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2010 '4·3장한어머니상' 전찬순
하필 그 때, 애깃배 맞췄습니다. 진통으로 초저녁부터 온 방안을 데굴데굴 굴렀으니. 다급해진 남편은 차디찬 새벽, 산파를 데리러 바람처럼 휑하니 나갔지요. 그리곤 감감. 그 광풍의 4·3시기였지요. 시어머니와 대구 형무소 면회를 갔으나 남편은 이미 이세상 사람 아니라했습니다. 생이별 63년. 그날 죽음의 문턱에서 세상에 나온 그 딸아이도 그 나이 됐습니다. 호열자가 횡횡하던 시절. 그녀에게 예방주사 맞지 않은 마을사람들 거의 없습니다. 인텔리 간호사 출신 전찬순 어머니입니다. 작년 말 4·3 장한어머니상을 받고 오랜 세월 가뒀던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살당보난 이런 날 있다고. 아파도 아프다 소리 못했습니다. 상처도 상처라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4·3. 새록새록 새순 움트듯 제주사람 가슴마다 아린 사월, 그녀 이야깁니다. 탄생부터 슬픈 그 외딸도 동석했습니다.

"장한어머니상 그런 거 받으니 마음이 더 슬픈게. 인정 해주난 고맙긴 고마운디." 하염없이 슬펐다. 그 상장, 스물넷의 젊은 남편 앞에 바쳤다. 그리운 남편의 흑백사진을 끌어안고 한없이 통곡을 했단다. 가슴이 더 미어졌단다. 어떻게 살아온 세월인데. 딸에게 그랬다. "그러니까 이제 아부지 원망도 하지말고 나 원망도 하지 말아라. 장한 어머니상 받으난 난 원이 없다." 상 하나가 그녀에게 약간의 위로가 됐을까. 정뜨르 비행장 유해발굴하고 가족 찾은 이들 소식도 들린다. 뼛자루만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의 어조는 담담했으나 참담했던 기억이 살아날 때는 아직도 떨렸다. 몇 번이나 눈물이 말길을 막았다.
"이 나이까지 살아질까 안헷수다. 죄인처럼. 후손들 앞길 막았젠. 이제도 죄인이라 죄인. 그래도 딸하나 의지해 살아왓수다. 이젠 풀렸지만 삼촌 조카 궨당들 한테도 미안하고." 그랬다.
하여, 눈초리 받아도 그걸 감사히 받았다는 그녀. 죄라니! 죄가 있다면 그 시대를 살았고, 그때 만삭이었고, 남편은 산파를 찾아 달려나가다 순경들 차 앞을 지났다는 것. 그 뿐이다. 그게 형을 받아야 할 죄였을까. 그날 이후 모녀의 삶은 그렇게 따가웠다.
# 만삭의 몸으로 모진 고문당해
와다닥 순경 넷이 들이닥쳤다. 신혼 1년의 새댁. 만삭의 그녀는 밤새 애깃배 맞추느라 고통스럽게 온 방바닥을 구를 때였다. 1948년 12월14일 새벽 5시45분. "조금만 고생하고 있으라, 참으면 산파데리고 곧 오겠다" 팔딱팔딱 뛰던 남편,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나가고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멍석말이가 무신거라. 이레차민 저레 둥그러지곡 할 때는 정신 좀 차려진 때고. 하루만인지 이틀만인지 되살아났지. 온 몸은 멍들어 형편없고. 다 죽은 걸로 알안. 정신 나서 보니 애기도 있었어. 나중엔 집주인 할아버지가 갈중이 바지 찢어 내 머리 묶어줬던 거지. 그리곤, 정신을 놓아버렸어. 국가가 그런 잘못을 했어." 방은 피로 번번했고 순경들이 나갔다. "사람 죽었져" 소리에 사람들이 달려왔다.
