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67. 강길원
권위의식 없고 학생지도 성실, 학생에게 인기 교수, 시간 지키는 것 원칙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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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길원 화백 | ||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는 "풍경은 얼굴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흔히 우리는 풍경하면 자연풍경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자연 속에 어울리는 건축물이나 시설물들도 사회적인 풍경이 된다. 항구의 풍경이나 도시의 풍경은 각 나라마다 다른 인상을 띤다. 풍경이 얼굴이 되는 까닭은 각 나라, 지역마다 각기 특유한 자연과 환경에서 비롯된 풍토적인 정취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풍경화(Landscape)의 시초는 종교화나 신화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바로크시대 이전의 풍경들이 주제의 배경이 된 것이다. 15세기 르네상스 시기인 플랑드르 화가들은 풍경을 주제와 결합시키면서 풍경과 어우러진 그림을 그렸다. 그 후 17세기 바로크 시대 화가들은 풍경을 독립적인 회화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풍경화로서 주목되는 나라는 역시 네덜란드이다. 이탈리아, 프랑스의 이상화된 풍경화가 발달한 나라와는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하였다. 네덜란드와 같이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저지대에서는 내려다보는 풍경화보다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풍경화가 유리하였다.
영국의 바로크 풍경화가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1788)는 소위 시골풍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전원풍'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인물과 풍경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이 전원풍은 19세기 풍경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과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에게 풍경을 단독 주제로 삼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은 뛰어난 낭만주의 풍경화들을 그렸다.
19세기 중반 이후 대두된 인상파 시대에는 자연의 빛을 재해석하면서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시기였으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풍경화가 오늘날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자연의 풍경에다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투영하면서 개성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실주의에 입각하기보다는 활기찬 생명력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을 풍경화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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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록담, 유채 | ||
강길원(姜吉源, 1939~ )은 전남 장흥 출신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강진에서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광주사범, 조선대 문리대 미술과, 1965년 홍익대 회화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졸업 후 조선대 부속고등학교에서 1년, 동덕여고 5년, 경희대 사범대 미술과 강사로 10년을 재직하였다. 1977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겼다. 81년 제주대학 교수시절, 6개월 정도 프랑스의 그랑 쇼미에르(Grande Chaumiere) 아카데미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최근까지 공주대 명예교수라는 경력으로 보면, 그의 삶의 여정은 타향살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향살이는 풍경화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었다.
강길원의 화가로서의 발판은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국전)이었다. 그는 국전 추천작가(68~75), 초대작가(76~90)로 한국 화단의 주류화가로서 활동하였다. 현대사생회 회장, 목우회 부이사장 등 여러 미술가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현재는 한국미술협회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서울, 제주, 광주, 뉴욕, 상파울로, 뉴델리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각종 단체전만 해도 총 550여회.
수상 경력으로는 국전에서 6번 특선. 스페인, 미국, 아시아 등의 미술제마다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2003년 충청남도 문화상, 2004년 국립공주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 정년을 마치면서 옥조근정훈장을 추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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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개인전 팸플릿 | ||
이 전시는 1966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10여년 만에 갖는 전시였다. 전시에는 모두 77점이 출품되었다. 제목으로 보아 확연히 제주도 풍경임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은 <외도해변>, <서귀포 해안>, <바다와 말>, <외돌개 예찬>, <산정호수>, <일출봉>, <한라산과 어선>, <정방폭포 근경>, <정방폭포 앞>, <유채꽃과 한라산>, <별도봉의 오월>, <탐라의 파도>, <탐라예찬>, <한라산의 99곡> 등이다.
그는 82년까지 제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제주대학에 재직하는 6년간 매주 토요일, 일요일이면 지인들과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제주는 바다, 산, 들판이 오밀조밀하고, 어느 곳보다도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제주시 중앙로에 마련한 25평짜리 화실에서 하루에 7~8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그의 화실에는 마치 화랑과도 같이 벽이란 벽에는 온통 그림으로 가득하였다. 그가 구사하는 화려한 색상은 제주에서 좀처럼 접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제자들에게는 권위의식 없이 학생들을 열심히 지도해주신 교수님으로서의 이미지가 남아있다. 그는 철저히 시간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 화가가 되기 위한 기본으로서, 학생들이 붓을 깨끗하게 빨았는지 일일이 체크를 할 정도였다. 학생들이 홀로 설 수 있게 학생들의 그림에 손대는 법이 없었다. 같은 화가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학생이나 현역 작가에게 솔직하게 그림 평을 해주었다.
강길원이 제주에 온 후 제주도 소재의 그림을 발표하자 외지 화가들이 제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그가 정방폭포를 그려서 발표하면 다른 화가들이 그 그림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제주에 들어오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럴 때마다 강길원은 그림그리기 좋은 곳을 찾아 안내를 하였다. 사생단체가 제주도를 찾는 일도 잦아졌다. 자연스럽게 제주도가 사생지(寫生地)가 된 것이다.
제주대학 재직 시절 강길원의 제자였던 서양화가 김성란은 "교수님은 지도를 참 잘 하셨고, 교수님께 지도받게 된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술·담배 안하시고 무척 검소하고 솔직하시고…원리원칙을 잘 지키십니다. 제주도 그림은 대체로 어두웠는데 교수님은 밝게 색을 쓰셨습니다. 나중에 전라도에 가보니 땅이 붉은 색이어서 교수님의 색채를 그때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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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도봉의 5월, 유채, 15F | ||
"나는 풍경을 현실풍경과 상관없이 재구성해서 그린다. 그리고 다시 색채와 형태를 단순화 시킨다. 야수파에 가까워 색감은 강하지만 더욱 단조롭게 그린다."
그의 작품에서는 사물의 고유한 색에서 벗어난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빠른 필선의 단순한 형태의 율동이 느껴진다. 야수파는 후기 인상파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형태의 왜곡과 색채로 감정을 표현했던 후기 인상파의 창작방식은 20세기 야수파와 표현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끼쳤다.
강길원은 초기에 인물군상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미술대전 추천작가가 되면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서울 근교와 춘천 등에서 소재를 취하였다. 1977년 제주도로 내려 온 후 제주의 자연에 심취하였다. 특히 외돌개는 30여 차례 이상 다닐 정도로 그가 좋아하는 장소였다. 이 시기 그의 그림에서는 분방하고 속도감 있는 붓질을 사용하여 격렬한 감정이 잘 드러난다. 공장 굴뚝을 그린 <승화(昇華)>라는 작품은 그의 감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의 화면은 인상파와 같이 빛의 작용에 의한 맑고 경쾌한 색채가 아니다. 그때그때 두텁고 빠른 터치로 거침없이 그려나간 감정의 색이다. '즉흥적인 드로잉 회화'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능숙한 붓질은 그의 개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배색(配色)에 능숙한 강길원의 80년대 이후 풍경들은 화려한 색채의 향연으로 나타난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풍경은 더욱 단순해지고 커다란 색채의 면으로 구분된다. 자연을 봄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제거하고 골격만을 취한다. 이는 점차 구상의 경계를 넘어 색으로 보여주는 자연에 대한 감정을 추상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미술평론가 박용숙은 강길원의 작품을 보고, "색채의 의지와 감정이 풍요롭게 자리잡고 있다. 그는 풍경을 다만 거기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그 나름의 의지와 감정으로 바꾸어 놓는 마술을 행하며…탐구하거나 분석하는 일보다는 자연을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제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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