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제주바다를 건넌 예술가들] 79. 걸레스님 중광

   
 
  캔버스에 오일(100×80.3). 1989.  
 
자신의 표현 충동을 활화산처럼 발산했던 중광(重光)
장욱진과 붓, 연필, 매직, 색연필로 선문답식 그림 그려


# 예술, 아름다움 그 너머

무언가에 몰두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밭에서 곡식을 타작하는 농부, 훈련에 열중하고 있는 운동선수, 바다에서 자맥질하는 해녀(海女, 潛女), 글을 쓰는 문인, 실험실 안의 과학자, 병을 고치기 위해 숨을 고르는 의사 등등. 그만큼 우리가 주변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각양각색이다. 아이들의 천진함, 화단(花壇)에 핀 접시꽃, 바람에 서걱거리는 가을 수수도 아름답다. 그러한 아름다운 것들에 우리는 감동한다.

'아름다움', 즉 '미'를 느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 즉 경험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예술은 바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포함하는 그 무엇이다. 사실 전통적인 예술은 '재현(representation)' 혹은 '표현(expression)'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20세기 이전까지 예술은 재현적 양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20세기 이후는 표현적 양상이 그 자리를 대체하였다. 그러나 1917년에 발표된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과 1964년 엔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Brillo Box)>는 전통적인 예술 개념을 파기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 등장 이후, 예술은 의미를 띤 개념과 철학이 중요시 되고 예술 작품의 영역 또한 경계 없이 무한대로 확장되었다.

   
 
  중광스님  
 
# 욕쟁이 예술가 중광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삼천대천세계(三天大天世界)는/산산이 부서지고/나는 참으로 고독해서/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나는 걸레/남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탁주 한통 싣고/배를 띄워라/별이랑, 달이랑, 고기랑,/떼들이 모여들어/별들은 노래를 부르고/달들은 장구를 치오/고기들은 칼을 들어/고기회를 만드오./나는 탁주 한잔 꺾고서 덩실,/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나는 걸레 -<나는 걸레>전문-

중광의 속명(俗名)은 고창률(高昌律·1935~2002), 제주시 외도 출신. 중광의 소년시절과 청년시절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60년 25세 때 경남 양산(梁山) 통도사에서 김구하(金九河) 노사(老師)에게 득도(得道)하였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의 중광은 절 법규에 어긋난 행위로 인해 마침내 파계되어 절을 쫓겨나게 되었다. 중광은 1977년 조계종 중앙종회의원(中央宗會議員)을 지내기도 하였다. 1977년 영국 왕립아시아 학회에서 중광을 초대하여 선시(禪詩)와 선화(禪畵)를 발표케 하였다. 같은 해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관장은 "나도 중광 스님의 달마상과 시가 좋아서 신문에 세 번이나 발표하게 했다"라고 하였다. 1979년 미국 버클리 대학 동양학과장 랭카스터(Lewis. R.Lancaster) 교수가 《미친 중(The Mad Monk)》을 펴내면서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랭카스터 교수는 1983년에도 《더러운 걸레(The Dirty Mop)》라는 책을 다시 출판하였다.

1981년 미국에서 두 번의 초대전을 열었고, 이후 국내와 일본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85년 중광은《허튼 소리》를 상·하권으로 발행, 경인미술관에서는 도자기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이듬해 김수용 감독은 중광의 일대기 다룬 영화 <허튼 소리>를 찍었다. 아시아 국제영화제에 출품하여 우수 한국 영화로 선정되었다. 또 중광은 영화 <청송가는 길>(1990)에 출연하였다. 1989년 중광은 시인 구상(具常)과 함께 시화집 《유치찬란》을 출판했고, 같은 해 한국평론가협회로부터 최우수 예술상을 수상하였다.

중광이 세계의 주목을 받게 만든 것은 1990년 4월 미국공영방송(PBS)에서 중광의 예술세계를 방영한 것이었다. 같은 해 12월 24일 CNN-TV는 <헤드라인 월드 뉴스>로 중광의 예술세계를 다루었다. CNN-TV는 "중광은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예술가 중의 하나이며, 모든 규칙을 깬 파격적인 예술가다. 그러나 봉건적인 한국사회에서 기피당해 왔다. 미국에선 그의 진가를 인정했다…미국에선 그를 가리켜 한국의 피카소라고 부른다…그는 아직도 거지처럼 옷을 입고,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수십만 달러나 나가며 자신의 작품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중광은 또한 시인이다. 대중들은 그의 순수성을 사랑하지만 비평가들은 유치하다고 한다. 처음 화랑에서는 그가 정부를 비판하고 다녔기 때문에 전시하기를 꺼려했지만 지금은 존경받는 화가가 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이듬해 일본 NHK-TV에서는 <Asian Now>라는 제목으로 중광의 예술세계를 다시 조명하였다. "1970년대에 중광의 예술세계는 수많은 책과 논문의 주제가 되었고…가짜 그림이 나돌지만 본인은 작품 값이나 가짜 그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자기가 버는 돈은 대부분 자선사업에 쓰여지며, 가짜 그림 때문에 구속된 사람을 돈과 작품으로 구출해 주기도 했다"

