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북촌사건' 겪은 현덕선

 끝내 살아남았으니 할 말이 있다. "눈물흘릴 시간이랑 말앙. 우리 북촌 선량한 국민들 다 죽어부난. 죄어신 사람 나오렌 허난 줄줄줄 나오난 다 죽어서." 일제강점기, 이어진 4·3 북촌학살의 현장 난시빌레에서 다 죽은 오빠를 언니와 들쳐 업고 집까지 달려갔던 것은 초인적인 힘이 아니었을까. 대학살의 현장 북촌국민학교 마당에선 두려움에 떨면서도 죽어가던 이들을 눈에 담고 거들었다. 전라도에서 한국전쟁을 만나 죽음의 순간 수차례. 죽을 고비, 타고난 기지로 넘기고 또 넘겼다. 아이 낳고 사흘만에 물질 나갔던 억척 제주여자. 사람들이 붙여준 북촌리 변호사, 북촌리 말쟁이, 현 칼라, 신문기자 할머니 현덕선. 당차게 근현대사를 살아낸 상군잠수. 여든넷. 그녀를 만났다. 지난 22일 제63주년 제주4·3 북촌리희생자합동위령제에서였다. 삶? 시시하게 소설 몇 권이 뭔가.

 1928년 북촌리 출생. 열한살부터 물질을 시작해 83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
 스물한 살에 4·3겪고 난시빌레서 23명의 민보단 학살 때 오빠 희생, 1949년 1월17일 북촌대학살에 동생, 조카 둘 보냈다.
 열일곱에 결혼했으나 남편은 목포로 떠나고 4·3을 만났다. 나중 남편과 재회, 열 명의 자식을 낳고 셋을 일찍 보내고 일곱을 키웠다. 친정 아홉가족 가운데 그녀 혼자 남았다.
 "좋은시대 돌아와 대통령이 사과를 해주셨기 때문에 4·3도 자유를 찾은 거지." 항상 108세까지 사셨던 할머니의 말씀,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라"를 떠올리며 산다. 2010년 4·3장한어머니상을 받았다.
 정성껏 젯상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팔십평생 4·3일엔 빠지지 않는다. 그 절은 멸족된 가족, 후손 없는 이들을 위한 비원이다. "절허는 것은 자손 있는 사람들 보단 물도 굶는 사람들 한테 해요. 우리 윗집은 아무도 어서. 장선이 족은년, 현덕선이 왓수다. 불쌍헌 어른들, 자식없단 생각허지 말앙 이 자리 오셔야 될거우다. 난 그 정신으로 가요. 자식 없는 분들 한테는 합동위령제 잘한다고 생각해요. 이젠 4·3공원 위령제 가도 울어지기만 허곡."

 혹시나 북촌사람 영혼이 있다면 꼭 그녀를 부를 것만 같다. "이 족은년아, 족은년아 할것만 같아." 음력 섣달 열여드레 북촌마을 집집마다 불밝히는 제삿날, 한밤중 자식 없이 죽은 사람 올레에 가면 막 눈물이 나온다. 이제 두려운 게 어디 있으랴. 스물하나에 참혹한 현장을 겪고 겪었으니. 그동안 동네분들 염하러도 숱하게 다녔다. 행상소리, 달구소리도 잘한다.

 "시대를 잘못 만나 그렇지. 난 정치를 하고 싶어. 정치가 잘못됐어. 왜 마을을 지키던 사람들마저 군인들이 총을 쏘았느냐 말이야. 정치하는 사람들한테 묻고 싶어." 

