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1. 사진가 강태길

   
 
  돌, 150×50㎝  
 
제주 자연과 하나로 묶인 나의 연(緣), 그 시원(始原) 에너지로 호흡
간결함 속 고고한 자태 포기하지 않는 오름에서 단순미의 극치를 봄

# 사진, 본원적 인상 찾기

본다는 것은 언어보다도 우선한다. '보는 것'은 '말하는 것' 이전의 감각적 행동이다. 말한다는 것은 본 것에 대한 '견해'이다. 견해는 표현되는 순간 경험자 주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가는 대상의 경험적 주체이다. 대상을 본다는 것은 미를 발견하는 것, 일종의 형상적 인식행위라고 할 수 있다. 크로체(Benedtto Croce, 1866~1952)는 예술은 직관이라고 하였다. "미는 표현이며, 적합한 표현이다. 표현이 적합하다면 그것이 곧 미다. 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형상의 정확성이며 따라서 표현의 정확성이다." 회화가 아닌 사진으로 표현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사진은 표현적인 구조를 갖는 것보다 재현적인 현상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은 '무엇을 재현했느냐'라는 것보다 오히려 "무엇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느냐"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진은 관계를 갖는다. 이미 우리는 사진을 빛의 낙인(烙印)으로서, 삼차원의 자연 형상을 이차원의 이미지로 고착시키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고착된 이미지는 사진가마다  똑같은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진은 찍는 순간 사진가의 철학적 눈이 작동하고 그것의 결과로서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좋은 사진은 형식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보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대상에 동화(同化)되어야 한다. 동화란 '~같이 되는 것', 혹은 '~같이 되기 위한 적응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화란 자신의 눈을 익숙하게 하는 것, 눈을 익숙하게 함으로써 대상의 본질에 한껏 다가서는 것이다.

사진은 결코 세상을 심미주의로 보는 예술방식이 아니다. 심미주의는 사진의 한 측면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이미 미를 상정하여 대상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내재된 본원적 인상을 찾는 것이다. 제주를 찍는다면 제주다움이 나타나야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미의 문제를 훨씬 뛰어 넘는다. 

   
 
  돌, 150×50㎝  
 
# 제주의 본질을 찾는 사진가

강태길(姜泰吉, 1952~  )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1980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하였다. 1986년 제주에 정착하였다. 원래 그는 한 3년 정도 사진 작업을 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름을 만나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오름은 강렬한 느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제주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주를 소재로 한 개인전 <제주의 오름(1990)>, <제주 동자석(1991)>, <제주의 땅(1997)>, <강태길 사진전(2010)> 등을 서울과 제주에서 열었다. 단체전으로는 <현대사진의 흐름(1994)>, <사진 새바람(1994)>, <한국현대사진 60년(2008)>전 등에 참여하였다.

그는 제주에서 자신의 미학적 생명의 줄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제주의 돌과 오름과 숲을 사진에 담는 작업은 곧 내 삶의 결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주의 자연과 하나로 묶인 나의 연(緣)을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그 시원(始原)의 에너지를 호흡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강태길은 자신의 인생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제주의 자연과 통일시키려는 인연의 에너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에게 제주는 원시적 에너지가 있는 땅이었다. 삶과 죽음이 스며든 제주의 자연은 야릇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제주의 자연은 지형적으로나 풍속적으로도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제주의 자연은 그에게 겸허한 품성을 갖도록 하였다. 그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제주의 들녘을 누비고 다녔다. 자연과 함께 숨을 고르는 사이, 어느 덧 그는 제주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 강태길의 작품세계

1990년 4월 강태길은 <제주의 오름전>을 조선일보 화랑에서 열었다. 그간 제주에서 찍은 오름 사진들을 풀어놓았다. 그는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황홀한 섬나라 한라산의 구석구석을 헤매던 7개월의 방황 끝에 결국 '오름'에서 나의 렌즈를 멈추었다. 그것도 내가 대상으로 삼은 '오름'은 겨우 산굼부리에서 성읍 쪽으로 가면서 널려있는 사십여 개뿐. 사십여 개 오름을 오르내리면서 내 사진의 틀을 깨어 부수기 시작했다."

