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재독화가 노은님

그렇다고 걸어온 길이 그리 녹록하기만 했겠는가. 허나 그의 올록볼록 여정에선 물소리 새소리가 난다. "나무에 눈을 달아주면 잎이 살아나고, 곤충들에 눈을 달아주면 날아다니고, 물고기들은 여행을 한다. 그것들은 먼 시간 여행을 떠난다."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 바로 오늘이다. 노은님의 11월 귀국 전시의 제목은 '가장 행복한 날은 오늘'. 행복한 오늘이 그저 오면 얼마나 염치없겠는가. "저는 공장장이라고 했어요. 내 머리는 밤에는 큰 공사장이고. 낮에는 마라토너다. 그만큼 바쁘게 뛰었어요. 치열하게 살았어요. 하나에 빠지니까 그랬겠죠."
제주를 사랑한다는 이 화가. 오래 조국을 떠난 이 답지않게 그의 어조는 하나하나 맛깔나고, 나붓나붓했다. 제주에서 며칠 쉬고 있던 그를 만났다. 그림 그리다 막히면 점 하나씩 찍는 버릇이 있다는 이 여자. 물고기 눈인지 땡땡이인지 점박이를 단 옷을, 땡땡이 하얀 스타킹을 신고 나타났다.
그는 호기심이 많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다. 느낀대로 산다. 그림도, 생각도 그렇다. 독일에서 훌쩍 40년. "세월이 너무 빨라요. 저는 무조건 멀리 가는 것만 좋아했어요. 향수병 있느냐고 묻잖아요. 저는 향수병은 없고 멀리가고 싶은 병은 있다고 그랬어요."
# 제주,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섬
아름다움은 등수를 매기는 것하곤 상관없다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야 말해 무엇하랴. 제주도는 충분히 아름답다. 하지만 거기에 문화가 많이 모자라다했다. 타인들에 대한 배려같은 것도 부족하다했다. 한국 사람들은 돈 내고 짓는 것은 잘하는데 소프트웨어가 없는 것 같다는 노은님. 제주도? 자연이 망가지기 전에 그것을 잘 지켜내는 일이 중요하단다.
"제주도가 너무 좋아요. 아무데 내놔도 안 떨어져요. 세계적인 관광지라고 하면서 문화를 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낮은 수준의 관광지가 될까 걱정이죠. 문화도시가 돼야해요" 문화를 갖고 얘기하는게 젤 중요하단다. "어디든 돈 없으면 젤 먼저 자르는게 예산이예요. 독일에는 휴양지에 휴양세가 있어요. 종교세도 있어요. 큰 돈내는 건 어렵지만 1마르크씩 내는 건 쉽잖아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관광지마다 조금씩 받아 문화에 투자해야해요. 스페인에서 아주 가까운 섬 있어요. 예쁜 섬 있는데 독일사람들 가서 다 누워서 관광하다보니 싸구려 관광지가 돼가요. 이렇게 아름다운 섬에 좋은 예술, 문화를 공유해야해요."
# 외로워서 그린 그림, 독일 병원에서 전시회
"어렸을때는 항상 벽에 붙었어요. 우리들 솜씨난에. 곱슬머리여서 베토벤 같이 생겼지만 화가가 되라고 했어요. 저하곤 인연이 먼 것 같아서 관심이 없었어요."
오래 잊고 지내던 자기 안의 그림을 그는 독일에서 발견했다. 간호보조원 시절. 고국이 그립고 뭐고 할 시간 없이 "먹는 것 자는 것 걷는 것 말하는 것 아이처럼 말 배우며 유치원처럼 살던"시절,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워서 외로웠던"그때. 심심해서 그렸다.
꽤 엉뚱했던 그의 재능을 알아본 것은 눈밝은 독일의 그 병원. 감기 들어서 결근한 그를 보러 간호장이 방에 들렀다가 수북이 쌓인 그림을 보고 놀랐다. 병원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어주었다. 독일기자가 물었다. 집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랬더니 함부르크 신문에 그렇게 나왔다. "그 여자는 항상 미소를 짓는데, 집 생각이 나느냐 해도 미소를 짓는다."
미술대학도 병원측이 주선했다.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 한스 티만 교수의 눈에 들었다. "가보니 30명 다 작가예요. 넌 어디서 배웠냐? 전 가라해서 왔는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그래서 그런지 맘대로 된 거예요. 화가가 된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기초가 없으니 대학 3년동안 배운다고는 했는데 사람 하나, 새 하나 그리고 창피해서 감추고 그랬어요." 방학에 뭘그렸냐는 교수의 질문. "꼭 뭘해야 하느냐고. 하도 사람들이 가라해서 간거니까 이건 내거 아니다 겉으로만 뱅뱅 돌아다니는 거야. 4년째 되니까 이것처럼 재밌는 것 없다. 이거 아니면 할 게 없다. 그때부터 그림으로 간 거예요. 제가 꼭 하려고 해서 한 것도 아니예요. 억지로 안돼요. 자연스러워야해요." 그는 '색깔이 예쁜' 마티스를 좋아하고. 힘이 있는 피카소를 좋아한다. 그의 지도교수는 간딘스키의 직계제자였다.
