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길’에서 묻다] 중산간 잣성 따라 읽는 제주 목장史
목장 공식 유래 고려 충렬왕 2년 수평산 지역 말 도착부터
세종 11년 마정(馬政) 위해 축조…시간 품은 채로 오늘까지

# 말 그리고 제주

제주도 목장의 공식적인 유래는 몽고마 160마리가 1276년 고려 충렬왕 2년에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인 당시 수산평 지역에 도착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고려말 원나라 간섭기부터 제주에 대규모 목마가 시작된다. 1년 내내 목축이 가능한 제주도는 자연스럽게 원의 말 사육 거점이 됐고, 당시는 해안가 평야 지대에 목장을 조성됐다. 이후 100여년에 걸친 말 조공은 제주의 문화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그런 특성은 제주여성의 삶을 통해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기 삼별초의 제주입거와 몽골족의 제주지배 속에 만들어진 ‘아기업개’ 전설도 그 중 하나다. 다른 지역 여성과는 차별화되는 삶을 살았고 외부세력의 진입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의 해결에 앞장서기도 한다. 제주 말(言) 중 말(馬)과 관련된 말에는 유독 몽골어에서 유래됐거나 유사한 표현이 많은 것도 이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후 원이 망한 뒤 이곳에 사육되던 말들이 고려에 귀속됐고, 고려가 쇠한 뒤에는 조선조에 인계된다.
이후 조선 선조 27년 1594년에는 남원읍 의귀 출신 김만일이 제주마(濟州馬) 500마리를 조정에 진상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탐라순력도에는 ‘공마봉진(나라에 필요한 말을 고르다·숙종 28년 1702년)’이라 하여 나라에 필요한 말을 보내기 위해 각 목장에서 고른 말들을 제주 목사가 최종 확인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한 동안 우리의 옛 소리를 찾는 라디오 캠페인을 통해 ‘휘루루’하는 테우리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박물관 같은 데를 찾아가야 하지만 옛 테우리들의 복장 따위를 만날 수 있다. 지금도 매년 가을 제주마축제가 열린다. 한때 논란이 됐던 ‘말사랑싸움’에서부터 말을 아이템으로 한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사행성 운운하지만 가까이 말을 볼 수 있는 제주경마장도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승마장’도 성업중이다. 말고기 음식점에 마유를 이용한 미용제품도 줄줄이다. 최근에는 ‘말’만을 테마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도 눈에 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마산업육성계획을 내놓을 만큼 미래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고 있다. 오로지 ‘말’만 있다.

# 돌로 쌓은 기다란 담
그런 말을 기르기 위해 한라산 허리를 두 번이나 감아가며 쌓아올린 것이 다름 아닌 잣성이다. 잣성은 말을 기르던 목마장 경계에 쌓은 담장을 말한다.
군사상·교역상 마필의 중요성을 인식해 마정(馬政)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 세종 7년(1425년). 당시 해안가 마을들에서 농작물을 뜯어내는 말로 인한 민원이 거세지며 고득종이란 인물이 목장을 한라산 중턱으로 옮기고 경계에 돌담을 쌓을 것을 건의하면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산간 목장지대가 만들어진다.
세종 11년 1429년 8월 국마장이 설치되며 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10소장 체계가 갖춰진다. 잣성은 그 경계로 쌓아올려졌다.
왜 잣성이라 불렀을까. 사실 제주말 ‘잣’은 ‘널따랗게 돌들로 쌓아올린 기다란 담’을 뜻한다. 아마도 여기에 국가가 관리한다는 무게감을 더해, 아니면 그 정도로 규모가 크다고 해서 ‘성(城)’이란 말을 얹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추측이다.
조선시대에는 ‘장원(牆垣)’이라 불렀고, 지역에서는 ‘잣’또는 ‘잣담’이라 했고, 목장에 쌓은 성이라 ‘장성(場城)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제주도의 지형도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용어로 현재는 학술적인 측면에서 통용해 쓰이고 있다.
잣성은 쌓인 위치에 따라 ‘하잣성’, ‘중잣성’, ‘상잣성’으로 구분된다. 시대순으로는 ‘하잣성’, ‘상잣성’, ‘중잣성’의 순이다.
하잣성(해발 150~250m 일대)은 세종대 축조된 것으로 해안지대의 농경지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와의 경계 부근에 쌓인 돌담이다. 일단 말들로부터 농작물을 막기 위한 목적이나 중산간 지대에서 부분적으로 행해지던 농경지 개간을 막고 안정적으로 말을 사육할 목마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외에 간장(間場)이라고 불리는 잣성도 있었다. 대부분 목장들이 하천을 중심으로 자연 경계를 이루곤 했는데 제주 지형 특성 그러지 못한 곳에서는 경계 구분 용도로 돌담을 쌓았다. 간장은 조선 후기 설치된 산마장 침장, 상장, 녹산장에서 확인된다.
잣성의 흔적을 찾아 표선면 가시리를 찾았다. 목축문화를 중심으로 한 테마마을을 조성하고 있는 곳이다. 손전화 하나만 믿고 길을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날씨 탓에 마을 어르신을 직접 청하지 못하고 안내만 받는다. 길 안내가 구수하다. “일단 사잇길로 쭉 올라강 보믄 왼편에 무덤 같은 게 이실거라. 그 안터레 강 살펴봐봐. 뭐 보이지 안암서. 무슨 표지가 이실거라. 그냥 옛날부터 있던거난 이섬신가 하주”.
이 곳 잣성 역시 시간을 거스르진 못했다. 일부가 품고 있는 것이 전부다. 중산간이 개발되면서 제일 먼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 잣성이었다. 오래전부터 제주 잣성을 연구해온 강만익씨가 지난 2010년 발표한 논문 ‘조선시대 제주도 잣성 연구’(제주대탐라문화연구소 「탐라문화))에 따르면 잣성의 총길이는 해발 150~250m에 위치한 하잣성 43㎞, 해발 350~400m의 중잣성 13.4㎞, 해발 450~600m 일대 상잣성 3.2㎞ 등 약 60㎞에 이른다.
선형(線形)유물로서는 제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에 남아있는 역사유물 중에서도 가장 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이 잣성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가 되기도 전에 소리 없이 훼손되고 있다. 우후죽순 자리를 잡은 골프장이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실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잣성을 탐사한 결과 산간지대에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확인됐을 뿐 도로 건설과 농경지 확대로 인한 훼손 속도가 빠르다는 것이 강씨의 지적이다. 일부 지역은 소멸에 가까운 상태로 안타까움을 샀다.
강씨의 조사 결과만이 아니더라도 잣성은 조선시대 대규모 공사가 제주에서 이뤄졌음을 입증해주는 유적이자 제주 목장사와 목축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다. 논문을 통해 비교적 보존가치가 높은 잣성 5곳을 제안하기도 했다. 제주시 회천동과 조천읍 와흘리 경계선, 교래리 구두리오름 상잣성, 한남리 사려니오름 상잣성, 가시리 대록산 중잣성, 가시리 번널오름 갑마장 잣성 등이다.
가시리 대록상 중잣성은 ‘갑마장길 기행’등으로 상품화되고 있다. 기념물이나 민속자료로 지정하는 작업은 다소 더디다.
그리고 슬쩍 도의 돌담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소식이 들린다. 그동안 개인 재산 침해 등의 이유로 시도하지 못했던, 하지만 제주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그 가치가 충분하다는 이유다. 제주의 상징인 환경자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행 프로그램도 만들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돌담’인걸까. 잣성의 흔적을 더듬고 돌아오는 길. 자꾸만 물음표가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