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오사카 이쿠노구 강안자
이 댁에선 고향 제주도의 성묘를 위해 온가족이 날아온다. 동경, 오사카, 미국, 서울에서. 이 거국적 가족행사는 8년전부터다. 아들딸 손자손녀 며느리 많게는 서른두명에서 적게는 스물여섯 명까지. 이 대부대의 총수는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의 재일동포 강안자 할머니. 죽을둥 살둥 세 번의 도전끝에 격랑의 현해탄을 건너야했던 열다섯 그 소녀. 이제 3대에 걸쳐 손자손녀만 열아홉을 거느린 할머니가 되었다.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의 조건이었던 그 시대. 격렬한 삶의 과정 거치지 않은 재일동포 있으랴. 하여 고생을 고생이라 여기지 않는다는 제주여자 강안자. 오사카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했던 한 여인의 괄호속 삶이야 어찌 풀어내랴. 고향 바다 앞에서 담담하게, 환하게 웃음짓는 제주의 어머니, 그녀 앞에선 할말을 잃는다. 저 삶에의 겸허함이라니!

"미국 2명, 동경 12명, 오사카 12명, 서울 4명. 시집간 딸만 말고 전부 왔어요. 교래리, 조천, 행원 작년까지는 입도조 묘도 갔습니다." 조상 묘가 있는 4군데를 둘러보고 온 강안자. 그런데도 좀 쓸쓸해뵌다. 지난해 10월, 향년 81세로 세상을 뜬 남편(홍여표)의 부재다. 말기암 진단을 받았던 남편은 작년이 마지막이라며 산소호흡기를 하면서도 고향 성묘에 동참했었다. 40여명 군단이었다.
# '이문화교류의 집' 재일동포 네트워크
오사카의 '작은 제주도'.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한 가운데에 가보라. 한눈에도 확 눈에 띄는 '이문화교류의 집'. 그 앞엔 늘 북적거린다. 관광객들, 수학여행 온 학생들과 교외 학습 아동·학생들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3층 건물. 한국식료품을 판매하는 토쿠야마(德山)상점. 김치만들기 체험, 그림도 전시할 수 있는 갤러리 '도래'와 장고, 전통무용 등 문화교실이 들어있는 다목적 홀 반가식공방. 재일동포들의 네트워크는 물론 다양한 문화교류의 발신지가 됐다. NHK 등 텔레비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곳. 바로 그녀의 사업체다.
머리도 좋고 글도 잘 쓰고 불같이 성격도 강했던 남편은 민족을 위해 참 많은 일을 했었다. "여러군데서 남편에게 한국의 역사나 문화 이야기 해달라고 했어요. 허름한 상가여서 비가 오면 우산 쓰면서 하는게 안타까워 이런걸 만들면 어떨까해서 만들었어요. 지금은 많이 알려져서 일본 사람들이 많이 와요. 우리 문화 알려고 하는 사람들 많아요. 한류스타들을 일본 아줌마들이 좋아해요."
# 유복녀로 태어나 15세때 세 번째 도항 성공
강안자.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난 유복녀. 어머닌 그녀를 낳자마자 삶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손에서 커야 했다. 열살부터 물질도 했다. "행원바당 얕아서 여가 많잖아요. 미역이 많이 났어요. 우린 마당질도 잘해 나고 보리 훑으기도 하고, 감저 밭에 감저 심고. 일제강점기엔 우리 제줏말로 공출 받쳐불민 먹을 것도 없었어요."
일본에서 재가, 비단장사하던 어머니가 딸을 불렀을 때 그녀 나이 열다섯. 그녀, 도항의 과정도 엎치락 뒤치락 풍파를 타넘고 타넘어야 가까스로 성공했다. 밀항선. "처음엔 부산에서 나침반 없는 배 타고 가다 부산으로 다시 되돌아갔어요." 방향감각을 몰랐던 배였다. 첫 도항은 실패. "일본에 가다가 태풍을 만나 완전히 배가 물 바닥으로 떨어질 뻔 했어요. 일본 해난 구조대가 달려왔고, 배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갔어요." 두 번째도 실패. "세 번째는 쓰시마에 내리니까 대판까지 데려다 주는 사람 있었어요."
그 시절, 고향의 상처는 지금도 선명하다. 어떻게 잊겠는가. 4·3의 처참한 주검을 겪은 후였고, 한국전쟁 시기였다. "4·3사건때 사람 많이 죽는 것도 봤어요. 행원 작은 아버지가 총 맞아서 돌아갔어요. 숨었다가 나오면 살려준다했는데 밭 하나에 열 명 쯤 세워 놓고 서청들 총에 맞아 죽었어요. 묻으러도 못갔어요. 새벽엔 산으로 올라가서 총 팡팡 소리나면 나무 아래 곱았다가(숨었다가) 밤에 다시 내려오고 그러면서 목숨 살았어."
# 등록 위해 고지현까지 물질…찐빵 사업
오사카의 삶. 돈도 한푼 없고 아무 것도 모른 때였다. 스물에 제주시 신촌리 출신 남편과 중매 결혼. "양복 미싱하고 5년동안 공장에서 일했어요." 일본에서 태어난 남편은 해방 후 제주에 귀향했으나 3~4년 후 다시 일본행. 고모할머님이 4·3 피난을 보낸 것.
"돈도 없이 얼라들(아이들) 낳을 때가 가장 어려운 때였지요. 여기서 돈이라도 보내민 돈 많이 보냄젠 생각하지요. 거기 사는 사람은 한푼도 없이 궨당이 가면 잘해주고."
