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8. 아티스트 백경숙

제주에 체류, 해녀들과 함께 자맥질 하며 그들의 일상을 기록
예술은 예술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참 나(我)'를 찾아가는 길


   
 
  백경숙 근영  
 
# 일상의 잔잔한 삶의 모습


누군가의 진실한 삶을 담는다는 것은 삶의 진실 된 표현의 문제와 연관된다. 삶의 진실 된 표현이란 꾸밈없이 생생하게 존재하는 현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즉 대상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대상이 의식하지 않는 순간, 그들의 삶의 세계를 포착하는 것이다. 일상의 잔잔한 삶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냥 스쳐가는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누가 눈여겨 보아주지 않아도 삶은 그저 그렇게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그 흔한 일상의 한 부분에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그 일상의 삶은 문화적인 상징성을 띠게 된다. 다시 그 상징성은 시대적인 공간의 기록으로 남겨진다. 사람들은 한 시대의 상징적인 기록들을 통해서 어떤 것에 대한 가치들을 음미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무심하게 흘러가던 일상이 상징적인 담론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터전이다. 일상은 모든 문화의 생성지이자 소통의 공간으로서 당대의 기층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기층문화는 민중의 진한 삶의 향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이미 사라져버린 문화의 소산인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화의 모습인지가 중요해 진다. 문화는 동시대의 산업과 매우 밀접하다. 산업이 발달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문화가 정착하거나 반대로 산업이 쇠퇴함에 따라 문화 또한 함께 소멸하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생성되었던 문화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차 잔여문화로 남겨지다가 결국에는 소멸된다. 볼거리로서의 굿 문화가 사라지는 대신 TV나 영화는 늘 흥행의 경계선에 서 있다. 흥행은 곧 자본이 되며 그것과 관련된 문화적 파장은 다시 상품 시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상의 문화는 크게 남성 문화와 여성문화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의 대표적인 여성문화는 바로 해녀(녀, 潛女)문화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다른 전통 문화와 마찬가지로 소멸되는 문화의 끝자락에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녀문화는 제주의 여성문화를 상징하고 있다.

   
 
  성게 까는 해녀  
 
# 해녀, 그 삶의 깊이를 찍다


소리 소문 없이 제주의 해녀를 사랑하는 예술가가 있다. 백경숙(1962~ ). 해녀에게서 영적(靈的)인 기운을 느낀다는 그는 제주 해녀를 보면 아마존의 여인들을 떠올린다. 그에게는 제주 해녀가 살아있는 신화다. 백경숙은 해녀에게서 섬세하면서도 동물적인 본성이 느껴진다고 하였다. 그것은 야성적(野性的)인 활력을 주는 삶의 생기(生氣)를 말함이리라. 조직과 제도, 법에 얽매이는 문명사회에서는 생존 본능이 약화된다. 그러나 자연을 늘 대면하며 바다를 등지고 살아가는 해녀들은 언어, 감정 표현 등이 자유롭고 거침없이 당당하다.

제주의 여성들을 보고 제주도를 아마존의 모계사회에 비유한 사람은 고종 황제의 고문관 윌리엄 프랭클린 샌즈(山島, William Franklin sands, 1811~1883)였다. 그는 제주의 여성들을 만능인이자 집안의 가장(家長)으로, 그리고 모든 재산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제주의 해녀들은 가사노동에서 밭일, 물일 모두를 거뜬하게 처리한다. 부지런한 만큼 경제적인 자립심도 강하다.

바다에서 자연물을 채취하는 것으로만 보면 분명 원시적 어로행위와 다를 바 없다. 비록 전근대적인 생산 활동이지만 해녀들은 자연의 법칙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바다를 알기 때문에 바다에 갈 날과 가지 않는 날을 지킨다. 갈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에도 터부가 있다. 그들은 바다와 한 몸으로 살면서 바다의 소리, 물빛, 물속의 변화를 주시한다. 해녀들은 바다가 알려주는 자연의 신호체계에 순응하며 자신의 생명과 삶을 영위해 나간다. 바다의 신을 믿고 의지하며 신화를 생성해낸다. 험하고 고된 삶의 끝자락에 있는 이어도를 꿈꾸며 초월적인 삶을 꾸려나간다.

