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3부-‘잠녀를 만나다’
추자도 추가 답사(5)-추자면 대서리 최소녀 할머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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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질을 마친 잠녀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있다. (1985) | ||
여건만 되면에서 "이제는 힘들어서도 안 하는 일", 세월에 묻히는 아쉬움 더해
최소녀 할머니의 이야기는 시간을 오간다. 다른 지역들과 상관없이 세월을 먹은 것은 추자도도 마찬가지다. 시간 속에서 본섬(제주도)서 육지를 오가는 중간이란 의미는 오간 데 없다. 일제 강점기며 4·3이며 한국전쟁까지, 거의 비슷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지탱해온 섬에서 본섬 잠녀들보다 한참을 늦게 고무옷을 입은 것이나 하나 둘 섬사람은 떠나고 뭍 사람들도 섬이 채워지는 것이나 모두 운명인 듯 여긴다. "너 만은 여기서 살지 마라"했던 어머니의 말이 쉴새없이 섬이 내려치는 파도소리처럼 귀에 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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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소녀 할머니 | ||
"내 나이 아그 때는 일제 세상이었고, 물질 시작할 때 해방됐지. 뭐 한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 나가면서 놓고 간 거 가져다 쓰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배를 받기도 했제. 그 때 여기 배가 많이 늘었어"
일제시대에는 짚새기(짚신) 바람에 군사 훈련을 받았다. 지금 추자중학교 자리쯤 된다. 4·3때고 한국전쟁 때고 영문도 모른 채 경계를 섰던 기억만 있다. 지금은 쾌속선을 타면 1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섬이지만 그 때는 멀기도 참 멀었었다. 아니 누구하나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최 할머니가 불쑥 던진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 때는 섬에 들어온 뒤에 물질을 한 사람도 있었어"
쉽게 바다를 내주지 않는 잠녀들이다. 어촌계 소속이 아니어도 바다를 누비게 뒀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 할머니는 "그 때 핵교 선생님 사모님이며 여기 와서 무레질 잘했어"했다. 한 둘이 아니었다. '소섬'에서 온 잠녀도 있었고, 본섬으로 돌아간 뒤에도 몇 년인가 다시 추자도에 왔던 잠녀도 있었다. 그들 모두 지금은 다 유명을 달리했다. 어떻게 추자 바다에서 작업을 할 수 있었는지 하는 '속사정'이 무심히 세월을 타고 날아가 버렸다. '몇 년만 서둘렀으면…'아쉬움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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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수도로 잠녀들을 실어 나르는 태성호가 추자항에 들어오고 있다. | ||
최 할머니의 기억을 한참 더듬는 중에 수령섬에 갔던 잠녀들이 돌아왔단 기별이 왔다. 잠깐 작업 나갔던 잠녀들을 만나고 오겠다는 말에 최 할머니는 "이제사 왔단가"하며 어느 바다에 다녀왔는지 궁금해했다.
"아직도 여 가면 뭐가 있고, 저 가면 뭐가 있고 하는게 눈에 훤한 디 몸이 아파 못 간다"는 최 할머니는 "쓰렁섬(수령섬)까지 가서 뭐 해갔고 왔는가" 묻는다. 마음은 여전히 바다에 가 있다.
아침 일찍 작업에 나섰던 잠녀들이 소라 무게를 잰다. 김경자 잠녀(68)는 "집에 쓸 일이 있어 잡은 거"라며 사람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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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령섬 작업을 마친 대서리 잠녀들이 밀대에 소라를 싣고 있다. | ||
잠녀들이 몸을 말리러 간 사이 소라를 실어 나르는 밀대가 눈에 띈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마중을 나왔었다. 섬인 까닭에 물먹은 망사리를 옮기는 작업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타리(관탈섬)도 댕기고 어디 안 댕긴 디가 없어"
최 할머니의 목소리가 푹 잠긴다. "옛날에 물레할 때는 참 재미있었어. 전복이나 많이 되면 얼마나 좋은디. 잠뱅이 입고 할 때는 오래 하지도 못했어. 5㎏잡으면 많이 잡은 거제"
지금은 고무옷을 입고 하루 5~6시간은 너끈히 작업을 한다. 예전에는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열흘을 꼬박 채우던 것이 지금은 5~6일 하는 게 전부다.
"힘든데 그렇게 할 이유도 없고, 욕심만 앞서서 그런다"는 게 최 할머니의 생각이다.
"그때는 소라가 안 났어. 미역이나 우뭇가사리 안 하면 뭐 먹고 살어. 그냥 여건만 되면 바다에 갔제"
# 나 죽고 나믄 아무도 모르제
지금은 살기 좋아져서 바다에 안 간단다. 힘들게 고생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는 말이다.
최 할머니는 "사수도까지 배로 2시간은 걸렸지. 2년에 한번씩 영흥리와 대서리에서 돌아가며 작업을 했는데 이제 대서리서는 안해"하며 예전과 달라도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젊은'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인가 싶었지만 할머니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어느 샌가 온몸에 새겨진 세월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들어 그저 마음 한 켠이 섭섭했던 따름이다.
"이제 누가 더 무레질을 할랑가. 나 죽고 나믄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나 아무도 모를 것인디"
벌기도 많이 벌었지만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쓰느라 어디 모아둔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에디오피아 소말리족 속담 중에 '노인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이미 고리 하나를 잃었지만 자칫하면 옛 추자 잠녀들의 흔적까지 잃을 판이다. 옛 사진을 보관해둔 종이 상자까지 꺼내주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한 최 할머니의 마음에 그만 짠해졌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해녀박물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