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시인 김명식

 그토록, 날카로운 바람이 뚫고 갔던 것은 분명하다. 젊은 날의 이 혁명 시인을. 아무도 하지 못할 때였으니, 그가 쳤다. 그는 건너뛸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다. 억압의 황량한 시대를 건너야하던 시기, 그는 늘 앞에 선 자였다. 유창한 언변가였다. 그로 인한 고문과 혹독한 옥살이. 시 한편으로도 3년. 갇힌 방에서 그렇게 흘러갔다. 수사였던 아름다운 청춘이. 재일동포 지문날인 거부, 재일동포들의 제주4·3 위령제도, 누구도 두려워하던 시절에 이뤄졌고, 제3세계를 이 땅에 알렸다. 죄라면 평화와 자유, 진실을 진실이라 말했다는 것. 오랜만에 강원도 선이골 맑은 기운을 입고 고향에 온, 이 울림글(시) 쓰는 이의 어조는 여전히 맑고,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고향 바닷바람 허허로이 맞으러 온 자처럼, 검은 두루마기 휘날리며. 이 땅이 배태한 따뜻한 혁명가, 시인 김명식. 그다.

 1944년 애월읍 하귀리 출생. 오현고·동국대 예수회 신학원, 선교교육원, 서강대서 철학·종교·신학·사상 등 공부. 일본 노동대학과 국제기독교 대학교대학원(ICU)에서 비교문화와 사회사상사, 비교언어 등 공부, AALARI(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연구원)를 설립 운영, 1987년부터 제3세계를 한국에 소개. 1976년 장시 '십장의 역사연구'발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3년 징역형. 1990년 전민련 국제협력위원장 역임. 범민련 결성 및 「제주4·3민중항쟁 자료집」 발간.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옥고. 4·3시집 「유채꽃 한아름 안아들고」 「한락산」 「사랑의 깊이」까지 20여권. 한글관련 「나랏말미 가림다 한글」(전 4권, 홍익재 영인본), 번역서 「해방신학」 등 다수. 현재 강원도 화천군 선이골에서 가림다한글마을학교를 열어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우리 말 우리 글 연구·보급과 울림글(시), 묵상에 전념하고 있다.
 '흐르는 물이 결코 얼지 않듯이/ 흘러야 합니다 거침없이/여울이 그러하듯이/사랑도 쉬임없이 흘러야 합니다' ('흐르는 물이듯이' 중). 그는 물처럼 한결 깊고, 부드러워진걸까. 얼마전 고향에서 나온 시집 「사랑의 깊이」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하나씩 하나씩 옮겨지는 상한 육신/메밀 쌀죽으로 원기를 돋우고/통증과 불안 가시고 나면/비로소 깊은 잠 잘 수 있었던/한락산 허리에는 물매화/해질녘까지 피어난다'('물매화' 중). 4·3연작을 통해 스러져간 영혼들을 뜨겁게 위무해온 시인은 이제 선이골 깊은 골짜구니에서 자연(제물)의 깊이를 체득한다. 그 예리하던 시인은 분명 금방 도 닦다 나온 도인의 풍모. 허나 당당하고 치열해지고 더 근본적이어야 한다는 맥락에선 한치 흔들림 없이 가고 있었다. 단지 도시에서 선이골로 옮아갔을 뿐. 그는, 분명 젊은날의 혁명 시인 김명식이다. 많은 시간을 옥에서 흘러보냈던 그다.

 # 옥에서 문익환 목사와 시 읽으며 교류

 문익환 목사와의 교류도 그 3년간의 옥살이에서였다. 공교롭게 벽하나 사이를 두고 문 목사가 있었다. "목사님 시 하나 읽어볼게요." "김수사, 기가막힌 시를 썼어. 들어봐." 3년동안 교류를 한거야. 목사님은 '꿈을 비는 마음'같은, 상당히 서정적이고 예쁜 시를 썼어. 그렇게 자상하게 가르쳐주시더라고. 그렇게 돌아가실 때까지 교류가 지속되고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게 되고. 옥에서 할 일이 없으니까 번역을 하고, 우리말 공부를 하고, 시를 쓰고 한 게 계속된 거지." 문 목사와의 만남은 민족문제로 들어가는 계기가 됐다. "연설문 쓰고 신문에 기고 하고. 이런 생활로 야전투사, 길거리 투사로 살면서 젊음이 가는 거지요."

