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3부-‘잠녀를 만나다’
추자도 추가 답사(4)-추자면 대서리 최소녀 할머니 1

   
 
  ▲ 추자항 전경. 최소녀 할머니는 일제시대 이 일대에 일본인 이주어촌이 형성됐었다고 기억했다.  
 
섬 대물림 않으려 딸에 물질 가르치지 않아…사수도 미역 작업서 배운 물질로 한평생
'잠뱅이·적삼·족은눈·두리박' 섬 바다 눈 앞 선해, 세대 건너며 잊혀지는 것 안타까움


아직 세상을 모르던 열 일곱 섬 처녀는 미역을 조물러 사수도에 갔다가 물질을 배웠다. 동네에서 무레질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는 딸에게는 무레질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 일 배우지 말고 섬을 떠나 살라고 바다로 따라 나서는 딸의 등판을 몇 번이고 떠밀었다. 어머니 눈을 피해 재미 삼아 시작한 무레질은 그대로 굴레가 됐다. 어머니의 걱정처럼 섬을 떠나지 못한 딸은 섬 바다를 온몸에 안은 채 세월을 입고 그대로 역사가 됐다.


   
 
  ▲ 최소녀 할머니  
 
#자식들하고 무레질 하는 셈

지난 13일 이른 아침 대서리 잠녀들이 채비가 한창이다. 금채기가 끝나 모처럼 바다 밭을 헤집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 바다로 나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창인 조기잡이 배까지 떠나고 난 섬은 지루할 만큼 고요하다. 전날부터 몸이 좋지 않아 채비를 하지 않았던 최소녀 할머니(83·추자읍 대서리)가 힘들게 지난 기억을 끄집어낸다.

"하이고 나 고생 많이 했어. 시방…눈물이 나와"

"뭐 기억이나 할란가. 이 할매 신디 뭐 들을 거 있다고…"

할머니 입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제주도도 전라도도 아닌 추자도식 사투리다. 일제 식민지 시절 어업에 눈독을 들인 일본의 이주어촌까지 있

   
 
  ▲ 최소녀 할머니의 시어머니가 톳 작업을 하는 모습. 1960~70대 추정. 멀리 물질하는 잠녀의 모습도 보인다.  
 
던 섬인 까닭에 일본어까지 묘하게 섞여 있다.
눈만 뜨면 앞에 바다가 있는 섬에서 당연하게 무레질을 배웠으리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한 때 40여명이던 대서리 잠녀는 이제 16명 정도가 남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최 할머니다.

"이제사 할마니라고 부르지 얼마 전까지 아짐, 엄마하고 불렀제. 아그들하고 무레질을 하는데…"

할머니가 말하는 '아그'들은 이제 60살이 훨씬 넘은 잠녀들이다. 할머니는 "자식들하고 무레질하는 거나 마찬가지"란다. 한 때 함께 무레질을 하던 또래 중 대부분이 죽고 없다.

"저그들은 우리 무레할 때 없었어. 우리 뒤에 뒤에 무레를 했제. 전에는 불턱에서 옷 갈아입고 추우면 이내 나와 뱀알도 구워 먹고 소라도 구워먹고 재미었제. 지금은 옷만 갈아입으면 바로 배타고 나가서 그냥 바다로 들어갔다 나오면 씻고 돌아가면 그만이지. 옛날이랑은 틀버(틀려)"

잠뱅이에 적삼을 입고 작업을 할 때, 잘해야 5㎏도 못할 때는 몸은 힘들었지만 젊었고 사는 재미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을 알기나 하나"

   
 
  ▲ 대서리 잠녀들이 작업을 하는 섬 중 하나인 수덕도  
 

# 허기 채우던 '가사리'가 효자로

할머니의 기억은 슬쩍 1930년대로 간다. '일제 식민지'라는 말은 모를 어린 시절이지만 수수범벅에 삶아 넣어 버무려 먹던 (우뭇)가사리를 일본 사람들이 돈을 주고 사들이면서 열심히 조물러 다니던 기억만큼은 분명하다.

그나마 가격을 잘 줘서 우뭇가사리를 한 번 팔고 나면 집에 '쌀'이 생겼던 것도 어제일 같다.

대서리를 중심으로 이주어촌이 형성되면서 현대식 병원도 운영됐다고 했다. 할머니는 "지금 배가 들어오는 항, 추자수협 있는 데까지 다 일본인들이 살았었다"며 "그때는 의사도 여럿 있어서 좋았는데 지금은 조금 아프면 본섬에 있는 병원까지 나가라고 한다"고 툭하니 말을 던졌다.

한창 때와 비교해서 몸 여기 저기 성한 곳이 없는 탓이다. 할머니는 "무레 나가면 느그 나이만 먹었다면 느근쯤은 내가 이긴다고 말한다"고 했다. "지금은 눈도 어둡고, 잠뱅이만 입고 하도 추워 떨어서 이가 다 상했다"는 할머니는 당장에라도 두리박(똘박·두룽박.테왁)을 챙기고 바다에 나설 기세다.

이제는 위(제주시)에서 알아서 챙겨주는 형광색 테왁에 고무옷을 입고, 엔진 소리가 시원한 배에 몸을 싣지만 할머니의 바다는 아직도 20~30분이면 젖은 옷과 추위를 이기지 못해 몸을 말리고 '어거써나' 노를 저어 나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본섬과는 또 다른 가락이다.

"어거써나/어어가써나/어기어차/잘도 간다/어서가자/여그는 썰물이다/여그는 밀물난다"

할머니로부터 몇 번이고 세대를 건너 뛴 세대들에서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가락이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해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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