 병자수호조약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제주도가 잠수기어업(潛水器漁業)의 최적지라는 점 때문에 일본어민과 제주도 어민 사이의 통어(通漁)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반대로 제주 잠녀(潛女)들이 일본으로 첫 출가(出稼)한 해는 1903년이다. 당시 김녕의 사공(沙工) 김병선 씨가 해녀 수명을 거느리고 도쿄의 미야케지마(三宅島)로 진출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일본에는 제주인이 얼마나 살고 있을까. 1988년 12월 말 《재류외국인통계(在留外國人統計)》에 의하면 재일한인은 67만7140명, 그 중 제주인은 11만7687명으로 전체의 17.3%를 차지하고 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를 생각하면 약 5명 중 1명이 일본에 거주하는 셈이 된다.
역사학자 강재언(姜在彦)은 "일본에서는 한국적자(韓國籍者), 조선적자(朝鮮籍者)를 총칭하여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우리가 부르는 재일교포나 재일동포라는 말이 있으나, 일본인들이 부르는 '재일조선인' 이라는 용어에는 자기 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두 개로 분단된 조국은 재일조선인들의 정신적 공황(恐慌)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동족 간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재일조선인의 삶이란 남과 북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서거나, 선택보다는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며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경계인, 특히 경계인 예술가로 살아가는 김영일의 염원은 민족 보편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미학이야말로 인류의 근본적인 가치들인 평화, 자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개념을 담지(擔持)하는 것이다. 민족 보편적인 미학의 추구는 예술가로서 민족의 밝은 미래, 통일에 이르는 길을 미학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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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악, 유채, 200P. 개인소장. | ||
김영일(金鍈一, 1937~ )은 재일조선인 2세로 오사카(大阪)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고향인 제주시 한림에서 2년간 소학교를 다녔다.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김영일에게 제주 이야기를 마치 전설처럼 들려주곤 하였다. 김영일은 1961년 일본대학 예술학부 미술과를 졸업하였다. 1971년 제26회 행동미술전(行動美術展)에 처음 입선하였고, 1974년에는 관서행동신인선발전(關西行動新人選拔展)에 출품하였다. 1976년 제31회 행동미술전에 출품하여 오사카 시장상(市長賞)을 수상하였다. 이듬해 회원 추천으로 행동미술전 장려상을 수상하는 등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였다. 2005년 제주도 문예회관에서 열렸던 '기원(祈願)'이라는 개인전을 합쳐 모두 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일본미술가연맹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1년 김영일은 작고작가 송영옥(宋英玉, 1917~1999)과 오사카에서 2인전을 가져 주목을 받았다. 송영옥은 '미친개'를 통해 분단의 광기를 상징화한 제주 출신 화가로서,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 컬렉션에 다수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1993년 김영일은 <코리아통일미술전>에 재일조선인 대표 화가로 출품하였다. 이 전시는 남과 북, 재일조선인 화가들 가운데 대표적인 화가들이 참여한 전시로, 도쿄(東京)와 오사카 순회전시였다. 김영일은 이때 <제사>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이 전시에 제주출신 강요배가 <한라산>을, 고삼권이 <초가을>을 출품하였다.
2005년 김영일은 60년 만에 부인과 함께 제주를 찾았다. 가까운 일본에서 긴 시간을 돌아 찾아 온 고향이었다. 제민일보사에서 마련한 김영일 개인전 '소원(所願)'이 그를 제주도로 이끌었던 것이다. 2005년 3월 26일부터 31일까지 제주도문예회관 제2전시실에서 마련된 그의 개인전에는 총 38점의 그림이 선을 보였다. 그는 전시 개막식에서 "50년 넘게 고향 제주에 오지 못해 그림으로 그리움을 달래 왔다"고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는 3월 28일, 200호짜리 대작 <제사>와 <통일마당 96>을 민속자연사박물관과 교육박물관에 각각 기증하였다. 이튿 날, 서귀포시 기당미술관을 방문하여 변시지 화백을 만나 1점을 기증하였다. 특히 민속자연사박물관에는 1991년 7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렸던 한·일미술교류전 출품작이었던 <가면의 시(詩)>를 기증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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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면극, 유채, 100×72.7㎝. 도쿄 개인소장. | ||
1991년 7월 17일자 제민일보와의 인터뷰 기사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당시 김영일은 "스스로 추구하는 그림은 심상(心象)화법인데, 내면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표현 기법을 말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남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이 오랜 역사를 거쳐서 걸어온 넋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한데 있다"라고 하였다.
