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신촌 조규훈 선생 현창기념사업회 대표 재일동포 이정림
그런데, 왜 우린 쉽게 잊는 건가? 해방공간, 신촌 바다 위로 동동동 떠오른 나무조각들. 아이들은 그 조각들을 붙잡고 헤엄을 쳤었다. 신한은행 전신인 일본 전 관서흥은 이사장 이정림. 그에게 유년의 기억은 또렷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아하! 그게 모교 건물 목재들이었음을 안 것은. 자신이 태사른 땅에 중학교를 짓는다며 한 재일동포가 고향에 보내오던 것이었음을 안 것은. 해방 후 일본 땅에 민족교육의 산실 백두학원 건국학교를 설립한 이가 그였음도. 너무나 가고 싶던 학교에 갈 수 없어 눈물을 삼키던, 그러한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한 오사카 노년의 눈물이 있었다. 이미 세상 뜬 신촌사람 고 조규훈 선생이었다. 끝내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났다. 그 역시 열여덟에 일본으로 떠난 신촌사람 이정림이다. 죽어서도 고향 땅에 오지 못한 그 사람, 조규훈 선생을 기리는 일, 그에겐 의무다.
고향의 이름으로! 하여, '신촌'이란 호를 헌사한 사람. 조규훈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이정림. 사람의 도리라 했다.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 :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시면 그 근본인 우물를 판 사람의 은덕을 잊어서는 안된다)이라 했습니다. 해방 혼란기에 조국을 위해 행동으로 보여준 그를 잊어선 안됩니다." 이정림, 그는 확고했다. 고향사람을 기리는 일이 아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민족혼을 심어준 한 잊혀진 인물을 되살려야 한다는 말씀! 오사카에서 고향에 잠깐 들른 그를 만났다. 그는 요즘 조규훈을 마음에 품고 산다.
# "건국학교 건립 등 조규훈 선생 공적 기릴때"

"조규훈 선생은 암울했던 시대를 살면서 동포들을 위한 민족교육에 헌신한 분입니다. 국적은 한국인데 95세까지 일본에 살면서 고향에 한번도 오지 못했습니다. 말년엔 형편이 어려웠죠. 현창비를 고향 땅에 세워서 영혼이라도 모셔오고 싶습니다. 조 선생은 재일동포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준 분이며, 대한민국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한 분입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국가 차원에서 예우하고,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어린 이정림이 해방의 환희를 고향 신촌에서 맞이할 때, 1920년대 열일곱에 홀로 고향 떠나 성공한 사업가가 된 조규훈은 일본에서 해방의 감격을 맞는다.
조규훈. 평범한 사업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변모한 그는 1948년 대한민국 초창기 주일대사관 설립에 결정적인 지원을 해줬다. 전쟁피해자 원호사업도 했다. 민단 단장도 7, 8대(1949~1950년) 맡았던 인물. "선생은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가 벌목사업과 제재소, 고무공장, 레코드 사업 등을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식민치하에 징용으로 온 우리 동포들에 애정을 쏟았습니다. 해방 후엔 200만 동포들이 방황할 때 '백두동지회'를 결성, 그들의 복지와 조국의 부흥을 위해 진력을 쏟은 분이죠. 드러내지 않아서 이러한 분을 우린 너무나 몰랐던 거지요."
그랬다. 이정림. 그가 일본을 떠날 때도 만 열여덟살이었다.
# 18세 도일…대마도 숯굽는 구덩이서 기숙도
이정림.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예순 하나, 어머닌 마흔 하나였다. 연고 없는 신의주에서 배를 타던 아버지는 근대의 개방형 인간. 도전정신이 강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육지로 나가야 한다던 할아버지 영향이었다. 아버지는 열다섯에 신의주로 떠났다. 할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온 유전인자 탓일까. 그렇게 고향을 뜰 때 아버지는 고작 열 다섯살. 20대의 아버지가 홀로 시베리아 철도 타고 생테르부르그까지 당도한 때는 1917년이었다.
"거기까지 가는데 48일 걸렸대. 전철이 가다가 스톱하면 추운 때니까 철로 길 따라 걸어. 걷다가 동상 걸려 죽는 이도 생겼대. 그 붉은 광장에서 비참하게 사람 죽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대." 프랑스 세르부르항, 10리 두고 파리 구경을 못하고 세계를 떠돌다 신의주로 돌아간 아버지는 19살 연하 그 곳 여인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신의주에서 다시 신촌 고향땅에 발을 디뎠을 땐 막내 이정림만 태어나지 않았을 때. "그래도 조상님들 산이라도 찾아보자해서 어머니 모시고 왔대."
4·3이 마을을 휩쓸었다. 가족들은 무사했다. 곧이어 터진 한국전쟁! 어머니는 외가인 신의주를 다신 갈 수 없었다.
팔순이 낼모레던 아버지는 열여덟 외아들 이정림에게 사범학교 졸업하고 빨리 결혼하라했다. 마음은 이미 일본행 배를 타고 있을때. 웬걸, 일본의 큰 누님도 화들짝. "우리 어머니가 절간고구마, 보리개역을 보내줄 때였어요. 누님은 외아들이 어떻게 오려느냐. 내가 고향 떠나와서 잘 사는줄 아느냐. 24시간 일해도 밥 못 먹는다. 우리도 나와 버렸는데 네가 부모님 모셔라." 야단이었다. 그래도 막내의 굳은 의지는 고고했다.
