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잠녀] 4부 '잠녀,만나다' <181>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홍경자 어촌계장

▲ 한수포구
상군 잠녀이자 어촌계장으로 바다밭 관리 책임…황금어장 비양도 작업 의존도 ↑
"전화교환수 2년 바다 정직함 확인", 스스로 선택한 운명 사회적 함의 서둘러야

제주도라면 '해녀'를 생각하고 '해녀'하면 제주도를 연상한다. 그러나 '해녀'에 대한 이미지는 그릇되게 아로새겨질 때도 없지 않다.…"해녀가 된 동기란 게 따로 없습니다. 그저 바다와 이웃한 섬의 딸들에게 어머니는 자본 없이 손쉽게 생활을 개척해 나가는 방법을 바다 생활에서 구하게 한거죠" (제남신문. 1967년 11월 9일자. '해녀조합장 김은씨 테왁 벗삼아 20년 기사' 중) 잠녀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말이다. 40년도 더 전 신문에까지 실렸던 것이 '사실'이 조금씩 각색이 됐다. '힘든 사정에 물질이라도 해야 했고, 너무 고되고 비참한 처지에 대물림하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은 비슷하지만 그 뜻이 한참 다르다. '생활을 개척했다'는 말이 먼저 눈에 닿는다.

# 풍족해진 바다…소득 짭짤

▲ 홍경자 어촌계장
꼬박 4년 만에 홍경자 어촌계장(62)을 다시 만났다. 금채기라 물에 들지는 않지만 어촌계장이란 위치는 쉴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촌계장 협의회에서 바다정화 활동도 하고, 자원관리며 관련 회의며 하루 24시간이 바쁘게 돌아간다.

32만 9000㎡의 한수리 어장은 다른 마을들에 비해 넓은 편이 아니다. 그래도 올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지난해 한 명 당 60만원 정도였던 톳 수입이 올해 170만원 가까이 늘었다. 바다밭이 튼실해진 까닭이다. 톳만이 아니라 천초도 '하영(많이)'났고, 새벽시장 등에 생미역도 제법 팔았다. 바다가 보면 볼수록 좋아진다. 생각지도 않은 맘고생을 하게 하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살가운 '애인'같아지는 순간이다.

그런 바다를 올 들어서만도 3명이 떠났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서다.

홍 어촌계장은 "나이가 들어서…. 뭍은 어떤지 몰라도 바닷길은 힘들어서 왕래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 길은 혼자서도 걷기 힘들다. 하나 둘 잠녀들이 바다를 떠나기 시작하면 뭍의 길들이 그런 것처럼 쓰임을 잃고 시나브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곳물질에 톳이며 천초작업을 하는 기준이다. 바다에 생계를 걸고 있는 상시잠녀는 여전하다. 토박이 잠녀들에게 바다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삶터다. 인근 9개 마을이 공동으로 작업하는 비양도는 '창고'이자 '황금어장'이다. 배를 타고 나가 작업을 하고 돌아오는 길, 어깨가 시릴 만큼 추위가 엄습해 오지만 반드시 필요한 바다다. 

이전 취재때도 그랬지만 홍 어촌계장의 셈법은 특별하다.

80대 2명, 70대 9명 등 수를 세고 이름을 확인하는데도 이내 "누게 어멍" "누구네 조케"하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잠녀, 좀녜, 해녀같은 말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홍 어촌계장은 "언니, 동생, 삼춘(촌)했지 해녀란 말을 누가 쓰냐"고 타박했다. 힘든 물질에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간혹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홍 어촌계장은 "친한 사이에는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곤 했다"며 "물건을 잘하면 '요왕할망 ', 문어를 잘 잡으면 '물꾸럭 눈 린 할망'하고 불렀다"고 말했다.

"요왕할망  오늘은 어디 가쿠과, 나도 라 가쿠다"하는 표정이 즐거워보인다.

# 전화 교환수 변신 시도도

▲ 금채기동안 테왁 등 물질도구만 해녀탈의실을 지키고 있다.
최우수잠수상까지 받은 상군 잠녀지만 말그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홍 어촌계장이다.

열 세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에게 배운 물질로 50년 잔뼈가 굵었다. 감포와 나정, 비진도와 새섬, 목포, 포항, 백령도, 울릉도 등 18살부터 한 5년 바깥물질도 했다. 그 때 얘기에는 목소리부터 커진다.

"돈 많이 번다 보다는 노력한 만큼 벌 수 있다"는 말에 나선 바깥 물질이 만만할 리 없었다. 홍 어촌계장은 "지역 사람들이 일단 제주도부터 무시하고, 잠녀들도 무시하고 그랬다"며 "한 1년 하다가 이런 대접을 받기 싫다고 전화 교환원으로 일하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의외다. 며칠 씩 배에서 먹고 자면서 물때에 맞춰 작업을 하는 '난바리'까지 안 해 본 것 없이 다했던 잠녀가 바다를 버렸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홍 어촌계장은 "당시 자격증을 따고 부산 전화국 교환수로 한 2년 일했다"며 "제주에서도 칼호텔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얼굴' 때문에 안돼서 아버지한테 싫은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직장생활을 그렇게 정리하고 비등비등 놀다가 다시 찾은 곳이 바다다. 바다만큼 정직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집을 지으며 빚이 생기자 바깥물질도 나섰다. 그동안 사정도 많이 달라졌다.

홍 어촌계장은 "처음엔 작은 섬에서 얼마나 먹고 살기 힘들었으면 아기들까지 밖에 나와 물질을 하냐며 '가시나' '가시나'했던 사람들이 싹 바뀌었다"며 "한 10년도 안 되는 동안 좋은 곳에 살면서 여기까지 나와 고생한다는 말도 듣고 호칭도 '해녀'나 '아주머니'로 달라졌다"고 기억했다.

처음에는 "제주도를 왜 무시하냐"며 기세 좋게 받아치던 홍 어촌계장도 '큰아기' '동생'하는 호칭에 익숙해졌다.

# 스스로 선택할 일 자부심

불편한 것은 오히려 지금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예전 바깥물질을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이 보여주던 시선을 간혹 제주 안에서 느낀다. "힘들지 않았냐" "어떻게 그렇게 험한 일을 했냐"는 질문은 어딘지 어색하다.

홍 어촌계장은 "직장생활도 해보고 바깥물질도 해보고 다 해봤지만 물질만큼 마음 편한 일이 없다"고 말했다.

바다는 노력하는 만큼 돌려준다. 열심히 물질을 하면 주머니 사정이 두둑하고 그렇지 않으면 모자란 듯 살아야 한다. 어장 관리도 마찬가지다. 내 집 인양, 내 밭 인양 공을 들이면 바다는 꼭 그만큼 답을 한다.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망사리를 채울 생각부터 하는 것은 잠녀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별한 '뭍부업'이 없는 한수리에서 물질을 하는 것은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잠시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나니 그 중요성이 더 느껴진다.
한수리에서는 처음 고무옷을 입고 물질을 할 때도 그랬고, 여성 어촌계장으로 갈수록 목소리도 커지고 해야 할 일도 많아진 지금도 그렇고 늘 마음은 바다에 가있다.

홍 어촌계장은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바다에 가야지 않겠냐"고 채비를 서둘렀다.

우리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가 아니라 스스로 잠녀가 됐다. '잠녀'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사회적 함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특별취재반=김대생 교육체육부장·고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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