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4. 사진가 김수남

 오지에서 느꼈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달픔'은 자연스럽게 '굿'으로 이어져
 오로지 열정과 뚝심으로 8년 동안 아시아 11개국 이르는 샤머니즘 대장정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  
 
# 사진가, 눈으로 목격하는 관찰자

사진의 발명은 화가의 손에 의해서였다. 19세기 위대한 발명 중 하나인 사진의 등장과 함께 예술의 대중화가 시작되었고, 기록이라는 영역이 새롭게 개척되었다. 화가 앙리 마티스는 "사진은 가장 귀중한, 살아있는 기록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 진가를 인정하였다. 현실기록에 중심을 두고 찍는 사진을 다큐멘터리 사진이라고 한다. 다큐멘트(document)는 증명, 증거를 뜻하는 말로서, 20세기 초 으젠느 앗제(Eugene Auguste Atget)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다큐멘터리란 용어는 '가르친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도세레(docere)'에서 유래하였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정보전달 이상의 역할을 한다. 사회 양상의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보는 사람들을 교화한다(아더로드스타인, 1994).

다큐멘터리 사진의 생명은 시간이다. 시간을 정지시키는 예술이 사진이다. 시대의 중요한 주제들도 사진가에 의해서 선택되고 인화됨으로써 사람들에게 보다 더 집중된 관심을 유발시킨다. 찍는 행위가 현실을 해석하는 행위라고 한다면, 사진가들은 각자 자기 언어를 가진 관찰자와 다름없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아주 객관적인 사진이라는 의미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목격하는 동시에 관찰자로서 감정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들에서 개성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의 태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우리는 100년 전의 생활을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빛바랜 흑백 사진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시대의 중요한 사건을 어렵지 않게 이미지로 되돌려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회의 전 영역에 걸쳐 분야별로 역사적인 영상을 제공하는 힘이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출판저널과 만나면서 더욱 그 힘을 과시하게 되었다. 

   
 
  사진가 김수남 생전의 모습  
 
# 제주출신 굿 사진가 김수남

김수남(1949~2006)은 제주시 한림에서 출생, 교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함덕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오현중학교 1학년을 다니고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하여 충문중학교, 용산고등학교, 연세대 지질학과를 졸업하였다. 미망인에 의하면 김수남은 중학교 1학년까지 살았던 제주에 향수가 많았다고 한다. 어릴 적 놀았던 함덕 해수욕장의 풍경을 떠올릴 때면 기분 좋은 인상을 띠었으며 종종 제주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수남은 할머니가 자신을 위해 할망당을 다녀온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적 그는 할망당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겠으나, 이런 원체험(原體驗)이 그를 굿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인연이 된 것은 아닐까. 

김수남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때부터였다. 육군 제대를 하고 3학년에 복학을 해서 <연세춘추>편집장으로 일하였다. 1973년 연세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바로 월간《세대》에 취직을 하였고, 곧바로 <한국탐험> 연재에 들어갔다. 이듬 해 다시 <한국의 농촌>이라는 기획 연재를 하면서 만 3년 동안 많은 사진을 찍었다. 이때 화전민, 성베드로 정박아학교, 성남시 광주대단지, 부산 베트남 보트피플 수용소, 산간벽지의 사라져가는 것들을 찍으면서 이합집산 된 의식은 한 곳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1975년 대학교 때 알았던 이희영과 결혼, 같은 해 동아일보에 입사하였다. 3년간 소년동아일보사에서 근무, 1979년 《신동아》출판사진부로 자리를 옮겨 <문명의 외곽>연재를 시작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서울의 굿당과 점집을 찍어 게재하였다.

소설가 박태순과 함께 오지를 탐험하면서 느꼈던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애달픔'은 자연스럽게 '굿'으로 이어졌다. 당시 굿은 군부정권의 탄압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굿이 곧 사라지겠구나"라는 생각에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굿판의 분위기상 카메라를 꺼내기도 힘들었다. 감각으로만 사진을 찍으려니 굿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다. 김수남은 굿 공부를 시작하였다. 굿 현장에 친숙해지기 위한 얼굴트기에 적잖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가 굿판을 돌아다닐 때만 해도 새마을 운동이 한창 기세를 부릴 때였다. <문명의 외곽>이란 바로 "미신지대(迷信地帶)"였다.