세련된 간호사출신의 그녀, 스물하나 늦은 나이에 결혼할 때 남편은 형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을 하다가 해방되자 제주로 돌아온 사람. 한눈에도 훤칠한 청년이었다. 8남매중 넷째. 양복점을 했다. 아이 낳고 일본으로 함께 가려했던 부부였다. 행복은 그날 얼음장처럼 깨졌다. 함께 앉은 딸, 강자심이 이야기를 보탠다.
# 열여덟 딸, 18년만에 묻혀진 진실 듣다
"내가 왜 이러나, 가는 데 마다 찬밥신세 같았지요. 전부 나 때문에 그 비극이 있었던 것처럼…." 딸은 뭔지모를 차가운 시선을 감지했을 뿐. 어머닌 한마디도 없었다.
그날 내던져지듯 태어난 딸이 진실을 안 것은 사춘기 앓던 열 여덟 되는 해. 산짓물 길러 갔다가 우연히 머리 허연 할머니를 만난 것. 집으로 딸의 손을 붙잡고 간 그 할머니. 묻혀진 진실을 꺼냈다. 당시 어머니의 주인집 할머니라 했다. 죽기 전에 말하고 싶었다고.
"할머니가 아이를 받으려는데 어머니 진통이 너무 심하더래요. 새벽에 아버지 나가고 순경들이 들이닥치자 할머닌 벽장 안으로 숨었더래. 벽장 속에 숨어서 지켜보던 할머닌 그날 이후 가슴에 죄인처럼 그날이 놓여져 있더래. 그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왜 미안합니까. 그때 죽을 것 같아서 나를 건지지 못했다는거라. 애기 소리가 앵하게 나고 죽은 것 같더래. 할머니 아니었으면 나도 모르지. 그때부터 내가 어머니 아프다 하면 떨려. 내가 임신하니까 그 생각납디다." 그 딸, 강자심 역시 말을 다 잇지 못한다. 충격이었다. 연속극을 봐도 한국전쟁 때도 산모들은 보살핀다는데 하염없이 울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를 미워할 수가 없었단다. "평생 '너 때문에'라는 말이 뱅뱅 돌았어요. 죄없이 목포서 1년 형, 대구서 15년 형을 받았다는데 작은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찾으레 다니단 행불됐고…."
# 남편 찾아 육지 형무소…갖고간 옷만 태워
남편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뻔 했다. 그때 외조카가 목격하지 못했다면. 고모가 해산할지 모른다고 학교 끝나서 부두쪽으로 가던 길에 우연히 트럭에 고모부가 실려가는 것을 보았단다. "소식 듣고 머리 묶은 양 피 잘잘 허는 양 밖에 나갔주게. 서부두에 사람들을 민짝 앉히는디 멀리서 하얀 양말을 올려. 거기서 눈으로 그걸 보고 내가 거기서 쓰러져부런."
남편은 그 날 산지항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고, 1949년 1년 만에 대구형무소에서 잘 있다는 편지가 날아왔다. 아내를 잘 부탁한다고. 시어머니와 아기 업고 형무소까지 갔으나 이미 남편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간수의 말. 갖고 간 옷가지 차디찬 형무소 마당에서 태웠다. "재 한줌 손수건에 담앙 완. 갔다온 후엔 그걸 큰 위패로 생각허연." 4·3에 희생된 그들처럼 연좌제의 상처 또한 깊었다. 조카들이 경찰관이 되겠다고 할 때도 빨간딱지가 붙었다. 교육자 집안에 결혼한 딸의 시댁에까지 그 영향은 미쳤다. 핏덩이로 내동댕이쳐졌으니. 딸의 후유증은 깊다. 팔 힘이 없어 무거운 것도 들을 수 없다. 나이가 들어가니 더 심하다. 웬일인지 그 딸은 4·3행사 갔다오면 반 죽었다. 손하나 까닥 못했다.