# 맘대로 멋대로 자란 유년의 힘 커
그의 미래를 일찍 눈여겨본 이는 백남준이다. 당시 교환교수였던 그는 78년 대학 미술전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좋다"했다. 이때부터 사람들만 만나면 노은님을 소개했다. 한국에도 그를 알렸다. 이 사람 두고 보라고. 노은님. 그는 인간미 넘치던 천재 아티스트 백남준을 기억한다. "문 열면 항상 누가 있었어요. 필요한 한 사람 항상 찾아와서 만났어요." 인복이라고 하면 그런거란다. 허나 그의 길에 왜 굴곡이 없었겠는가. 인종차별도 겪어야했고, 보이지 않는 갈등도 따랐으리.
"그래도 절망 그런 것 생각 안해봤어요. 이게 내 운명이다 그러고 살았지. 누구를 위해서 그린 것 아니예요. 좋은 날도 없고 나쁜 날도 없어요." 담담하나 유머 넘친다. 아마 평화로웠던 유년시절 덕이리. 칠공주에 아들 둘. 9남매의 셋째. 집은 유치원이었다. 운수업하던 아버진 온갖 동물 좋아하던 사람. "형제 많고 동물 많고, 맘대로 멋대로였어요. 집에서 하지 말라는 것 없었어요. 어른이 돼서 보니 저같은 어린 시절 산 사람 거의 없더라구요. 그게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데 갔다놔도 내가 푹 쓰러질 것 같다는 것 없어요. 전 사람을 잘 믿어요. 내가 해치지 않는데 저도 나를 해치겠나. 저는 동물도 식물도 똑같이 대접해줘요."
한국에선 걷다보면 안타까운 장면. 화분들 말라 비틀어서 길가에 나와 있는 것을 보는 것. "자기네들은 실컷 마시고 다니잖아요." 그의 생각. "제가 대우받는 만큼 남한테 해주면 하나도 자기한테 해되는 게 없어요. 특별하다고 하지않고 살면 똑같아요. 사람 사는 것은 하나의 심리전쟁이예요. 내가 이 사람한테 인정받기 전까지는 어깨에 힘도 주고 다하잖아요. 있는 척 없는 척 다 하잖아요. 이 사람 인정해주면 맘 탁 놓고 본인으로 돌아가잖아요. 그럴땐 되레 힘준 게 부끄럽잖아요."
# 서양과 동양의 다리 잇는 그림의 시인
"가을이면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흩어지는 맨몸의 나무로 서 있는 것 같다"는 노은님. 오래 그렇게 살아온 나무처럼 겸허하다. 오래 기를 모은 사람처럼 내면은 단호하다. 그림의 시인. 그는 시를 쓰고 수필을 쓴다. "좋은 화가가 되려면/좋은 술/깊은 사랑/오래 참고 견디는 힘/돈/그리고 행운이/따라야한다"(「좋은 화가」)고 생각한다. "좋은 시인이 되려면/불행과 고독/그리고/계속되는 나쁜 날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그는 새처럼 콕콕 시를 먹는다. 그의 예술, 삶과 철학을. 그의 시는 간결하지만 깊다. "나는 내 머리 속 깊이/나무를 심겠다/모든 꿈과 소원이/함께 자라는//나는 이 나무를/꿈꾸는 나무라 /부르고/나와 함께 자란/ 이 나무가/주렁주렁 열매를 맺으면/이 나무와 어디든지/ 갈 것이다"(「꿈꾸는 나무」) 그의 시는 쉽다. 동화같은 그림에 동화같은 시세계.
살아남기 위해 전쟁터 병사처럼 싸울 필요는 없는 것, 풀밭에서 뛰노는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는 그녀. 그에게 그림은 생의 놀이터가 아닐까. "사람이 사는 것은/한 순간이다/그러기에/사소한 일 가지고/싸울 시간조차/없다"(「한순간」).
그의 화실은 독일에서도 숲이 많은 오래된 동네에 있다. 긴 산책로 옆 낡은 성엔 아직도 늙은 옛 공주가 산단다. 그 앞에 마굿간 있고 물이 흐르고 다리로 연결된 작은 로코코성이 있단다. "숭어 밥 주고, 가재 밥 주고, 그림 그리며 살아요."
문화가 살아있는 도시가 돼야 생동감 있다고 생각한다는 노은님. "제주도에 세계의 아티스트들이 많이 찾아오게 하려면 돌문화공원이나 서귀포 같은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트페어 같은 것을 열면 좋을 것 같아요."
"언젠가 바다의 큰바위가 되어/파도가 쳐도/끄떡하지 않는/그런 여자가 되고 싶다"는 노은님. 떠나는 날, 공항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자유로운 영혼의 여자가 아이처럼 앉아 있었다. "쉰 여섯에 결혼한 같은 대학 교수 독일인 남편도 함께였다.
여기저기 돌아본 세상, 많다는 노은님. 그림속 자유처럼 그는 지구 한바퀴 반을 돌았다. 하여 관조의 눈, 그의 삶 앞에 맑은 생명체의 눈들이 그를 부른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