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12)유배인 술을 빚다

   
 
  ▲ 억압받던 불교 부흥을 이끌다 제주에 유배와 장살당한 보우대사의 석상. 평화통일불사리탑에 세워져 있다.  
 
나이 어린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된다. 임금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가 임금의 뒤에서 발을 치고 아들과 손자를 대신해 정치하게 되는 데 이를 수렴청정이라 한다.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수렴청정은 모두 8차례였다. 일부 수렴청정의 시기는 종교에 대한 부흥의 시기이기도 했고 수난의 시기이기도 했다. 허응당 보우와 정난주 마리아가 푸른 바다를 건너 제주에 유배와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불교 부흥 꾀한 허응당 보우

연산군의 폭정은 중종반정에 의해 막을 내린다. 중종의 아들 인종은 왕위에 오른 지 9개월만에 후사 없이 죽고 만다. 1545년, 인종의 이복동생 경원대군(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명종은 중종의 두번째 계비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8년 동안 받게 된다.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폈다. 고려 때 시행됐던 승과가 폐지되고 사찰의 토지가 몰수되는 등 불교를 억압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문정왕후는 1548년 스님 보우를 봉은사(서울 삼성동 소재) 주지로 발탁한다. 이후 보우는 문정왕후의 후광을 입고 불교 부흥에 나선다.

보우는 선종와 교종을 다시 세우고 도첩제도를 부활시켰으며 과거시험에 승과를 설치한다. 도첩은 국가가 주는 승려 면허증으로 승려는 이 제도에 의해 보호받았다.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배출됐다.

이에 유림은 빗발치는 상소로써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이에 아랑곳 않고 불교 부흥을 강하게 밀고 나갔다.

하지만 명종 20년(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유림의 탄핵 상소가 이어져 끝내 보우는 제주 유배형에 처해진다.

제주에서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장살(맞아 죽는 것) 당한다. 보우의 나이 56세 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확한 나이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듬해 선교양종, 승과, 도첩제도 등이 모두 폐지되고 만다.

보우는 15세 때 금강산 마하연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허응당집」, 「나암잡서」 등의 저술을 남기고 있다.

옛 제주의 관문이었던 조천포구가 내려다보이는 조천읍 조천리 소재 평화통일불사리탑에 허응당 보우대사 순교비가 세워져 비운의 삶은 전하고 있다.

불교계에서 제주에 유배 온 인물로는 보우스님, 행호스님, 지안스님 등이 있다.

   
 
  ▲ 신유박해의 참상을 알리는 글을 적은 황사영 백서가 들통나며 황사영의 처인 정난주가 제주 대정현에 유배된다. 천주교 대정성지 정난주 마리아의 묘.  
 
#'신앙의 증인' 정난주 마리아

조선조 제23대 임금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다. 첫째인 문효세자는 일찍 죽었다.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자 이해 7월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한다.

정순왕후는 천주교 탄압에 앞장선다. 순조 1년(1801년) 언문(한글) 교지를 내려 천주교 금지령(박해령)을 선포한다.

100여명의 천주교 교도가 처형되고 400여명이 유배된다. 이를 신유박해라 한다.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이 죽고 정약용과 정약전이 유배형에 처해진다. 황사영은 길이 62㎝, 너비 38㎝의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1행을 써 모두 1만3000여자로써 신해박해에서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천주교 부흥책을 논했다. 비단 천에 검은 먹으로 쓴 황사영 백서는 중국 베이징의 주교에게 전달하려 하지만 발각되고 만다. 이로써 황사영은 처형된다.

황사영의 처인 정난주 마리아가 제주 대정에 유배된다.

정난주는 정약현의 딸이다. 정약현의 형제를 보면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이다. 정난주의 고모부는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세례명 베드로)이다.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한 손암 정약전은 어류 백과사전인 「자산어보」를 남겼으며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한 다산 정약용은 다산초당에서 「목민심서」를 펴냈다.

정난주는 18세 되던 해인 1790년 16세의 황사영(알렉시오)과 결혼해 1800년 아들 황경한을 낳는다.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정난주는 제주로 유배된다. 제주로 향하던 중에 2살난 아들을 추자도에 내 버리고 간다. 황경한은 추자의 황씨 입도조가 된다.

제주인물사를 다룬 책자를 보면 황경한은 정난주가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험한 바다 물살을 우려해 아들을 살리려 위해 추자도에 남겨 뒀다는 이야기가 전하는가 하면 아들은 추자도에 유배됐다고 기술하기도 한다.

추자도에 전해지는 이야기 따르면 1801년 정난주는 제주로 향하다 추자도 예초리 앞을 지난다. 추자도의 바닷가 '물생이끝'의 물살은 아주 센 바다였다. 정난주는 아이(황경한)를 제주까지 데리고 갔다가는 생명을 부지하지 못할 것 같아 추자도 섬바위에 내려놓는다. 예초리 사람 오상선이 이 아이를 발견해 키웠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추자도 오씨 집안은 이후 황씨와 오씨 사이는 혈연으로 여겨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의 배내옷에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난주는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도착해 중산간 길을 거쳐 대정현의 유배지로 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정에서 관비 생활을 했던 정난주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서울 할머니'로 불리다 1838년 2월 6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제주 천주교사를 보면 정난주는 제주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2009년 발간된 「신성백년사」에는 '신앙의 증인' 정난주에 이어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제주에 표착해 한경면 용수 앞바다에서 미사를 봉헌했다라고 기술돼 있다.

대정에 있는 정난주의 무덤은 1970년대 초에 발견돼 1990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천주교 대정성지 성역화 사업을 펼쳐 지난 1994년 새 단장됐다.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부인

조선조 제15대 임금 광해군은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광해군이 서자였기 때문이다.  선조와 계비 인목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 영창대군은 '칠서의 옥'(1613년)에 연루돼 증살(아궁이에 쉴 새 없이 불을 지펴 갇힌 방의 열기로 죽게 하는 것)된다.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은 사사되고 어머니 노씨부인은 제주에 유배된다.

노씨부인이 제주바다를 건넌 때는 광해군 10년(1618년)이었다.

노씨부인은 제주 유배생활 동안 생계를 위해 술을 빚어 팔았다. 노씨부인이 빚었던 술을 '모주'(母酒)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외딴 섬 제주에서의 황량한 유배생활도 서러운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주목사 양호는 노씨부인을 괴롭혔다. 이에 유배인의 관리를 담당(보수주인)하던 전량이 자기 처로 하여금 노역을 대신 하도록 해 노씨부인을 보호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출되자 노씨부인은 유배에서 풀려난다. 노씨부인을 괴롭혔던 양호는 처형된다. 노씨부인을 도왔던 전량은 무관 벼슬의 하나인 첨사직을 받는다. 글·사진=장공남 기자 gongnam@jemin.com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습니다.#

<고침>
본보 6일자 5면의 유배문화 기획기사 '제주 유배문화의 산물 추사체'의 본문 가운데 '김한신은 정조의 딸 화순옹주와'에서 '정조'를 '영조'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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