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6. 천연염색가 장현승

천연작업·수작업만 하던 일본인 스승, 늘 자연스러움을 강조
감물과 먹물은 화산섬의 속살색이자 제주 전통을 잇는 기본색


   
 
  장현승 근영  
 
# 의복은 환경의 산물


의복은 인류 문화의 한 발달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의복의 창제자는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황제 이전에 의복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황제 때부터 사회적 제도가 되어 의복이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국 고대에 의복을 만든 주요 재료는 삼(麻, ma)과 양잠에서 뽑아낸 명주실(絲, si)이었다. 삼베(布)와 비단(帛)은 가치가 달라서 왕실·귀족들은 비단옷을 입었지만 서민들은 삼베옷이나 거친 털옷을 입었다. 그러나 서민이라도 나이가 들면 비단옷을 입을 수 있었다.

초기의 인류는 머리칼로 차가운 바람과 추위에 적응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의복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기후의 영향에 기인한다. 실제로 의복은 추위를 피하고,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다. 물론 한대(寒帶) 지방에서는 의복이 추위를 막아주는 장치로서 기능하지만 열대지방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수가 있다. 기후에 따라 의복의 기능이 상이함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든 생산력이 높아지고 공동체가 점차 발달하면서 의복은 장식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나아가 계급성을 나타내는 상징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의복은 디자인, 색상, 재료 등의 특성을 통해 입는 사람의 신분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의 구조가 해체된 사회에서는 개인성과 상품성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산업사회에서의 의복은 부(富)의 기호가 된다. 일명 브랜드라는 것이 신분을 대체하면서도 계급을 차별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어쩌면 의복은 오늘날 '옷이 날개'라는 이름으로 널리 실용화 되고 있으나, 이는 실제 의복의 기능성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성의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의복은 한 사회 구조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의 디자이너들은 동시대 사회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안에 사는 예술가들 모두가 자본주의적이지는 않다. 다만, 언제라도 자본주의 체계에 속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이다.

   
 
  장현승이 염색하고 디자인한 옷  
 
# 틀을 깨는 것이 나의 자유


자연과 같이 사는 사람, 자연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장현승(1951~  )이다. 곶에 자리한 한 그루 나무인가. 자왈 속 한 줄기 야생초인가. 숨어 작업만 하는 그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에 조금만 마음을 돌리면 우리 곁에 있는 그를 이내 발견할 수가 있다.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 어릴 적 기억은 내면화된다. 장현승은 어렸을 적, 자연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했지만 무작정 자연을 좋아하였다. 호미 한번 잡아본 적이 없지만, 딸 4명 중 꽃밭을 가꾸는 것은 언제나 장현승의 몫이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장현승은 그림 그리고, 천이 있으면 이리저리 자르고 해서 어머니에게 혼이 난 적도 있었다.

1981년 새 삶을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니까 도자기를 배우고 싶었다. 어느 날 도자기를 배우러 갔다가 염색을 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얘기에 마음이 솔깃하였다. 선생님을 만나보니 작업이 너무 좋았다. 도자기 대신 염색을 배우러 다녔다. 염색 작업에 몰두하였다. 외국생활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염색 작업으로 달랬는지 모른다.

2003년 일본에서 염색 공부를 계속하던 중,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서둘러 귀국하였다. 좀 더 공부하고 싶었지만, 당시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병간호가 우선이었다. 어머니가 방 안에서 휠체어를 타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둥근 집을 지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200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일본의 나카가와 키요미(中川淸美) 스승도 한달 차이로 돌아가셨다. 후에 일본에 다녀왔지만, 스승이 돌아가셨을 당시 일본에 가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린다.

2004년부터 일본에서의 기억을 하나씩 더듬어가면서 염색을 다시 시작하였다. 나카가와 키요미 스승은 인위적인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스승은 늘 천연작업, 수작업만 하였다. 자연은 항상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장현승은 취미로 염색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스승은 그에게 '너는 할 수 있다'고 늘 격려해 주었다. 스승과 수제자라기보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느껴지는 관계였다. 스승은 작업에 대해 전혀 숨기는 것이 없었으나,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직접 자신의 작업을 보라고 할 뿐이다. 눈으로 보고 작업을 하다 보니 스승이 하던 색이 그대로 나왔다.

2010년 5월, 서울 공예갤러리 나눔에서 장현승은 처음으로 제주옷 전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자연이 좋아 길을 나섰고, 그 길 위에서 색을 만났으며, 색이 좋아 옷을 지어,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라고 하면서 제주 천연염색의 가치를 널리 알렸다.