 공식적인 행사에서 그의 모습이 안보이게 된 때는 1998년 4·3국제심포지엄을 한 이후다. 창을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알았기 때문. "이제는 녹이는 쪽으로 가야 된다. 저 예리한 창끝, 골갱이(호미)도 전부 녹여서 우리가 원하는 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 국면이 온거라." 모든 아픔과 슬픔과 어려움과 예리함과 칼끝같은 이런 것들을 다 녹일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 재일동포 40주년 4·3위령제 열어

 '4·3시인' 김명식. 1948년은 어린 네 살의 그를 덮쳤다. 그에게도 꽂혀있는 칼날 같은 기억. "하귀에서 피난을 가요. 사촌 형제들이 4·3때 다 죽고 아버지도 죽고, 셋아버지는 일본으로 피신하고, 큰 형은 육지로 도망가고, 이런 와중에 우리 식구만 남아 있었어요. 상귀리에 피난 간 때부터가 나의 4·3의 원체험이었어요. 총소리도 죽이는 모습도 총맞아 절뚝거리는 모습도 봤어요." 그 기억의 뼈는 그를 고교시절 골방에서 4·3소설 쓰는 문학소년으로 만들었다.

 일본 동경 유학시절이었다. 재일동포들에게 4·3위령제 계획을 밝힌 것은. 반응은 뜻밖이었다. "우리 4·3에서 쫓겨온 사람들인데 4·3? 뭐허젠?" 서울과 제주도와 동경과 3자 공동 위령제를 계획하고 있다 했다. 하여 동경에서 조직을 해야한다 했더니 충격에 기절할 뻔했다 한다. "나중에 들어보니. 본국에서 온 놈이, 돌아가면 죽는다고, 저는 각오를 하는데 여기선 잡혀서 죽진 않잖아." 소설가 김석범 선생이 이때 나서줬다.

 "1988년 일본에서의 4·3 40주년은 굉장히 신났죠. 우리도 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이쪽에서도 연대가 되고. 그 국면에 김 선생이 한국에 올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해요." 무엇보다 일본에서의 추모제는 많은 의미를 내포했다. 결국 '일본에서도'라는 '도' 자를 얻어낸 것. "그러면 제주에서도 서울에서도 엮어갈 수 있잖아요. '도'자 하나를 얻어내기 위해서 엄청난 모험을 했다고 할까." 이것이 도화선이 돼 일본학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 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4·3강연에서는 일본 교과서 첫 페이지에 쓰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30명의 일본 교사들이 나와서 악수를 청하면서, 4·3을 저희들이 일본교과서 근현대사의 첫 페이지로 쓴다고 했고, 그들은 그 약속을 지켰어요. 멀리 있으니까 4·3을 그리는 시각이 생기는 거라. 제주도의 경우는 법률적 개정하고  투쟁적 자기입장하고 죽은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서 싸운 것인지 아직 정리도 안된것 같습니다."

 # 그가 찾은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우리글

 대체 시란 무엇인가? 맹렬하게 시를 쓰다보니 물음이 왔다. 이쪽 저쪽 작가들에 던졌다.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국어사전 다 찾아봤는데 아무도 시를 번역한 사람이 없어. 어떤 책을 보니까 시는 곧 울림글이라고 돼 있어. 시인이란 뭐냐. 울림글 쓴 이야. 제 시에는 한자가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다 한글입니다. '자연'하면 우리말로 찾지 못하다가 '제물'이란 말로 찾았어요. 평화란 말은 찾지 못했지만 쓸 수는 있어. '고른 살림살이'란 말로."

 그가 찾은 단군시대 가림다 한글이라니? "'가려져 있다'란 뜻이죠. 스물세가지 뜻이 있어. 기역을 풀어보면 다 나와. 단군시대에 이미 가림다 한글이 38자가 나왔다는게. 그 작업을 하는 거죠.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전의 얼과 뜻을 찾아서 가지런히 정리하고 학습을 하고. 대중화 작업을 해야하는 거죠. 왜 기역인가? 기역은 국어 사전에도 못풀어요. 질문하는 이도 없고, 답한 학자도 없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기역의 뜻은 하늘의 뜻대로 산다는 말이라. 어떻게 사는 거냐. 그냥, 그대로. 우리 제주도 사람이 유리한 게 원래적 우리 말이 많이 살아있기 때문에 유리한거라. 산스크리스트어까지 찾았죠. 이런 말을 찾아 오는데 30년 걸렸어. 팔만대장경이 있다면 저는 십만대장경 한글판을 만들 준비를 하는 거지요."