# 후유증에 머리 함몰 눈멀어도 내색 안해
그렇게 고통스러웠으나 전찬순, 그녀는 그 병원엔 가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간호사로 다녔던 병원의 의사들도, 동료들도 볼 수가 없었다. 60년 넘어서야 병원 엑스레이를 찍었다. 병원에선 머리가 함몰된지 40년 넘었는데 살아난 것이 기적이란다. 집안에서도 그녀가 한쪽 눈이 먼 것, 온 몸이 상처 입은 것 아무도 몰랐다. 절대 말하지 않았다. 아이 낳을 때 어두워진 눈이라니까. 지금도 머리가 출렁거릴 때 있다.
펜잘 아스피린 신경안정제 두통약에 중독돼 살았다. 마음병도 그랬지만 몸은 몸대로 엄청난 상처투성이였으니. "그때 저 동부두에 소똥 말똥 내 머리에 처매서 살았는데 귀도 막고 눈도 한쪽 실명되고. 딱 막아부런. 다리도 제대로 세우지 못해마씀. 불구자로 19년 동안은 걸음을 잘 못걸었주. 작년까진 책을 봤는디 이젠 더 힘들어. 밤에 누워도 등으로 눕지 못하주게 "
부족함 없이 농사짓던 부모의 3남1녀 중 막내. 황소처럼 힘이 세던 아버진 서른다섯에 돌연 세상뜨고 3~4개월 후 태어난 그녀. 아버진 없었으나 그녀는 귀하디 귀한 아이였다. '동공딸, 안장딸'이라며 안아서 키웠다. 몸 약하다고 장남(머슴)이 업고 다녔다. 운명처럼 그녀의 외딸도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 해방 후 동네 사람들 호열자 예방주사 놔줘
해방 직후, 호열자가 창궐했다. 정뜨르 비행장으로 농토 다 뺏긴 팔도동 용마동 마을 사람들은 간호사 출신 그녀가 있어 다행이었다. 용담마을 아기들도 그녀 손으로 많이 받아냈다.
"당시 호열자 예방주사는 딱 두시간. 사람들 집합시켜 주사를 놓고 시간 내에 가버립니다." 그녀는 책임자에게 부탁해 주사약을 비축했다. 농삿일하다 늦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방주사를 놓아 주었다. 병원비 없으면 병원비도 내줬다. 해방 후 제주시 주정공장 실험실에 2년동안 다니던 시절이었다. "알콜 나오면 몇 도가 되며, 사람이 먹고, 약품이 되고, 이런 거 감정허는 거라 주정공장에선."
그녀는 노인네 문제 해결사. 통 큰 부인회장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웅변도 잘하고 영민하던 소녀였다. 고인이 된 선각여성 고수선이 그를 아꼈다. 함께 새마을부녀회 활동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찾아줄 때마다 그녀는 고맙고 서러운 생각이 난다. "부녀회장 시절 집세 없습니다. 우리집 아빠 아프니 병원 데려다 줍서. 병원에 가서 무료로 해달라고 그러죠. 딸은 젖도 못 먹고 어머님한테 맡겼다가 밤 늦어 오면 엄마 가라고 그러지. 나는 미안허여이. 내가 딸한테 사정해." 군품 장사, 농삿일도 했다.
"국가의 명백한 잘못이지만 4·3이 여기까지 햇볕들게 된 건 다행스런 일"이라는 전찬순. 얼마전 추가로 세워진 4·3공원 행불인 표석에 명예회복된 그 그리운 남편의 이름자도 새겨졌다. 이제 영혼들도 좀 안착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녀는 지금 딸과 함께 산다. 마당 텃밭엔 겨울을 뚫고 눈을 뜨려는 푸른 나물들이 싱싱했다. 그립고 그리운 사람 보내고, 죄없이 죄인처럼 지내온 세월이었다. 거친 바람을 견디고 이겨낸 그것들처럼, 삶과 죽음에 초연한 한 여인. 땅에 엎드린 자처럼 바싹 겸손했다. 카메라 앞에서 웃을 일이 뭐 있냐신다. "우리 세상에 나올 땐 모든 걸 다 갖고 싶어 주먹을 꽉 쥐지만 세상 떠날 때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가겠다고 손을 다 펴고 빈손으로 갑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