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재일(在日) 실크로드 연구가 장윤식

열정이 넘쳤다. 굵은 목소리, 부모는 가고 없지만 오랜만에 찾은 고향의 바람,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왜그런지 안보고도 근현대사의 격랑에 데었던 그의 소년시대가 오버랩됐다. 낙엽 흐드러진 제주목관아 분위기 때문일까.
# 59세에 실크로드 처음 밟아
1995년 가을, 59세였다. 실크로드가 그에게 온 것은. 상공회 활동 등을 끝내고 돌아보니 어느덧 내년이 환갑. '인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 그때 연변에서 지인으로부터 실크로드 얘기를 들었다. 그의 가슴이 뛰었다. 대학시절 산악부 출신이니 체력하난 자신만만. "실크로드는 그런 사람들에게 흥미가 있는 것이지. 히말라야 가려고 하면 여길 통해야 해요. 중국의 누란 돌고 거기에 들어가기 직전 파키스탄 티베트로 다섯가지 길을 5년간에 걸쳐 마스터했어요. 얼굴이 절반돼서 돌아왔어."
고대 실크로드를 도파한 것은 재일 조선인으론 처음일거라고. 당시 팀의 총대장과 중국대 측에서 그랬단다. 로부로 탐사대에서 환상의 왕국, 누란을 만났다. 서역남도 4000㎞. 실크로드는 초로의 그를 매혹시켰다. 낙타 등에 앉아서 사막을 항해하며 사그라든 줄 알았던 시심이 타올랐다.
옥문관 출발점에서 낙타에 걸터앉아 누란지녀를 읊었다. 침묵의 사막에서 동행하는 중국탐사대와 술잔을 서로 나눴다. 미란유적에서 끝없는 사막을 유심히 담았다. 그의 솟구치는 대자연과 인류문명에 대한 통렬한 감정이 마구마구 쏟아져 내렸다. 흡사 사막의 별처럼. "사막에서 기특하게 살고 있는 생물들을 직접 보고 삶에 대한 의욕과 집념 같은 것이 전신에 넘쳐 흘렀다. 올해 사월 환갑을 맞아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어 다행스럽다." 환갑기념 생애 첫 시집 「고대 실크로드를 간다」, 그렇게 나왔다.
# 제주도는 옛날부터 귀중한 등대역할
"대체로 파키스탄으로 해서 전부 걸어봤지.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어디로 갔는가, 실크로드와 우리가 깊은 관계란 것을 알았어요."
고향 제주 바다. 지정학적 위치상 제주도는 나침반이다. 바다가 자원이니까 바다를 땅으로 살려야 한단다. "육지보다 바다가 고속도로지요. 제주도에서 옛날 삼별초 마지막 남은 사람이 오키나와로 갔지요. 제주도는 옛날부터 바다의 귀중한 등대역할을 했습니다. 동북아 다닐 때 제주도를 지점으로 해서 다녔어요."
육로, 해로 5년 동안 180일간의 여정. 그는 지난 4월, 5년을 바쳐 쓴 역작 「해상 실크로드와 코리아」(일어판)를 일본에서 출간했다. 이 책은 바다 실크로드와 한반도와의 관계를 조명하고 실증적 검증의 계기가 됐다는 데서 주목을 끌었다. '실크로드란 무엇인가?' '그것과 조선과 관련성이 있는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하지만 그는 앞으로 「상고시대의 실크로드」를 쓰고 싶다. 단군시대에 대한 것도 대중적으로 풀어내야할 것들이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런 의미에서 「환단고기」는 그에게 중요한 테마다.
# 한학자 증조부 동학난으로 과거 못 치러
2남4녀 중 장남. 이산의 슬픈 가족사가 흐른다. 아버진 동경에서 고학하며, 온갖 고생하다 오사카에 정착, 스프링공장으로 성공했다.
"아버지는 덕 있는 분이셨죠. 우리 공장에서 일하던 13명이 스프링공장에서 나가서 독립했어요. 제주사람들이었죠. 아버진 제주도의 정신을 가르쳤어요. 자식들 모두 조선인학교에 보냈어요. 해방 후 고향 제주도가 가난할 때 기부한 사람들 중 세 손가락에 들었어요." 할아버지는 한학자로 추앙받던 분이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었던 미모의 어머닌 여걸이었다. "오사카에서 북해도, 거기까지 20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빚 받으러 갈 일이 있었는데 열세살 아이한테 거기 갔다오라고 일부러 어머니가 시켰지. 죽느냐 사느냐. 그게 없으면 내가 그런 모험 못하지."
증조부 장원봉은 과거를 치러 가다가 동학난이 일어나 시험을 못 치렀던 인물. 제주시 삼양, 월정이란 마을 이름을 지은 분이다. "증조부 비석이 월정 신작로에 세워져 있지요." 유교사상이 강했던 할아버진 늘 중도로 나가라. 좌우에 휩쓸리지 마라했다. 외가는 독립운동에 힘쓴 집안의 피가 흘렀다. 아버지가 일군 부 덕에 물질적으론 풍요로웠으나 혼란의 시대, 정신적으론 고난이었다.