중광은 생전에 화가 장욱진,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 등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 70년대 중광은 장욱진을 인사동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장욱진이 중광을 보고 "중놈치고는 옷 한번 제대로 입었네"라고 하였다. 장욱진과는 붓, 연필, 매직, 색연필을 가리지 않고 선문답(禪問答)식 그림을 10여점 합작하였다. 둘은 말도 없이 술잔만 주고받으며 자기 식대로 한 획씩 화면을 채웠다. 중광은 그때 그린 그림들을 모두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상을 향한 보시(普施)였다.

중광은 거침없이 내뱉는 욕의 대가이다. 중광은 자신을 향해서 욕을 한다. "중광아 이놈! 사기꾼, 알겠는가? 진리를 팔아먹은 놈, 진선과 선악을 팔아먹은 놈, 꿈을 팔아먹은 놈, 나는 똥이올시다. 나는 사기꾼" 한 신부는 이런 중광을 일러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문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상적으로 마셔대는 과도한 음주와 흡연은 중광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다. 중광은 2000년 가나아트센터에서 달마도를 주제로 한 <괜히 왔다 간다>전을 마지막으로, 2002년 3월9일 경기도 곤지암의 토굴에서 칩거하다 생을 마감하였다. 세수 67세. 법랍 41세.

   
 
  캔버스에 오일(116.8×90). 1989.  
 
# 평가가 엇갈리는 중광의 작품세계


오로지 자신만의 분방한 표현, 정열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표현 충동을 활화산처럼 발산했던 중광(重光)은 시(詩), 서(書), 화(畵), 테라코타, 퍼포먼스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중광의 심리의 근저에는 고향 제주도가 무의식적으로 녹아있었다. 중광은 1996년 한 월간지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자신의 그림의 색채는 제주도 그 자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푸른 방석 같은 바다, 동지나해에 떠오르는 태양, 장엄한 낙조, 흐드러지게 핀 유채꽃, 다공질의 현무암 등이 그림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고백하였다. 사회는 그로 하여금 제도로부터 해방을 희구하게 만들었고, 자연은 중광에게 아름다운 색채를 반영토록 하였다. 사회와 자연은 중광의 심층적인 예술세계를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재현을 절제하며, 표현의 추임새를 크게 한다. 어린이 같은 천진무구(天眞無垢), 무의식적 자동기술, 강렬한 표현, 즉흥적인 빠른 터치, 화려한 컬러, 원초적인 폭발력은 그 자체로 자연의 생명력, 괴기함, 조소(嘲笑), 해학, 패러디를 품고 있다. 속도감 있게 뿌려진 강렬한 추상표현은 중광이 세상에 대해 못한 말을 터뜨리는 듯 우렁찬 파도처럼 몰아친다. 그의 작품에는 제주바다가 보여주는 파괴력이 있고, 이리 저리 불어대는 회오리바람 같은 역동감이 있다.

중광의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과 예술계의 반응은 다양하다. 미술평론가 이일은 "중광은 구상이니 추상이니 하는 구분이 무효화된 지는 이미 오래전부터의 이야기이기도 하거니와 중광의 세계는 그와 같은 이분법적인 한계를 훨씬 뛰어넘어 회화를 하나의 정신적인 구도,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심성적 경지를 펼치는 장으로 변모시키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무의식을 꺼내는 그의 행위를 구도의 세계로 보고 있다. 미술평론가 장석원은 "중광은 중광답게 진리를, 깨달은 바를 실천해 왔으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을 뿐이다"라는 말로 중광의 작품 세계를 해탈의 한 과정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세간의 어떤 평가도 중광을 바로 말할 수는 없다. 단지 화가나 시인, 기인(奇人), 미친 중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남긴 작품이 장르의 경계를 허물면서 다양하게 창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를 볼 때 작품을 먼저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광의 기인적 행동, 파격적인 삶의 모습이 선행돼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기존의 어떤 비난에도 불구하고 중광 작품이 미국이나 일본의 대중들에게 사랑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으며 반드시 상기해야 할 일이다. 
제주대학교 박물관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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