1980년 박정희가 사망하고 여전히 군사정권이 계속되었지만 특이하게도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타파 대상이었던 굿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굿판이 "미신지대(迷信地帶)"에서 "전통의 현장"으로 탈바꿈하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다. 1984년 건축가 김수근이 발행하는《공간》지에 김수남의 글과 사진이 실리는 <전통의 현장>이 연재되면서 사진과 굿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렸다. 이때 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 송파산대놀이, 강령탈춤, 김금화의 황해도 내림굿, 우옥주의 신곡맞이 만수대탁굿, 제주 동김녕리 문순실 내림굿, 공옥진의 바보춤 등을 차례차례 게재하였다. 이 사진들을 보고 열화당에서 출판제의를 하였다.

1982년 열화당에서 출판제의를 받은 것은 모두 20권짜리《한국의 굿》전집이었다. 전국의 굿을 지역별, 내용별 특성을 고려하여 20여개로 분류, 1천여 장의 사진과 전문가 해설을 곁들여 1983년부터 1993년까지 만 10년에 걸쳐 완간되었다. 이 시리즈는 젊은 학생이나 전문가들도 함께 볼 수 있게 절충한 준 학술서와 같은 간행물이었다. 이 도서는 200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100권의 책에 선정되었고, 따로 독일은 김수남의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김인회와 황루시는 김수남의 잊을 수 없는 동료이자 스승이었다.        

   
 
  필리핀 루손섬 전통축제  
 
# 아시아로 관심을 넓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김수남은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일본 국제교류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6개월 동안 오키나와 굿을 찍었다. 중국 남부,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 타이,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 북부 지역인 라다크, 티벳 문화까지 그의 발길이 닿았다.

그는 외국에서도 붙임성이 좋아 현지 적응력이 빨랐다. 선진국 사진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오지의 문화현장을 찾아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매우 유연한 사람이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부지런히 거의 모든 답사를 혼자만 다녔다. 사람들은 그를 일러 개척자라고 부른다. 한국의 학자 중에 김수남 만큼 다양한 문화를 조사하고 기록한 사람도 없다고들 한다.

김수남은 오로지 열정과 뚝심으로 8년 동안 아시아 11개국에 이르는 샤머니즘 대장정을 행하였다. 이것은 아시아의 어떤 나라 사진가도 해낼 수 없는 문화 탐색행이었다. 그의 수많은 현장 기록으로 아시아 민족은 서로간의 문화적 맥락과 차이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1955년 그는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살아있는 신화 아시아>라는 전시회 도록에서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 변화되는 것에 대한 기록, 화려한 여러 민족의 문화와 예술, 오랫동안 계속해온 개인적인 굿, 그리고 집념,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나의 작업을 얘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해석들이었다. 지금 나는 다시 생각한다. 무엇이 나를 끌어들이고 놔주지 않는 것일까."라고 하였다.

김수남이 아시아를 탐색하면서 느낀 것은 전통문화, 사라져가는 문화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 현재 문화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수남이 아시아를 답사하면서 깨달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내용이었다. "한곳에 오래 머물다 보면 사람이든 문화든 천천히 내게 오는 것을 느낀다. 보고 찾아내고 그것을 긁어내지 않아도, 바람이 음악이 사람이나 사물이 내게 들려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김수남이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아시아는 한 사람의 사진가가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나 넓고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웃 아시아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이 김수남의 일생의 꿈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다가 최후를 맞는 일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2006년 2월 4일 타이의 오지(奧地) 치앙라이에서 소수민족 리수족의 신년행사를 취재하던 중 김수남은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향년 57세. 그의 장례는 2006년 2월 8일 치러졌고, 바로 그날 동료들과 선후배들이 모여 김수남 기념사업회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김수남기념사업회는 6월 21일 유홍준 문화재청장, 김인회 전 연세대 교수, 채희완 부산대 교수, 학전 대표 김민기 등 40여 명이 모여 발기인 총회를 가졌다.

정부는 김수남에게 2006년 12월 8일 옥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제주대학교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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