등록이 없으면 수시로 불안한 재일동포들의 삶. 고지현까지 물질하러 갔다. 오사카서 400㎞ 정도 거리. 가서도 배 타고 가야한다. "두 살 쯤된 맏아들 데리고 갔어요. 거기서 우미 조물고, 일본에서는 '백무사'라고 하는데 여기선 우미라고 하지요." 제주서 입던 소중이 그대로 입고 물질했다. 고지현에서 재판했다. 어찌어찌, 우여곡절끝에 아이들이 등록됐다.
이때였다. 찐빵장사를 시작한 것은. 빵장사는 될 것 같았다. 셋째를 낳고 빵 만들면서 아이들을 낳았다. 현재 강안자 가족의 가업이 된 도쿠야마물산의 시조가 된 것은 이때의 찐빵이다. "시어머니가 시루떡 한층 두층 하다가 남의 집 앞에서 팔았어요. 가게 없어서. 시어머니 부름씨 하면서 쑥 캐러 다니고. 삶아서 말려 장만하고 아이들 낳고 그랬어요." "찐빵은 잘 나갔어요. 먹을 것이 별로 없던 때, 구르마(수레)에 실어서 팔러 다녔어요." 뒷골목에서 구르마 밀고 나가 쯔루하시 역전에 나가 팔기 시작했다.
아이들 업고 안고 하면서 구멍가게 작은 것을 얻었다. 아이들 어릴 때 남편은 총련 활동가였다. 집에 들어오는 날도 드물었다. 돈을 벌면 우리학교 교실 짓는데 많이 보탰다. 그녀 역시 묵묵히 도왔다. 찐빵부터 조금하면서 시루떡, 떡국도 했다. 소문이 났다. '도쿠야마 떡집'의 떡은 신나게 팔려나갔다. 1965년 동경올림픽 경기가 살아날 때였고, 떡장수도 별로 없을 때였다. 할머니가 방앗간을 했다.
그녀는 가버린 남편의 노고를 항상 앞에 뒀다. "우리 학교도 살려야하니까. 집에 돈 한푼 없어도 걱정도 없었어요. 그날 그날 벌어서 살아야 하니까."
어머니표 찐빵에서 시작된 도쿠야마(德山)물산은 창의적인 맏아들 홍성익 회장이 중심이 돼 굴지의 기업체로 올려놓았다. 날이 갈수록 확장되고 있다.
# 동네가 인정하는 일 잘하는 그녀
밤낮없이 일하던 그녀. 그리운 고향바다를 본 것은 20년 전부터. 89년 남편이 한국적으로 바꾸면서다. 국전에서도 초대받으며 여러 전시회를 통해 주목 받던 맏아들이 계기였다. 남편은 이때부터 가래떡을 생각했다. 도쿠야마 가래떡은 날개를 달았다.
교사 생활을 하다 부모의 사업에 뛰어든 맏아들도 철도역에 국교 6년때부터 한말 두말 갖고 배달 갔다. 그것을 현대화하면서 방부제 쓰지 않는 것을 개발했다. "남편은 경쟁관계를 싫어했어요. 동기간의 화목을 가장 원했어요. 다 사이좋게 해야 한다고. 항상 조상님한테도 잘해야한다고. 집안이 옛날부터 민족성이 강했어요. 다들 우리 학교 보내야한다해서 다 우리학교 나왔어요."
맏아들의 귀띔. "이쿠노구에서 우리 어머님만큼 일한 사람 없을거예요. 다들 인정해요. 동네 생선집 개구쟁이 다들 우리 어머님처럼 일 잘하는 사람 없다고 했어요. 자존심이 높았지요. 학교 교육도 못받고 어머님 사랑도 잘 받지 못했고 까다로운 집안에 시집가서 차별도 받고 진짜 고생하셨어요." 일본에서 일본어 산수도 초보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했는지 대단하신 분이란다. 그런데도, 그녀, 그런다. "그때부터 고생은 많이 했지만 고생이라고 생각허지 안했어. 다들 교포들 고생했잖아." 그 힘,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맏아들의 말처럼 천진난만하고 긍정적 성격이 그러했으니 "아이들이 잘못해도 하하하 잘 웃으시고. 우는 것도 못봤어요. 잘못할 때도 웃으며 넘어갔어요. 어머님은 일어도 잘 못하셨어도 사업을 그리 했다는게 놀라워요."
# 제주도 다른 할머니들도 모두 강해요
고향생각? 아이들 클 때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허나 복닥거리며 살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일하다보면 다 잊어버렸다. "일만 하려니 생일 한번 못차려줬어. 벤또(도시락)도 싸준 적이 없어. 아이들 자랄 때 야쿠사가 많으니까 그게 젤 걱정이었어요. 하나도 불량하지 않고 자식들이 다 잘 자라준 것이 가장 큰 행복이야. 지금 여기까지는 기적이야. 제주도 다른 할머니들도 강해요." 산소에 가면 조상들이 아이들을 다 키워줬나한다고 생각한다는 수퍼우먼 강안자.
재일의 삶. 누군들 고통없이 일궜으랴만 그래도 자신은 행운에 속한다는 여인. 제주바다를 향한 그녀의 눈에 세월이 묻어난다. 일본의 몇 대 가는 사업을 유지하듯이 이제 '도쿠야마'도 가업으로 계속 이어갈 것이다. 다가오는 한가위엔 또 온가족이 한 여인이 이룩한 이쿠노구 이 댁에 모이리. 아마도 이 댁의 조상님들 빙삭이 웃으셨겠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