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오름 나그네] <17>어승생악

한라산 일부이면서 현대사 아픔까지 감싸안은 오름
정상 곰취 군락…섬 북쪽 한눈 조망 등 빼어난 경관
어승생악의 멋은 당당한 풍채다. 면적에선 군산, 비고에선 오백나한에 이어 두 번째지만 면적과 비고를 곱한 체적에선 어승생악이 도내 오름 가운데 최대다. 동쪽에선 다랑쉬오름이 여왕, 서쪽에선 왕이메오름이 군왕이라면 어승생악은 '왕 중의 왕'이다. 황제인 한라산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며 섬의 북쪽을 관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아픔도 크다. 300m가 넘는 일제의 진지동굴로 인해 속살이 파이고 정상부가 까이는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의연히 버티고 서있다. 한라산의 일부이면서 현대사의 아픔까지도 감싸 안은 제주도 최대의 오름 어승생악이다.
어승생악은 어리목에 있는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뒷산으로 제주시 해안동 산220-12번지다. 어승생악은 도내 오름 가운데 최대의 산체를 자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적에선 254만3257㎡로 283만6857㎡의 안덕면 군산에 29만3600㎡가 모자라는 2위이지만 비고가 350m로 군산(280m)을 크게 앞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면적과 높이의 곱셈으로 구해지는 체적에선 단연 1위인 셈이다. 389m로 비고 1위인 오백나한은 면적이 59만9856㎡에 불과하다.
오름명의 유래나 어원에 대해선 확실한 게 없다. 그래도 임금이 타는 말, 어승마(御乘馬)와 관련된 게 많다. 탐라지(1652년)에는 "오름 아래에서 '임금이 타는 말이 났다'고 하여 어승생악(御乘生岳)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고 탐라순력도(1702년)는 어승생(御乘生) 또는 어승악(御乘岳)으로 표기하고 있다. 정조21년(1797년) '산 밑에서 용마(龍馬)가 태어나 조정에 바치자 '노정(盧正)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품계를 올려줬다는 얘기도 전한다.
반면 '어승생'을 '어스솜'의 몽골식 지명으로 보기도 하고 '시심'의 '(神聖·光明·通御의 뜻)'로 보기도 한다. 어승생·어승생이·어스승·어스름오름·어스싱오름·어시싱오름·얼시심오름·어승악·어승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승생악은 신제주로터리에서 15.3㎞다. 1100도로를 타고 가다 어승생 삼거리에서 좌회전 700 가량 올라가면 주차장이다. 비고가 두 번째로 높음에도 불구, 높은 한라산 쪽에서 탐방로가 개설돼 있어 왕복 1시간이면 충분, 가벼운 등산에 좋다. 자연생태가 잘 보존돼 있어 자연학습탐방로로도 활용되고 있다. 탐방로 중간 중간에 한라산 노루의 생태, 어승생악의 식물, 새와 동물, 숲의 변천, 오름의 생성 과정에 대한 설명 등을 설치, 이해를 돕고 있다.

A=주차장 및 탐방로 입구 B=정상 C=분화구 D=토치카 E=어승생저수지 F=선녀폭포 G=어리목 삼거리 H=1100도로
특히 정상부엔 곰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따가지 못하도록 하며 보호하다 보니 남면을 제외한 북·동·서면은 웃자란 곰취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육지부에선 화분에 심어서 따먹을 정도의 '인기' 나물이라고 한다.
정상에선 섬의 북쪽 모두가 눈에 들어온다.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도두봉·신제주·구제주와 제주항과 사라봉·별도봉은 물론 멀리 추자도 비양도 성산일출봉도 볼 수 있다. 한라산 쪽으론 왼쪽 어깨너머로 바농오름·절물오름·견월악·쌀손장오리를 거쳐 작은두레왓과 큰두레왓을 거치면 1950m의 정상 백록담이다. 이어서 장구목.윗세오름만세동산, 자제비동산 민대기리오름과 와이계곡이 눈앞에 있다.
정상부의 특징은 자연과 인조물의 부조화다. 한라산 정상과 제주도 북부의 오름군하며 경관의 백미 속에 회색빛 콘크리트 조형물들이 분위기를 망친다. 다름 아닌 일제가 설치해 놓은 동굴진지다.

정상에는 환기구 역할 등을 했던 굴뚝같은 통로가 정상부를 뚫고 나와 있고 북쪽 바다를 향해선 진회색의 토치카가 여전히 입을 벌린 채다. 흉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았던 침략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등록문화재 제30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어승생악의 지질학적 특성에 대해 강순석 제주지질연구소장은 "송이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분석구로서 크게 두번의 폭발로 이루어진 화산체"라며 "비교적 최근세에 분화한 약 수만년 전의 화산체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강 소장은 "송이로 구성돼 있음에도 분화구에 물이 고이는 것은 특이한 경우로 우선 분화구 중심 하부에 용암류가 충진, 튼튼히 받치고 있으며, 불투수층인 세립질의 점토층이 차수벽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장마철에는 물이 고이는 산정화구호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대신 한라산연구소 연구사는 "어승생악은 한라산을 등지고 방목지역과 마주보고 있어 희귀식물의 중요한 피난처가 되고 있다"면서 "2004년 발견된 미기록식물 흰방울꽃을 비롯, 멸종위기야생식물2급인 으름난초·백운란 등의 자생지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김철웅 기자
| "어승생수원지 개발사업 "물 기근에 허덕이던 제주도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어승생수원지 개발은 물의 혁명이었다" 고기원 제주광역경제권 선도산업지원단장은 "1971년 당시 어승생저수지 완공은 지역에서 큰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며 "가장 중요한 물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중산간 목장지대로의 주거지 이동 등 삶의 근간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고 단장은 "언제,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1960년대 제주도에 물은 생명이었다. 허벅으로 물을 긷기 위해 하루 몇 시간을 고생해야 했고 비위생적인 물은 수인성 전염병의 요인이기도 했다"며 "수원지 개발은 농업 효율성과 주민 삶의 질 상승과 직결된 과제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라산 와이계곡 이끼폭포와 선녀폭포에서 저수지까지 도수로 7.6㎞와 동쪽 구좌읍 대천동과 서쪽 안덕면 동광오거리까지 송수관로 48.2㎞, 16개 지선 267㎞를 설치, 중산간 67개 마을과 공동목장 등에 용수를 공급했다"며 "당시 대통령의 '결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고 단장은 "1966년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고지대 수자원개발 방안 강구를 지시, 이듬해 4월20일 공사가 시작됐다"면서 "본 공사는 삼부토건이 맡았으나 도수로와 송수관에는 5·16 직후 검거된 폭력배 등으로 구성된 국토건설단 51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공사는 5개년 계획에서 대통령의 지시로 2년이 단축, 1969년 9월 어승생저수지 축조 공사가 완공됐으나 바닥 함몰 등 하자에 따른 2번의 보수공사 끝에 1971년 12월 물을 성공적으로 채음으로써 4년8개월만에 완공한 셈"이라고 밝혔다. 고 단장은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업비는 당초 3억여원에서 12억원으로 늘어난 반면 바닥 함몰에 따른 시트 공법 적용으로 저수량은 10만6000t으로 3분1 규모로 줄어버렸다"며 수력발전은 낙차나 용출량 등을 감안, 실행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철웅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