백경숙이 제주 해녀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87년 관광차 제주에 들렀을 때였다. 중문 관광단지에 머물면서 해산물 파는 해녀의 깊은 인상을 가슴에 묻고 이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순수예술(fine art)을 전공하면서 사진, 조각, 회화 모두를 다루었다. 그는 특정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다. 사진, 도자기, 그림이든 그런 장르들은 예술적 개념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경숙은 학기 중에도 해녀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위해 미국에서 제주를 찾았다. 1992년에 서귀포 하효동에서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외지인을 경계하면서 마음을 열어주지 않던 해녀들과 시간의 흐름을 타며 하나가 되어갔다. 자연스러운 관계는 생생한 사진으로 되살아났다. 제주해녀는 서서히 그의 어머니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는 2002년까지 미국과 제주를 오가며 해녀의 삶을 찍었다. 1년에 1~2회 제주를 찾았고,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 정도 체류하면서 해녀들과 함께 자맥질을 하며 그들의 일상을 기록하였다. 백경숙은 하효, 고산, 남원, 위미, 우도, 강정, 법환 등에서 주로 작업을 하였다. 그는 결코 연출을 하지 않았다. 삶의 진실 된 모습들을 미화시킬 수가 없었다. 서귀포 위미의 해녀들과 문섬에서 톳 작업을 위해 2박 3일 머무는 동안, 원시적 생활을 하면서도 자외선 차단을 위해 화장을 하던 신기한 해녀들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도에서는 주로 불턱을 찍었다. 불턱에는 인류 태초의 삶의 모습이 남아있는 듯하다. 물때를 기다리거나 물질한 후에 불을 피워 놓고 추운 몸을 녹이는 장소 불턱. 온갖 화제와 노래, 공론이 오가는 장소로서 노동의 결실을 갈무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혹은 자식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오래된 습성 때문일까? 해녀들의 말처럼 물질은 칠성판을 등에 지고 저승에 가는 일과 같이 위험한 일인데도 그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그 힘은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이유로 형성된 문화적 유전인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불턱  
 
# 백경숙의 미학


백경숙에게 다큐멘터리는 일상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것이다. 바로 살아있는 기록이자 생생한 삶을 건져내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의 미학이다. 예술가와 일반인의 차이는 관찰의 깊이에 있다. 관찰은 관심을 넘어서서 대상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심은 그것을 사랑하는 시발점이 된다. 예술가는 우리의 일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문화, 자연, 역사 등의 주요한 요소들에 접근하여 자신의 작품으로 그것들을 솔직하고 용기 있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술가 백경숙의 지론(至論)이다.

예술이란 예술가 자신이 궁극적으로 '참 나(我)'를 찾아가는 길이다. 사진이 갖고 있는 최선의 본질은 꾸밈없는 기록이다. 특히 백경숙의 '제주해녀' 작업과 같은 다큐멘터리는 해녀들의 삶의 기록에 충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또한 필수적인 것은 작가가 관심을 갖는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표현보다 앞서야 된다는 것이다.

'제주해녀'는 백경숙에게 삶의 스승이자 신화 속의 여인들이었다. 해녀들의 주된 일상은 바다에서 이루어진다. 해녀는 매우 희귀한 그들만의 문화를 보유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문화는 어떤 문명의 문화와도 다르게 매우 독특한 직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진가들은 어제도, 오늘도 해녀를 찍는다. 여성의 몸으로 시커먼 바다에 뛰어드는 기막힌 행동만 가지고서도 대단한 소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칫 소재주의로 해녀를 보게 되면 그들의 진실 된 삶은 보이지 않고 해녀의 외형과 동작만 보일 뿐이다. 우리가 현실주의(realism)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진실 된 삶의 실체에 다가서기 위한 것이다.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미화시키는 예술이 아니라, 현실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 나아가 대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삶의 깊이를 이해하는 것, 솔직한 민중성을 획득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목표인 것이다.

백경숙은 제주 해녀들이야말로 완벽하리만치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당당하게 살아간다고 전한다. 그는 해녀들을 하나의 표현 대상으로만 보고 달려드는 사람들로부터 '제주해녀'가 흥정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정의'에 대한 물음에 중요성을 두고 작업을 해야 한다. 이는 '정의'를 모르면 '정의'를 작품에 담아낼 수 없는 이치이다. 삶의 진실을 미화와 왜곡으로 점철하지 않으려면 예술가 스스로 정의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모든 예술은 대상의 현실을 얼마나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자신이 성찰한 깊이를 궁극적으로 어떻게 표현했는가가 중요하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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