 # 자유와 창의 대안교육으로 아이들 키워

 우여곡절, 인연 닿은 선이골. 도 닦으러 들어갔냐고 할 만한 곳이었다. "일년동안 나무만 잘랐어요. 3년 베니 논자리가 보여. 그 대지에 씨를 뿌렸더니 이삭이 나왔어. 이거다. 그래서 오늘까지 견뎌온 거야. 지금도 미쳤나 하는 수준이요." 허나 10년동안 굽을 봤다. 맨몸으로. 선이골 12년간의 중간보고란다.

 엄마를 먼저 잃은 아픔속에서도 다섯 아이들은 씨앗처럼 영글어갔다. 아이들은 그보다 더 농사를 잘 짓는단다. 선택적으로 제도교육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이제 대안교육 선생이다. 자연의학연구소, 우리씨앗배움터, 하늘소 동산 등 자기들이 학교를 만들었다. "자유와 창의를 어린시절부터 교육하고 국사 수학 천문학까지. 하고자하면 속도가 빠르잖아요. 교육이 초등 3년, 중·고 3년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18, 19세 되면 선이골에선 전공에 들어가요. 생활 자체로 들어가면 교육 성과가 빨라지고 능률이 높아져요. 우리가 고구마를 심으려면 고구마에 대해서는 똑같은 정보를 얻어야 해요. 그러니까 정보의 평준화가 돼요. 유리한 거죠. 우리 교육계에 어느 시점이 되면 이런 교육도 가능하다는 것을 제안하고 싶어요."

 # 4·3공원은 채워야 할 집을 지은 것

 "4·3공원은 채워야 할 집을 지었다고 봐요.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집을 지었는데 이제 거기 가득 채워야 할 일만 남았구나. 저 공원은 엄청난데 부족해요. 우리가 앞으로 디자인도 해야 하고 채워야 하고. 백년지대계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해요. 역사가 흘러온 만큼 기다릴 줄 알아야 해요. 2011년을 4·3정신을 발굴하는 원년으로 삼았으면 제안하고 싶어요."

 그가 짚는 첫째 과제는 4·3 정신 부분이 다듬어져 있지 않다는 것. "서로 상생 상생하는 한자로 쓰지 말고 '우리 제주도 살리젠 해서', '우리 삼촌 살리젠 해서', 살림의 문화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시고, 소설이고, 그림이고, 노래가 아닌가. 그냥 죽은 사람을 위령하자 그거야 좋은 일이죠. 이런 일을 위해 싸웠는데 이건 실패했고, 이렇게 하면서 상승시켜줘야 역사가 발전하지요. 따뜻한 혁명을 하려면 살림의 문화의 토대 위에서 품어줄 가슴이 필요합니다. 그게 4·3의 해원이라고 봐요. 다 제사장이 돼야 해요. 그렇게 품어주는 사람이 생기면 굉장한 에너지가 되죠."

 어린날, 어머니는 '동녕바치'가 오면 항상 같이 밥을 먹었고, 같이 잤다. 주워서 입는 나눔만 있어도 이 세상은 평화가 무르익어갈 거라는 시인. 선이골에 그가 심는건 진짜 식량이다. 사랑을 심는다. 혁명을 심는다. 고운 세상을 심는다. 얼마나 든든한가. 저 선이골에 낫과 호미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 사랑의 씨앗을 심는 한 굵게 사는 한 거인이 있다.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살아온 시인 김명식. 난분분 도두 파도 앞에서 그가 그런다. "40대와 50대는 40대와 50대 답게 피어나야 된다고 봐요. 태어나서 지금까지 품었던 그것이 전부 발현이 되지 못해서, 꽃이 피지 못해서, 열매를 맺지 못해서 남북이 싸우는 거지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