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길’에서 묻다] 제주 잠녀의 길 1

물질을 하러 나서던, 묵직한 망사리로 힘겨웠던 기억들

“물숨 아닌 세월이 잠녀 잡아”…‘풍중’대신 ‘도로명’자리

 

고개만 돌리면 바다가 있다. 물질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 했을 만큼 제주에서 태어난 여성들에게 바다는 숙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디 기침소리라도 들릴까. 눈을 뜨건, 눈을 감건 바다 사정부터 살핀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저절로 익힌 것들이다. ‘제주 여성은 강하다’가 아니라 ‘제주 여성이어서 강하다’다. 바다, 그리고 그 것을 닮은 제주의 어머니 ‘잠녀’가 슬쩍 일러준 말이 귓가를 맴돈다.

 # 눈 뜨던 감던 바다 사정부터

 

"새벽에 일어낭 영 들으믄 아마도 문이 덜렁덜렁 해가믄 누가 거느리지 않아도 속에서 부에가 확 나고, 아마도 문이 소리가 안 나면 마음이 노롯해 진다(새벽에 일어나 작은 유리문이 덜컹소리가 나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속에서 화가 나고, 문 소리가 나지않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이 그 땐 무슨 뜻인고만 해신디, 이제는 알아지크라”

손주를 둘이나 봤다는 한 잠녀의 기억이 데굴데굴 굴러온다.

고무옷이 없던 시절, 줄잡아 1970년대 이전으로 시계를 되돌린다. 미역을 조물자 마자 바다에서 나와 불을 쬐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였던 그 때 한 상군 잠녀가 했던 말은 대물림 하듯 어린 잠녀들에게로 이어졌다. 바다밭 사정은 며느리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을 만큼 꽁꽁 싸매뒀지만 바다를 살펴야 하는 이유만큼은 분명했다.

행여나 물질을 못하게 될까 가슴 졸이던 심정은 세월을 타지 않는다. 잠녀들이 바다를 살피는 방법도 다양하다. 어떤 잠녀는 멀리 바다가 하얗게 일어나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오늘 작업을 글렀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밭에서 작업을 하다가도 물때만 되면 하나 둘 채비를 서두른다. 밭의 것이야 내일 와도 그대로지만 바다는 때를 놓치면 하루를 공치는 셈이니 물질에 우선순위를 둘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선 길은 언제나 똑같다. 허겁지겁 걸음을 서둘러 바다로 같고 엉금엉금 무거운 발을 옮겨 집으로 온다. 처음에는 그나마 단정했던 머리며 옷 매무새가 돌아오는 길이면 금방 조문 미역처럼 축 늘어지기 십상이다.

지금은 스쿠터 같은 것이 있어 요란한 소리로 시동을 걸고 신나게 내달릴 수도 있고, 자신의 이름표를 턱하니 붙인 짐수레도 이용할 수 있지만 예전엔 막무가내 걷고 또 걸었다. 그나마 허리가 뻐근하고 몇 번 발을 멈출 정도의 묵직함만 있다면 견딜 수 있는 길이었다.

 

# 힘들고 고단한 걸을 수밖에 없는

잠녀의 길은 크게 세 가지다.

물질을 위해 바다로 나서고 또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있고, 바다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물건을 찾아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삶을 영위한다는 이유로 섬을 떠나 만든 길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이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첫 길을 밟는다. 제주 해안에서 만나지는 바다로 향한 길이다. 길에 끝이 있다. 바다다. 그 길에서 잠녀들은 한번 심호흡을 하고 바다를 품는다. 바다는 한 번도 품어준 적이 없다. 자신의 가슴을 그렇게 헤집는데 ‘좋다’반길 이유가 없다. 지금은 간간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는 잠녀 이야기가 들린다. 찬찬히 살펴보면 바다에서 물숨을 들이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손으로 꼽을 정도다. 대부분의 사고가 바다를 벗어난 이후 발생한다.

“이젠 다 늘겅 아무 것도 몰라" 손사래를 치는 서귀포 대포동 김 절 할머니(92)의 기억만 더듬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87살까지 물에 들어 제주 현직 잠녀 중 ‘최고령’이라는 타이틀이 한 번도 내려놓은 적 없는 할머니다. 심지어 지팡이에 의지해 바다로 나가고 작업할 때는 그것을 테왁망사리에 걸어두곤 해서 ‘막댕이(막대의 제주어)할망’이라는 애칭까지 들었다.

할머니가 70년 물질을 그만 둔 것은 물에 나섰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의 일이다. 늘 바다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한 할머니가 말한다. “예전에는 물숨을 먹고 죽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잠녀를 잡는다”. 맞는 말이다.

 

# 모습, 의미 바꿔가는 아쉬운 풍경으로

잠녀의 길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지금은 1t트럭까지 동원되지만 예정에는 ‘풍중’이라 부르는 이가 있었다. 미역 채취량이 많았던 1960·70년대 작업 시기만 되면 등장하는 도우미들이다. 망사리가 넘치도록 미역을 조물고 나면 힘이 빠진다. 여기에 파도를 거슬러 뭍으로 나가는 일은 작업하는 일보다 더 고되다. 자칫 손이라도 놓치고 발이라도 헛디디는 순간 크게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때만 되면 어른이고 아이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닷길로 마중을 나왔다.

잠녀들이 나이를 먹는 만큼 망사리도 점점 가벼워진다. 그래도 풍중이 있다. 고령의 아내나 어머니를 기다렸다 뭍으로 오르는 길을 도와주는 ‘잠수 서방’이란 농담에 웃을 수가 없다.

“…삼돛 안 배질호긴/선주사공 노념이고/한질 두질/수비친 물에/삼시굶엉 물질호영/한푼 두푼 모인 금전/정든님 술값에 다들어간다/어기야차 소리엔/배올라 가는다/뒤야차 소리엔/닻감아 가는구나…”

네(노)젓는 소리가 미역처럼 몸을 휘감는다. 노잠녀들의 기억 속엔 아직도 바닷길이 훤하다.

“개염여, 너븐여를 영 지낭 벌러진여를 지나가믄…”. 그들만의 길에는 그들만 알 수 있는 이정표가 있다. 지금은 아무리 애를 써도 보이지 않는다. 위도 몇 도, 경도 몇 도 하는 숫자가 더 익숙하다.

바다로 향한 길에 지금은 시멘트 포장이 되고, 어딘가에는 도로 이름이며 주소도 붙여졌다.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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