 # 난시빌레, 북촌대학살 그 역사의 증언

 그날이었다. 온가족이 풍비박산 된 것은. 1948년 동짓달 열엿새. 민보단이었던 오빠는 난시빌레서 23명과 함께 죄없이 스러졌다. 그해 6월 우도에서 경찰관을 실은 배가 제주시로 오다 2명이 희생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군경은 범인색출을 명분으로 매일같이 탄압한것. "민보단 27명 가운데 세명은 마을에 먼저 내리게 했어. 마침 내가 그때 작업하다 봤어. 차가 간 길로 막 달려갔어. 우리 언니는 너 가다가 죽는다 해도. 군인도 산사람도 무서울때니까. 꿩동산을 내려가는데 군인차가 와요. 어떤 군인들은 바당쪽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고, 어떤 놈들은 총을 이렇게 둘러매서 웃어. 난 막 뛰었어. 무조건 죄없는 사람 죽였다 허는거지. 보초병이 있어. 여기서 사람 실어가 어디강 죽였느냐했어." 가리키는 쪽으로 달려갔다. 난시빌레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스물네명 죽은 이 가운데 한 명 살아났어. 일렬로 앉혀서 죽은 거야. 조를 베다가 그 대를 좀 남겨 놓는데 그것을 손으로 얼마나 붙잡아 몸부림 쳤던지…. 삭망 먹으러 간다고 베 두건을 쓰고 갔기 때문에 두건 쓴 게 보여. 오빠! 하면서 일으키려니까 가슴이 따뜻했어. 한 사람이 꼬물거려. 고무신 벗언 오줌 싸서 그걸 멕이니까 그 사람이 살았어. 어귓담 넘어서 세 살 위 언니랑 둘이서 들쳐 업고 달렸지. 집 마당에 오니 검은 고무신이 질퍽했다. 오빠의 가슴에서 쏟아진 피가 검은 고무신 안에 핏물이 내려 온 것. 얼굴에 핏독이 아직도 있어. 결국 오빠는 숨을 거뒀다.

 난시빌레 학살 한달 후 1949년 1월17일 하루 300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학살의 '북촌사건'. 동생은 현장에서 총머리판으로 맞아 한달 후 함덕에서 세상 떴다. 일곱 살 조카 둘도 학살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친정에 자손이 없어 12촌에 넘겼다. "민보단 가족이니까 한쪽으로 밀렸어요. 안그러면 전멸할 뻔했어요."

 그날 바로 그녀가 목격한 장면 둘. "다다다다 총소리 두 번이 나요. 이 줄은 우리 앉고, 옆 줄에 엄마가 죽으니 세 살배기쯤 되는 애기가 그 젖을 먹어. 어머님 사촌이라. 민보단보고 저 아이를 떼어버려라고 했어요. 또 애깃배를 맞추려고 나간 육지출신 여자가 있었어. 애기 곧 날 사람이었는데 아랫 돌담에 엎어져 사흘동안 살았다고 하더라고. 불 다 붙언  우리동네 두 집 남아서. 네 번 다섯 번째 나가면 북촌사람 다 쓸어버릴건디 지프차가 달려오면서 중지! 명령이 떨어진거야."

 # 전남방직서 일하다 6·25만나 죽을 고비

 북촌사건 몇 개월후, 세 살 위 언니와 육지로 떠났다. "북촌 있으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 떠나라고 했어. 물질하고 오징어사고 날 멜사고 청각사고 잘 말려서 60근 등짐지고 전북 줄포로."

 우여곡절 끝에 전남방직에 들어갔다. 한달의 교육 끝에 맡겨진 일은 광목짜는 일. "당시 전남방직에는 미국서 들여오는 목화가 산더미같이 있었어요." 한 기계에서 광목 두필씩 짜냈다. 그녀는 광목을 잘 짜는 선수였다. 한달에 1만5000원 월급이었으나 같은 동료한테 빌려 주었다가 날리고 귀향. "4월 말 보리 검질메려니 놀아난 손이라 손이 아파. 흙은 딱딱하고 일이 힘들었어. 삼일만에 다시 방직공장 가겠다고 가버렸어." 다시 공장 행. 아침 먹고 3교대. 3800명 직원 중 말 잘한다고 뽑혀 당시 방직과 관련한 한 국회의원 유세에 나가 광목 한 필 받기도 했다. "이름도 가명으로 썼어, 제주도 하면 4·3사건 후여서 전부 빨치산으로 볼때니까. 내색을 하지 않았지."

 허나 두달 만에 한국전쟁! 우왕좌왕 하다가 인민군에 잡혔다. 인민군 여자 군인이 취조했다. 기지를 발휘해 살아났다. "내가 친족집에 옷 보따리 갖고 오겠다 해서 도망친거지. 방직공장은 광목이고 돈이고 전부 팽겨쳐진 채로 폐허가 돼버렸어." 누군가 그녀를 제주도 빨치산이라고 밀고, 포클레인으로 거대하게 파헤쳐진 구덩이에 파묻힐 뻔한 상황도 만났다. 허나 극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살아났다. 겨우겨우 목포서 옹기실은 마구리선을 타고 제주도로 왔다.

