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역사와 함께하는 제주의 학교 1)프롤로그 : 제주문화와 교육

   
 
  ▲ 마을의역사와함께하는제주의학교  
 
지난 3월 2일 제주시 소재 도평초등학교와 해안초등학교가 분교장에서 본교로 승격됐다. 도평초와 해안초의 본교 승격은 마을 주민들의 학교 살리기의 결실이었다. 이들 학교는 올해 분교장 운동회가 아니라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회를 열어 그야말로 마을 공동체의 잔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제주지역  대부분의 학교는 마을 공동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어려운 시절 도민들은 자녀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바다에서 물질을 하거나 한라산에서 나무를 해오고 돌을 운반하며 학교 건립과 운영에 헌신했다. 특히 초등학교는 마을의 역사이자 마을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경쟁사회 속에서 마을 공동체 정신을 대표하던 학교가 잊혀지고 있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같이 했던 제주의 학교를 탐방한다.

   
 
  ▲ 성산읍 온평리 소재 온평초등학교는 온평리 해안가 양쪽 경계를 '학교바당'(바당은 바다의 제주 사투리)으로 운영해 해녀들이 캔 미역을 팔아 학교 운영비로 충당했다. 마을 해녀들이 막 조업을 마친 온평리 앞 바다가 평온하다. 장공남 기자  
 
   
 
  ▲ 구좌읍 월정리와 행원리 주민들이 학교후원회를 조직해 설립한 구좌중앙초에 세워진 학교 공적비와 학교 전경. 장공남 기자  
 
   
 
  ▲ 화북초등학교의 전신이 화북사립보통학교가 있던 옛 터. 화북사립보통학교는 주민들의 기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학교를 설립한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줬다. 장공남 기자  
 

△제주문화

'바다 건너 큰 고을'이란 의미의 제주(濟州)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다. 제주도의 크기는 동서 길이 74㎞, 남북 길이 32㎞이다. 제주도, 우도 등 50여개의 유인도와 무인도로 구성돼 있다. 북쪽 끝은 추자면 대서리, 남쪽 끝은 대정읍 마라도, 서쪽 끝은 한경면 고산리 차귀도, 동쪽 끝은 우도면 연평리다.

제주는 육지와 격리된 절해고도의 섬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500년 동안 200여명의 유배인이 제주를 찾았다. 광해군, 추사 김정희,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제주에 온 유배인들은 제주 주민과 교류를 통해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특히 이들 유배인들은 학자로서 제주에서 교육 활동을 했다.

1629년(인조 7년) 제주사람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이 시행된다.
인구 감소와 함께 특산물의 양이 감소하는 데 따른 정책으로 1823년(순조 23년)까지 200여년 동안 지속됐다. 다른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출선기라는 허가증을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는 제주를 더욱 고립의 섬으로 만들었다. 본토와의 문화의 교류가 제한됐던 것이다.

교육학자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문화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교육은 문화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통해 그 문화를 다시 보는 삶의 형식이라고 설명한다.

제주문화는 제주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제주문화를 분류하면 설화·신화, 무속·종교문화, 유배, 표류, 주거, 어로, 방목, 먹거리, 풍속 등이다.

△근대 제주교육

조선후기 출륙금지령이 사실상 해제되면서 제주교육의 패러다임 바뀐다. 제주 지식인들인 육지로 나가 직접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등  종전의 폐쇄적이고 봉건적인 틀에서 벗어나 근대 교육을 맞는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188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의 교육을 한국의 근대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이 펴낸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에는 제주 근대 교육의 기원을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인 제주공립보통학교와 사립 제주의신학교(현 제주고)가 개설된 1907년으로부터로 보고 있다.

제주의신학교는 중등 교육기관이었으며 제주공립보통학교는 초등 교육기관이었다. 제주시 관덕정에서 백일장을 열어 학생을 선발해 연장자들은 제주의신학교, 연소자들은 제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제주의신학교는 제주 유림의 결집체였던 귤림서원의 옛 터(현 오현단)에 교사를 마련해 신학문과 구학문의 융합을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귤림서원은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철폐될 때까지 210여년동안 제주 교육을 이끌었다.

라쿠르 신부는 한말 정치인이자 유배인이었던 박영효의 지원에 힘입어 1909년 제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현 신성여중·고)를 현 제주시 옛 구도심에 설립한다.

신성여학교 1회 졸업생이자 초대 교육감이 최정숙의 회고에 따르면 신성여학교는 교과서와 학용품을 학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등 적극적으로 학생을 유치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의 학교

2011년 3월 기준 제주 도내 학교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특수학교 등 292곳(분교장 8곳 미포함)이며 학생 수는 9만6259명(분교장 포함), 교원 수 5341명이다. 제주 초등학교 수는 108곳(분교장 8곳 미포함)이며 학생 수는 4만2609명, 교원 수는 2284명이다.

「근·현대 제주교육 100년사」를 보면 1945년 해방 이후 미 군정기인 1948년 동안 제주지역에 새롭게 설립된 초등학교는 43곳이다.

해방 이전 설립된 초등학교 수는 52곳이다. 미 군정기 제주교육을 담당했던 초등학교는 모두 95곳인 셈이다.

이는 올해 초등학교 수 108곳과 단순 비교할 때 60여년 동안 초등학교 13곳이 늘어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교육 행정 당국의 노력에 의해 학교가 세워졌다기 보다는 마을 주민들의 교육열에 의해 주민들이 학교 부지를 기부하거나 기금 모금운동을 전개해 학교가 설립됐다.

이들 학교는 일제 강점기-해방-4·3사건 등 현대사의 큰 흐름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끈끈한 생명력으로 보여주며 마을 공동체의 중심에 서 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것처럼 제주의 학교도 학교마다 탄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씩 다르다.

화북사립보통학교(현 화북초)는 마을 주민들의 자발적인 힘으로 건립된 학교다. 화북초는 마을 주민들이 기금 모금에 참가했으며 한라산에서 나무를 해 오거나 돌을 운반하는 등의 육체적 부담을 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화북초는 화북진터에서 운영돼 오다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설됐으며 옛터는 화북청소년문화의 집이 들어서 있다.

해방 이후 설립된 학교 중 온평초는 학교를 지원하는 '학교바당'이란 바다(제주사투리는 바당)를 보유했다. 온평초는 1946년 학교 설립이 인가됐지만 학교 운영이 어렵게 되자 온평리 해안가의 양쪽 경계를 학교바당으로 정하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미역을 팔아 운영비로 충당했다. 온평초에는 당시를 말해주듯 해녀공로비가 세워져 있다.

구좌중앙초의 전신인 사립중앙보통학교는 월정리와 행원리 주민들이 참여한 학교후원회에 의해 1924년 설립됐다. 학교 설립에 공헌한 인사를 기리기 위해 학교 교정에는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가파초는 현재 전교생이 7명에 불과하지만 전신인 신유의숙은 1921년 설립됐다. 가파도 주민들의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도 운영했다. 야학에 쓰이는 호롱불 석유 값은 마을별로 모금, 마을 공동체의 단결력이 탄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제주의 학교는 마을 주민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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