끈질기게 아버지를 설득했다. 큰 허락도, 큰 반대도 없었다. 아버진 아무 말씀 없이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니가 가서 구두닦이라도 할 생각 없으면 가지마라. 일본에선 의지하려면 안된다."
동부두로 간 것은 1958년 2월. 부산 영도에 20일 쯤 있다가 배 타고 대마도에 도착. 한 이십일 정도 살았다. 배고파 칡뿌리 파러 다녔다. 해녀들도 보였다. 숯 묻는 구덩이에서 잤다. 그 안은 따뜻했다. 오사카로 도착한 것은 4월8일. 아는 이가 말했다. "이런 박한 곳에 뭐하러 왔냐. 도대체, 그때는 가을부터 봄까지 일하면 여름부터 가을까진 일이 없어. 일년내내 일해도 먹기 힘드는데 반년 일하고 일년 먹으려니 고통이야."
# 재일한국인 법적 투쟁…신한은행과 45년 인연
'아이우에오'도 모르고 일본 학교에 갔다. 하는 일 없이 1년. 선반공 자리가 났다. 수도꼭지 만드는 일. 겨우 들어갔고, 맹렬히 일했다. 우여곡절 끝에 집 가까운 대학에 합격했다. '잡는 어업에서 키우는 어업으로'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사립 근기대학 법대. 허나 외국인은 사법시험 자격도 주어지지 않았다. 국제해양법을 전공 하고 법학부장까지 지낸 그에게. 법대학장이 그랬다. "일본국적을 취득할 수 없냐". 그건 아니었다.
대학 시절, 재일 한국인 학생 대판부위원장을 맡았다. "한일회담 때 재일 한국인 법적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어요. 와세다 시험치고 있는데 시험 끝나 전화해보니 위원장이 경찰에 붙잡혔어요. 넌 도망가라. 시험도 다 안보고 동경에서 사이다마(崎玉)까지 피했어요.
일본에서의 꿈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막연하였고, 힘든 여정이었다. 한푼두푼 모으며 살아야 하는 신산한 날들이 재일동포의 삶이듯. 누가 그랬다. 은행에 들어가면 어떠냐고. 주판도 못 튕겼으나 문을 두드렸다. 한국 신한은행의 설립자이며, 그 모체인 관서흥은을 1950년대에 창설한 신화적인 인물 이희건 회장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만 45년. 얼마전 작고한 그를 잊을 수 없다. 그의 생에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 "이 회장은 경북 출신인데 머리가 비상하고 제주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제일 많았어요."
# 그의 꿈, 평생 고향땅 밟지 못한 조 선생 현창
그와 고 조규훈과의 만남은 2001년. 95세를 일기로 재일동포 사업가이자 민족교육의 선구자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음이 짠했다. 2007년 다시 그를 만났다. 백두학원 60주년, 학교 어느 구석에서 찾아낸 옛날 필름. 거기서 그의 젊은 날을 만났다. 그의 육성을 들었다. 가슴이 뛰었다.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의 궤적을 찾아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고아로 친족집을 전전하면서 자라 흥미가 있던 공부를 할 기회도 충분히 얻지 못해, 17세 때 신천지를 찾아 일본으로 왔다"는 그의 회고담. 가슴이 뜨거워졌다. 부끄러웠다. 같은 고향 어른인 줄도 몰랐다.
그의 모교인 조천중학교 설립에는 신촌친목회 130명의 이름이 있으나 조규훈의 헌신으로 가능했음도 그때 알았다. 고향을 그리다 타향에서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말년을 보냈다는 것을 안 것도 그때였다. "처음엔 신촌사람들만 모여서 이런 사람 있다고 하니까 여기서 이런 사람 있냐고. 많이 도와줬어요." 살아서 재일동포들과 모국이 입은 은덕을 그대로 덮어 둘 수는 없었다는 이정림. 그 역시 십대에(열여덟에) 일본땅을 밟지 않았던가. 마침내 시대의 그늘에 가려진 그를 햇볕에 불러내기 시작했다. 조규훈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건국학교는 1949년 일본 문부성의 정식 인가를 받은 최초의 민족학교. 허나 창립자 이름은 이상하게도 묻혀져 있었다. 2009년, 뜻있는 이들과 조규훈 선생 현창준비회를 꾸렸다. 그의 공적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정부 차원의 국민훈장 추서란 간절한 꿈을 안고. 사후 9년, 60년만의 재조명이었다.
"조 선생은 민단 단장을 하면서 잠시 학교를 맡겼다가 다시는 학교에 돌아갈 수 없었죠. 말년에 백두학원 언저리에서 낭인처럼 서성이면서 출퇴근하는 교사들에게 학교를 잘 부탁합니다, 학교에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는 말을 했다합니다. 본인이 세운 학교 앞에서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 분의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재일 1세대의 삶에 눈길을 주어온 만큼 자신은 가난했으나 조국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 이제 조국이 답할 차례라는 이정림. 어쩌면 한톨 작은 씨앗이 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조규훈을 다시 생각하자한다. 목마른 자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잔다. 두고온 고향은 땀흘려 재일 1세대가 파놓은 우물을 마시지 않았던가.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