2010년 코엑스에서 열린 제8회 티월드 페스티벌(TEA WORLD FESTIVAL) 때 장현승의 패션쇼를 인터넷으로 보고 경상북도 구미의 모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옷을 2벌 주문하였다. 앞으로 장현승의 옷을 수집한다고 하였다. 또 외국연수 때 입고갈 옷을 주문하며, 외국에 가서 소개하고 싶다고 하였다. 장현승이 염색 작업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0년 11월 말, 한국패션대전 부문에서 염색을 담당하였다. 원단에 직접 그림을 그렸는데 평가 결과가 좋았다. 사람들이 명품화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때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직접 모델이 되었다. 

장현승은 죽는 날까지 염색작업을 할 것이다. 작업공간만 있으면 그는 제일 행복하다. 염색은 반복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없는 반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마음과 일치하는 색이나 원하는 질감의 느낌이 나올 때까지 그는 손을 놓지 않는다. 햇볕은 지친 그에게 의욕을 주는 스승이다. 모든 색의 근원은 빛이다. 빛은 만물에 생기와 활력을 준다. 빛 없이는 색도 없다. 많은 자연의 색 가운데 감물과 먹물을 특히 좋아하는 장현승. 감물과 먹물은 화산섬의 속살색이자 제주의 전통을 잇는 기본색이다.

염색은 천이 기본이다. 다시 천의 기본은 면이다. 장현승은 개인적으로 삼베와 명주를 제일 좋아한다. 염색은 의상 디자인을 위한 기본단계이지만, 색채가 옷을 좌우하고 영감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신중하게 작업을 한다. 어쩌면 염색의 결과에 따라 벌써 의상의 기본이 정해지는지도 모른다. 의상 디자인은 기모노의 선과 인도 옷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의 옷에서는 오름이나 초가의 선들도 무의식적으로 살아난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옷을 추구하는 장현승은 자신이 입어서 편하고 자유로운 옷이야말로 진정한 옷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장현승은 외로울 때면 염색을 한다. 외로움은 곧, 아름다운 자연의 색으로 승화된다. 편안하고 행복을 주는 자연을 자기화하며 온몸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장현승은 염색을 할때면 왠지 힘이 솟는다. 자신의 염색과 의상에 대해서는 언제나 당당하다. 그는 누누이 강조한다. "자연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선, 색, 형태가 자연스러워야 한다. 옷은 나다. 입는 사람 그 자체이다."라고.

그의 목표는 이 세상에 한 가지 색, 한 가지 디자인만의 옷을 만드는 것이다. 옷에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자연 자체의 순수함을 옮겨오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공방 한 켠에 쌓아놓은 염색천들  
 
# 아름다운 제주 자연


인간은 자연을 그리워한다. 아니 자연과 만나면 평온함을 느낀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증거이다.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려는 오류가 지속되는 한, 인간은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장현승은 자연에서 보고 느끼는대로의 색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용눈이 오름, 김녕바다, 들녘의 빛깔 등 제주의 자연이 아름답다는 생각만 한다. 외로운 하늘도 결국은 아름답다.

일본에서 채취하는 염재(染材)와 제주에서 채취하는 염재는 같은 소재라 해도 색이 다르다. 같은 억새나 참나무라도 제주의 염재가 색이 훨씬 진하다. 제주색은 톤이 강하다. 풍토가 다른 만큼 색도 강한 것이 제주의 염재이다. 염색은 반복의 예술이다. 새로운 색을 내고 싶을 때는 제주 바다를 찾고, 오름에 오른다. 뽕잎, 참나무잎, 애덕나무 등 제주 자연에는 염재가 무궁무진하다. 자연의 색의 변화를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흔히들 염색을 '물들인다'라고 하지만, 장현승은 '천위에 그림을 그린다'라는 기분으로 염색을 한다.

제주도는 돌과 돌담이 매우 인상적인 섬이다. 돌에는 모든 자연의 색이 녹아들어 있다. 각각의 색을 띤 돌을 하나씩 주워 모으는 작업은 고되지만 즐거운 일이다. 거친 현무암에는 제주만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색이 스며들어 있고, 정감 있는 질감이 나타난다. 돌담으로 이어지는 경관은 제주의 자연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장현승의 색은 돌이 되기고 하고, 돌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돌 속에 흡수되는 색은 자연 어디에 두어도 어색하지 않다. 돌에 대한 표현, 저녁바다의 색, 저녁하늘빛, 밭과 밭 사이의 돌담의 색이 배어나는 것은 그가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현승은 자연이라는 염재로 조금씩 자신을 물들이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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