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제주 말산업이 뛴다] 1. 제주마의 역사

석기시대부터 제주지역에 말 서식
각종 기록·흔적 도내 곳곳 남아
고려 몽골 점령 후 본격 사육 
이용가치 떨어져 사육필수 급감

제주는 예로부터 사나운 짐승들이 없어서 말 기르기에 적합한 곳으로 일컬어졌다. 또한 오랜 세월 제주는 ‘말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도 그 명성은 이어져 오고 있다. 흔히 부르고 있는 ‘조랑말’이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적 동물임은 누구나 부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제주마의 역사는 제주의 역사와 함께 한다.

△제주마의 유래

기록에 근거한 제주마의 기원을 흔히 고려 충렬왕 3년(1277년)에 원이 제주에 목장을 설치하면서부터라고 말해지고 있지만, 그러나 몽골이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제주에서 말을 키웠던 흔적과 기록은 곳곳에 남아있다.

제주에 말이 서식한 시기는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의 사람과 척추동물 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64호) 등으로 미뤄볼 때 구석기말부터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고 있지만 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유적지인 덕천 승리산, 제원군 점말, 청원 두루봉 등과 삼성신화의 망아지·송아지·오곡 이야기, 「고려사」지리지 탐라조에 고을나·양을나·부을나가 사냥을 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고 살았다는 기록과 곽지리 패총,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의 치아(이빨) 등으로 미뤄볼 때 제주에 말이 서식한 시기를 석기시대 말기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 기원전에 만주 서남방에 살았던 예·맥족의 과하마, 만주 중앙부의 부여와 남방의 고구려 3척마의 사육한 것과 한바도에 들어온 동예도 과하마를 생산·수출했다는 자료 등 북방 유목민의 의식주 풍습과 제주를 비교했을 때 그 유사성 등으로 미뤄 제주마가 이들과 연계성이 있다는 학자들도 있다.

그리고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마한조에는 주호(제주도)의 기록에는 제주도에 소와 돼지를 사육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중국과 한반도와 교역했다는 말은 있지만, 말을 사육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백제 무왕 10년(610년)에 탐라에서 준마를 백제에 바치자, 백제에서는 이 말을 당나라에 바치니 당왕은 ‘과하마’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는 대형종 말을 사육했지만 당나라 왕실에는 과하마를 진상했다는 것과 후백제 27년(918년)에 탐라는 공마를 오월에 바치고 중대부의 벼슬을 받았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이어 고려 현종 16년(1025년)에 목감양마법, 문종 25년 도거(섬에 설치한 목장) 관리를 제정한 후 문종 27년(1073년)부터는 계속 탐라국에서 예물로 말이 진상돼 문·무관에 하사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본격적인 제주마 사육

제주에서 본격적인 마사육이 시작된 것은 고려 원종 14년(1273년)에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 일대에서 평정된 이후 일본·남송 공략의 군마 공급지로 만들고자 몽골군이 주둔하게 된 13세기 후반부터의 일이다.

충렬왕 2년(1276년)에 몽골에서 대완마 160필과 마 전문가들인 목호들이 탐라국에 들어와 현재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몽골식 마목장인 탐라목장을 건설한 것이 제주도 목마장의 기원이다.

충렬왕 3년(1277년)에 목마장을 관리·감독하기 위해 동·서아막을 설치했다. 동아막은 수산평에 설치돼 동부지역(동도, 정의)을 관장케 하고, 서아막은 한경면 고산리에 설치돼 서부지역(서도, 대정)을 관리했다.

고려말 공민왕 때 제주도는 다시 고려에 귀속되고, 친명정책에 따라 말 관리도 직접 하게 됐다. 하지만 몽골 출신인 목호들은 ‘원나라의 원수 명나라에 말을 내줄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켜 관리들을 살해했고, 이에 1374년 최영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 이들을 진압했다.

조선시대의 마목장은 세종 11년(1429년) 제주출신 고득종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해안지역의 촌락과 경지와의 경계를 돌로 하잣을 쌓기 시작해 성종 24년(1493년) 이전에 완성돼 이를 10개로 나눠 10소장(목장)이 설치됐다. 각 소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잣은 제주어로 성의 뜻이며, 제주도 중산간의 소장(목장 또는 목마장) 경계에 돌들을 길게 쌓은 돌담을 말한다. 이를 흔히 잣 또는 잣성이라고 부른다.

한라산 고산지대(산림지대)에 쌓은 것이 상잣이고, 다른 소장의 계곡이나 산림지대로 흩어져 죽거나 찾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큰 하천을 이용하거나 돌을 쌓았는데, 이를 간담(선잣)이라고 했다.

제주목마장은 중앙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 병조 및 사복시 지휘감독아래 전라감찰사, 제주목사, 감목관(제주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 겸임),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 순으로, 계급적으로 배치돼 운영됐다.

말을 직접 사육하는 가장 하위 계급인 목자들은 관리들의 행패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풀이 없는 초봄이나 겨울이 되면 굶주려 죽는 말이 많았고, 목자는 죽은 말 가죽을 벗겨 관가에 바쳤다.

관가에서는 장부의 기록과 말이 저절로 죽은 것이 증명되면 가죽만을 받았지만, 관리들은 막무가내로 말의 죽음을 목자의 책임으로 돌려 말 값을 물어내게 했다. 이로 인해 목자는 말 값을 물려고 재산을 팔아야 했고, 심지어 친척들까지 배상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에 목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등 제주마의 목축 역사에는 비극이 깔려있기도 했다.

또 조선시대 제주도내 말 사육필수는 태조 7년(1398년)에 4414필, 세종 11∼16년(1429∼1434년)에 1만여필을 사육했고, 숙종 28년(1702년) 탐라순력도에는 국가가 사육한 말과 개인이 사육한 말 등 모두 2만여필이 사육됐다고 추정되고 있다.

제주마는 탐라국 초기부터 백제와 신라에 예물로서 조공했으며, 일본과 당나라와 교역을 했다. 고려 문종 때에는 탐라국에서 예물로 진상된 제주마를 문·무관에게 하사했다.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매년 수십필에서 수백필까지 국가에 바쳤고, 각 지방에 오늘날의 관용차처럼 제공됐다.

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전쟁에서 타고 다니던 여덟 필의 말을 8준마라고 했으며, 이 중 위화도 회군시에 탔던 말이 제주마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실록에 보면 제주도는 국내 최대의 목마장으로서, 임금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파발마, 태마, 만마, 복마 등 다양하게 활용됐다.

조선시대 이후 일본강점기, 4·3사건, 한국전쟁 등과 농기계 보급 등 제주마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면서 1986년에는 제주마 사육두수가 1347필로 현저히 감소했다. 이 때문에 정부는 같은해 2월 제주마 64필을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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