틀을 깨는 것은 무엇인가. 틀이란 이미 고정된 관념의 세계이다. 고정된 관념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들인 타인의 세계에 대한 환영일 뿐이다. 자신이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알아버린 남의 세계이다. 틀은 변화의 세계를 거부하는 고착된 현상 유지(維持)의 세계이다. 틀은 하나의 규범적 세계에 불과하다. 규범은 필연적으로 합의된 세계이다. 규범의 세계란 이미 제도화된 세계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예술은 합의된 세계의 도덕과는 다른 패턴을 생산한다. 

강태길은 오름을 만나면서 자신을 지배하던 마음의 틀을 벗을 수 있었다. 그는 오름에서 단순성을 깨달았다. 유연한 선이 주는 간결함 속에서도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는 오름의 형태에서 단순미의 극치를 보았다. 단순미, 더 이상 버릴 것 없이 존재하는 자연미. 제주의 오름은 단순한 형태미를 띠고 있었다.

자연은 눈에 보이지만 제대로 보기 힘들다. 자연의 위대함은 그것을 자각한 자만이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오름은 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미학이 결합되면서 아름다움은 철저하게 자연미의 차원과 결합된다. 제주의 오름이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오름을 포착한 인공적 미학이 있기 때문이다.

1991년 강태길은 자연의 시선에서 문화적 시선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그동안의 컬러를 버리고 흑백의 세계로 돌아왔다. 흑백의 세계는 단조롭지만 사진을 찍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흑백의 세계는 극명한 세계로서, 자연이 아닌 민속의 세계였다. 사진은 이론과 달라서 보이는 세계를 일으켜 세울 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따로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자연은 컬러를 중심으로 펼쳐야 마땅하였다. 자연을 찍는 매력은 바로 자연색이 주는 미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흑백의 세계에서 색은 단지 스펙트럼에 의해 만들어지는 색의 차원을 넘어서 자연, 풍토, 문화 공동체의 스타일로 번지고 있었다. 흑백을 고집할 때 제주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했던 삶의 풍토를 담고 있었다. 당시 제주의 동자석은 주목받지 못한 죽음의 문화였다. 동자석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의 사진작업이 문화적 차원의 관심이라는 것이 분명하였다.

동자석. 제주는 이상하리만치 사자(死者)의 숭배가 강하였다. 그가 동자석에 주목한 것은 타자의 시선으로서 동자석을 보는 독특한 시선 때문이었다. 일상 속 동일한 시선에서는 자신의 일상의 특이성을 찾지 못한다. 영위되는 삶의 의식적 차원에서는 어떤 것도 차이를 못 느끼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타자라는 관점은 문화의 차이, 구별에 대한 분명한 경계를 읽을 수 있다. 일상에서 행해지는 의례는 바로 자신의 공동체에서 주목하기보다는 타인에 의한 외부적 시선에 의해 주목받는다. 강태길의 동자석은 타자의 시선이 찾아낸 문화적 차이의 기표이다.     

1997년 강태길은 제주의 땅이라는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개인전 작품들은 제주도 곳곳에 산재한 절개(切開)된 지층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제주의 속살과도 같은 지층의 노출된 사진들은 사회적 이유를 떠나서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들을 전해 주었다. 우선 색채의 아름다움이었다. 화산섬이라는 특징은 절개지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개발현장의 폐해보다는 미학적인 심미성을 강화해 주는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현실적으로는 끔찍한 개발현장에 다름 아니지만 사회학적 차원, 혹은 지리적 측면에서는 단지 보이지않았던 땅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색다른 특징을 내포한다. 제주의 땅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의미를 띠지만, 사진 예술로 볼 때 사회적 모순으로 접근했다기보다는 제주의 땅의 본래의 속성을 보여주는 심미적 차원의 시도였던 것이다.

2010년 강태길은 제주의 풍광을 전시하였다. 이미 그는 제주의 숲에 심취하여 한라산 심장부의 자연을 캐치하였다. 그가 찍은 것은 제주의 신비였다. 자신의 영혼이 기댈 곳은 섬의 자연이라고 인식하였다. 그가 바라는 것은 명성도 축복도 아니었다. 자신이 느낀대로 자연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색채를 매우 중시 여겼다. 색채야 말로 제주 섬땅의 깊은 상징이기에, 그 색이 자신의 색으로 포착되는 순간 제주는 자신의 마음에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제주대학교박물관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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