 # 공출 못한 벌로 오빠가 소라껍질 위 고문당해

 "왜정시대 공출헌 말 허지도 맙서. 우리 오빠는 반장이고. 우리 공출내곡 고시락 놨단 그 속에 열 가마니쌀을 놔. 면 서기들이 왕 콱콱 찔러. 그것도 다 앗아가불곡. 우리 반에 열한집이 한반이었어. 한사람이 공출 못냈어. 우리 오빨 데려다 판자 놓안 구젱기(소라) 딱살 놓고는 무릎 꿇어앉이렌. 우리 오빠가 다 죽는 거 아냐. 껍데기가 칵칵 찔러부난 피가 막 나."

 한번은 일본군들이 말을 타고 집 마당에 들어왔다. 밥을 좀 달라고. 대신 그들은 부스럼약을 줬다. 성산가다 배고파 들어온 군인들이었다. "일제말기엔 서우봉앞으로 공습 들엄젠 발발 떨어나곡. 말도 맙서."

 # 아기낳고 사흘만에 물질, 칠남매 키워

 바다가 좋았다. 물질은 열한 살부터. 농사일 잘하던 함덕출신 어머닌 물질을 못했다. 조·보리 농사하던 집안은 넉넉했다. 아버진 일찍 생을 마쳤으나 그녀는 호강하면서 자란 아이. "헤엄만 치러 갔지. 일곱 살부터 집 지키라허면 바당에 강 막 물 알러레만(물밑으로만) 돌아댕기곡 우리 성은 밭일허레만 댕기곡. 할머닌 물질 헐 사람은 물질을 잘 해야 헌다했어." 달여도에 테우 타고 가 선배들은 미역하면 그녀 망시리에 가득 채워주곤 했다.

 해방직후, 동갑나기 동네 남자와 열일곱에 억지 결혼. 일본서 살다 온 남편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남편은 홀로 목포로 떠났고, 그녀 홀로 여전히 용띠 처녀들과 어울려 지내다 그 난리, 4·3이 덮친 것. 남편과 목포에서 다시 만난 것은 스물 넷. 그때부터 애기가 생겼다. 딸을 임신하고 남편과 귀향. "10년 동안에 열을 낳았어. 뱃속에서 발길질 소리 나면 아기가 생겼구나 했고, 베개를 누르고 혼자 애기를 낳았주." 어려서부터 적극적이던 그녀, 아이들의 미래까지 생각하며 계획적으로 물질했다.

 108세까지 사셨던 할머니가 그랬다. 산쪽에 집 4만원, 바닷가 집 5만원할 때. "산은 보리하고 조를 하니까 끼니만 하지만 바닷가집은 일년 열두달 듬북도 나오고, 해산물이 나오니 너는 농사를 짓지 말라." 농사는 자본이 들어간다. 바다는 자본이 들어가지 않는다. 어떻게든 네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남편이 월급 1만5000원 타오면 고팡 흙에다 그 돈을 붙여놓고 난 물질했어. 넷째 낳고 사흘만에 광목으로 만든 소중기 입고 물질 하러 가니 뼈나 허리가 남아나겠어요? 신랑은 못하게 했는데 살 길이 없어. 올망졸망 밥만 도렌허고. 여섯시되면 밭에 가서 검질매고 일곱시되면 바당에 가요. 이보다 더 눈이 올때 검질 맬때 애기가 양말도 안 신엉 업었는데 발로 나를 막 때려. 눈물만 나지. 내가 눈 어두우니까 애기들은 다 공부를 시켜야한다해서." 돈벌러 일본 에도 갔던 남편은 예순에 세상 떴다. 남편도 힘든 생이었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는 거지요. 여든넷 날 때까지."

 북촌바당으로 파도가 헤득헤득하다. "지금도 달여도 어느 돌고망에 구젱기(소라)가 붙어있는지, 문어가 어디 있는지 눈에 훤허여. 허리만 덜 아프면 가서 잡을건데." 얼마전까지 북촌리 최고령 상군잠수 현덕선. 눈발 퍼뜩이는 달여도를 바라보며 그런다. 돌아보면 아득한 세월이 저 멀리 있다. 그렇게 걸어온 역사적 경험의 힘이 저 작은 몸의 그녀를 단련시킨걸까. 또랑또랑한 목청, 또렷한 기억, 쉴 새없는 몸놀림이 성성하다. 그녀 마당가의 눈맞은 퍼대기 배추처럼. 그녀가 지고 다녔던 오래된 지게, 딸 하나에 아들여섯 키워준 뒤웅박이 그녀의 문간을 지키고 있다. 흑백풍경처럼. 팽나무 올레지나 꽁꽁 여민 초가지붕, 그 문 안에 그녀가 있다. 북촌 파도 타넘던 작지만 강한 제주여자 현덕선, 그녀가 산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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