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3부-‘잠녀를 만나다’ <168>
추자도 추가 답사(6)<끝>

   
 
  ▲ 추자도 잠녀들이 작업을 마치고 추자항으로 들어가고 있다.  
 
주민 90% 어업종사…바다 의존도 높지만 잠녀 존재감은 약해
'섬 기반 세상사' 중심 역할, 노령화·어획량 감소 등 보존 시급

섬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어찌 보면 섬에서의 시간은 멈춰있다 느껴질 만큼 느리다. 변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뿐이다.

섬 제주와 뭍의 중간에 있는 추자도도 마찬가지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못하지만 섬을 거쳐간 많은 이들이 달라졌다 한다. 잠녀들의 숨비소리가 희미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이고, 그 힘든 일을…. 이제는 섬사람도 없고,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그렇게 없어지는 게지"

섬을 떠난 삶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노잠녀의 넋두리가 유난히 구슬프다. 지난 2008년에 이어 올해 두 차례 추자 답사를 통해 살펴본 추자도 잠녀들의 삶을 정리한다.


   
 
  ▲ 횡간도 앞에서 물질작업을 끝낸 추자도 잠녀들이 수확한 소라 등 해산물을 배로 옮기고 있다.  
 
# 4면 바다에도 존재감 약해

추자도는 변화무쌍한 바닷길 만큼이라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1896년 전남 완도군으로 편입됐다 1910년에 제주도에 편입된 이후 1946년 8월 1일 제주도제 실시로 북제주군 소속이 됐다. 지금은 제주시 추자면이다. 이력추적제라도 할라치면 꼬리표 서너개는 거뜬이다. 그런 까닭일까 섬사람들의 말은 가끔 그 경계가 애매하다. 전라도 사투리인가 싶으면 제주말 흔적도 있고 일본어 잔재까지 얼룩덜룩이다.

그래도 섬사람들은 '제주도'라는 배경을 고수한다. 본섬과 섬으로 나눠 말하는 것이 입에 붙었다. 역시나 4면이 바다인 섬에 잠녀의 흔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전체 주민의 90%가 어업에 종사할 만큼 바다 의존도가 높지만 잠녀의 존재감은 희미하다.

참조기를 중심으로 한 어선업이 추자도 경제의 중심축인 반면 여성들의 나잠업은 벌써 10년도 더 전에 만들어진 「추자도」지(1999년)에서도 손으로 꼽을 정도다. 예전에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어떤 흐름으로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기억'밖에 없다.

지난해말 기준으로 추자도 수협의 잠녀는 135명이다. 여기에는 지금은 물질을 하지 않는 전직 잠녀 13명이 포함돼 있다. 현재 무레질(추자에서는 물질을 무레질이라고 한다)을 하는 잠녀 중 최고령자가 83세인 점을 감안하면 "삼촌일랑 이제 쉽써"란 말에 두리박(테왁)이 바싹 말라버린 노잠녀가 적잖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 하추자도 돈대산 정상에서 본 하추자도의 신양항  
 

# 살아있는 추자도의 역사

추자도 잠녀들의 기억은 섬의 시간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최소녀 할머니(83·추자면 대서리)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 근대화 이후의 섬을 기억해냈다.

일제 강점기 추자 주변의 바다자원 확보를 위해 섬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만든 '이주어촌'의 위치를 기억하는 몇 안되는 섬 사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섬을 입고 살았기에 온 몸으로 섬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셈이다. 이주어촌의 일본인 병원과 짚신을 신고 했던 군사훈련,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가재도구며 귀국을 도운 대가로 받은 배 이야기까지 줄줄이다. 일제 수탈의 대상이던 '우뭇가사리'가 섬에서 허기를 채우던 수단에서 '쌀'과 맞바꿀 수 있는 귀한 존재가 됐던 상황에 대한 기억도 비교적 온전하다.

이른바 섬을 중심으로 읽는 세상사다. "일본 사람들이 가사리 값은 잘 쳐줬다"며 "그 때가 지금보다 살기는 나았다"는 최 할머니의 말은 관심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린 사정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본섬에서는 1970년대 초반 보급됐던 고무옷 조차 추자도에서는 울산 바깥물질을 나갔던 잠녀가 가지고 들어온 것을 몰래 입다가 70년대 중반이 훨씬 지나서야 다들 입었을 정도로 늦었다.(박금실 잠녀·56·추자면 영흥리)

# 바다 속 사정에 애만 타

'섬에서 태어난 까닭에 놀이처럼 무레질을 배우고 천직이 됐다'는 것도 이제는 다 옛말이 됐다. 할 수 있으면 섬을 떠나라해서, 또 그렇게 힘든 일을 배워 뭐하랴 싶은 마음에 바다로 향하는 딸의 발목을 잡은 어미가 한 둘이 아니다. 부속 섬 작업으로 분명히 남아있을거라 믿었던 '네젓는소리'를 기억하는 잠녀는 한 둘이고, 섬에 살면서 아예 무레질을 모르고 바다 속 사정에 관심이 없는 여성이 반절이다. 제주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찌보면 제주섬 전체의 축소판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최근 몇 년간 추자도수협의 소라 총허용어획량(TAC)는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2007년 9월~2008년 5월 86t·2008년 9월~2009년 5월 86t에 이어 2009년 9월~2010년 5월은 111t으로 수치상 분명히 늘었다. 올해 역시 내년 상반기 TAC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올 연말까지 62t이 배정되는 등 바다 사정이 나아진 듯 보인다.

하지만 속사정까지 그럴까. 위판을 맡은 추자도수협에서 조차 확 줄어든 정도를 피부로 느낄 정도라 말한다.

물건이 준 만큼 사람들도 줄었고, 남은 사람들이 세월을 비켜가지 못한 사정까지 보태면 이해가 된다. 최근 몇 해 추자에서는 오히려 해삼 양식 쪽에 더 공을 들이고 있다. 전복·소라보다 가까운 바다에서 작업을 할 수 있고 수입도 낫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식에게는 안 물려준다.

# 기억으로만 남을까 아쉬움

처음에는 "다음 언제 오겠다"는 약속이 전부이던 섬 작업에 무전기가 등장하고 휴대전화에 냉장고까지 환경은 많이 나아졌다.

물 걱정도 않고 고무옷을 입는 까닭에 추위에 떨다 이가 상한다거나 몇 번이고 배나 뭍에 올라 몸을 녹이는 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수도며 수령섬같은 무인도는 아직도 잠녀들이 지키고 있다. 무거운 망사리를 대신 들어줄 가족 대신 잠녀의 이름이 떡하니 적힌 밀대가 잘 포장된 아스파트 길을 지나 수협 공판장으로 간다.

그래도 정막한 섬의 공기를 뚫고 귀를 때리는 숨비소리는 여전하다. 집 한 쪽 두리박을 준비해놓고 날만 좋으면 바다에 나서는 일도 숨을 쉬는 것 만큼 익숙하다.

문제는 '언제까지'라는데 있다.

이제 80줄을 넘기고 말리는 '아그'잠녀들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치는 노잠녀도, 아직은 어려 한창때라는 50대 잠녀도 같은 말을 한다.

"이제 더 누가 이 일을 하겠냐. 우리가 손을 놓으면 이 일도 끝이지".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해녀박물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