김영일은 김지하의 <오적(五賊)>사건을 계기로 그리게 된 탈 그림을 통해 "자유롭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표현하고 차별 없고 평화로운 세상, 민족의 통일을 꿈꿨다."고 술회하고 있다. 원래 탈은 사람이나 동물 얼굴을 분장(扮裝)하여 만든 것으로 얼굴에 쓰고 연희하는 도구이다. 한자어로는 면(面), 면구(面具), 가면(假面), 대면(代面), 가두(假頭), 사수(假首)라고 하며, 우리말로는 광대, 초라니, 탈, 탈박, 탈바가지 등으로 부른다.
탈춤에 쓰는 대표적인 탈은 양주별산대 놀이의 눈끔적이탈, 송파산대놀이 옴중탈, 봉산탈춤의 목중탈, 강령탈춤의 소무탈, 은율탈춤의 할미탈, 동래야류의 말뚝이탈, 수영야류의 영노탈, 통영오광대의 홍백탈, 고성오광대의 차양반탈, 가산오광대의 문둥이탈, 북청사자놀음의 사자탈,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양반탈 등이다.
전통시대의 탈춤이 지배계급을 향하여 풍자와 해학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은 통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모티브야말로 탈 그림으로 표현되는 김영일의 미학적 입장과 조응(照應)하는 것이다.
김영일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탈을 쓴 채 등장하는 것에 대해, 일본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하리우 이치로(針生一郞)는 "조국의 문화전통에 향수를 가미(加味)하거나 찬미하기 위해서 민중예술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예술을 통해서 민중 그 자체를 그리려는 것이다…가면에 표정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표정이 없는, 혹은 보이지 않는 얼굴과의 사이의 심연(深淵)이 드러난다. 권력과 대치되는 민중의 주체가 부재(不在)하면 놀이(祭)의 고양(高揚)도, 해방감도 한 순간의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심연을 투시하는 상상력을 관중에게 요구한다는 점에서, 김영일은 확실하게 민중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하고 있다.
이미 고정된 탈은 단순한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김영일 그림의 탈은 각 탈마다 그의 심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김영일의 화면에 일그러진 모습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억압과 고통으로 차게 된다. 그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되는 날, 김영일의 민중은 아름다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김영일의 탈 그림에는 중층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그의 탈춤은 조국통일을 꿈꾸다 이역에서 돌아간 1세대의 한을 풀기 위한 제사의 의미로 나타난다. 탈에 가려 민중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선대(先代)의 뜻을 좇아 차별 없는 세상, 통일을 꿈꾸는 민중의 염원으로서의 축제가 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의미는 민중의 본질적인 열망을 드러내는 얼굴로서의 탈의 역할이다. 이때 고정된 전통 탈의 개념을 뛰어넘어 살아있는 얼굴로서의 탈로 다시 반전(反轉)된다. 자유를 갈구하는 해방춤을 위한 탈이 되는 것이다. 숨죽여 응어리진 한을 삭이던 순간을 넘어, 닫힌 마음을 활짝 열어 개인과 공동체의 아름다운 해후(邂逅)로 승화되는 것이다.
국토는 두 동강 났지만 탈춤의 전통은 국경과 시간을 넘어 존재하듯,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탈춤 그림들은 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김영일 미학의 끈이 되고 있다.
그는 오늘도 육필(肉筆)로 "목숨이 살아 있는 한, 이국땅에서 민족 통일을 기원하다 세상을 떠난 재일동포 1세들의 한(恨)을 공양" 하기 위해 간절한 '소원'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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