# 광주서 해방, 서울 보성중학교 합격
1945년 2월, 태평양전쟁 말엽, 위험을 느낀 제주의 할아버지는 광주로 이주, 일본의 가족을 전부 불러들였다. 그들이 일시 귀국한 후, 아버지의 일본 공장은 공습으로 불에 탔다. "몇 달도 안 된 사이에 세상이 바꿔진거야."
만 아홉 살, 그는 광주의 소학교에 편입했으나 조선말을 모른 아이. "거기에 전라도 꼬마들이 '쪽바리'라고 해. 당시 일본 소학교에서 우리 또래가 우리말 배운 사람은 없어."
어느날, 광주엔 인파에 인파였다. 해방이었다. "일본이 망했구나. 영화의 한 무대를 보는 것 같았어. 지금도 잊을 수 없어." 할아버지는 제주도로 들어갔다. 그들은 해방 다음해부터 서울로 이주. 아버진 다시 일본행, 어머니가 남았다.
서울의 초등학교를 나와 보성중학교에 합격했다. "우리 작은 외할아버지가 인편 통해서 팔시계하고 만년필하고 선물 보내왔어. 감격했어. 잊을 수 없지." 외할아버지 따라가서 김구 선생도 볼 수 있었고 추도식에도 갔었다.
허나 다시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외사촌동생과 화신백화점에서 영화를 볼 때였다. 한시간도 안돼 중단. "서로 이상하다 다음에 만나자 돌아가자 그것으로 이별이야." 27일밤 서울 거리는 마차, 인파로 꽉 찼다.
# 열세 살 한국전쟁 발발 피난길에 홀로 제주로
"우리가 귀국한 지 채 5년도 안된 사이에 전쟁이 터진거야. 대포 소리가 팡팡 나는 거야. 그날밤 두신가 세신가 그 상황은 인생에서 잊을 수 없지. 피난행렬이 멈출줄 몰라. 서울이 불바다였기 때문에 돌아가진 못하잖아. 마지막 전차가 떠나는 거야. 천장부터 매달리지 않은 곳이 없어. 내가 키가 작잖아. 마야코프스키가 쓴 시가 생각나. '30명에 다리가 두 개'라고. 천장에 뜨고 있는 거야. 그런 상황이야." 그는 여동생과 피난길에 갈팡질팡. 나중엔 헤어졌다 만났다. 남으로 남으로 피난 행렬. 어머닌 바로 2년 전에 일본에 가서 없을 때였다.
중2. 13세 소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대담했다. 천신만고 끝에 목포배를 탔다. 고향 산지항에 도착했다. "그 무렵 한라산 오름에 불이 구름처럼 크게 타오르는거야. 우리마을 삼양에서 본 거지." 전율했다. 제주엔 3개월 있으며 그 참극, '4·3'을 다시 들었다. 먼 친척 제사에도 가보고. 제삿날만 흰 밥 먹는 것도 봤다.
일본말은 전부 잊어버렸던 소년. 부랴부랴 달려온 어머니가 준비한 이불속에 숨어서 밀항으로 대마도에 도착, 일본땅에 닿는 순간까지 검열에 생사를 걸어야 했다.
# 문학 청년 시절 미야코프스키 좋아해
시 쓰고, 학생잡지 편집장도 하던 학생시절. 모든 일에 정열적이었다. 중학교는 오사카, 고교는 동경에서 보냈다. "아주 살벌한 시기였어요." 맘대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어요." 이상하게 러시아 작가들에 끌렸다. 긴장의 시기였던 일제강점기를 살아야 했던 조선의 아들. 전쟁을 눈앞에서 헤치며, 생과 사의 시대를 건너야하던 10대, 푸쉬킨부터 마야코프스키, 톨스토이, 고리키를 좋아했다.
"우리 어머니가 내가 잠자는 걸 본 적이 없다는 거야. 「조용한 돈강」도 그때는 원서로 읽었지. 우리 가르친 사람이 러시아 문학을 동경하고 있었어. 시도 쓰고, 잡지도 만들고 하니까 사랑해줬지. 고교시절, 그 선생은 그가 쓴 시를 칠판에 쓰고 해설해서 한 시간을 마치기도 했단다.
두 살 아래인 아내가 경리로 회사를 지키고 있어 안심하고 실크로드 여정을 떠날 수 있다는 장윤식. 가령, 이런 꿈들은 지금 어떨까 생각한다. 흘러간 노래를 가사 안보고 열곡을 부를수 있다면, 참혹했던 한국전쟁 등 소년이 감당했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실크로드 고대사 추적하는 것. 칠순이란 것 의식 않는다.
"낙타 등에 걸터앉아/가도 가도 또 걸어 가도/메마른 호수는 끝장이 없어라/ 물이 사라진 호수 밑바닥에 / 천년 흰 조가비-/태양은 쨍쨍 내리쬐고/막풍을 맞아도/ 홍류는 사지에 찰싹 붙어서/ 그저 한결같이 기다리다/하일귀수!(장윤식 '방황하는 로부놀'1)"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