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 시인의 '규슈올레를 걷다'

   
 
  다케오 올레. 사람들이 숲속의 호수 다리를 건너고 있다.  
 
   길은 제주올레의 길라잡이 '간세'에서 시작된다. 지난달 28일 개장한 일본 규슈올레. 제주올레의 한류 길 수출 1호. 일본 매스컴도 놀랐다. 왜 규슈는 덥석 제주올레를 수입했을까. 동일본대지진의 참화 1년. 방사능 진원지 후쿠시마와 후쿠오카는 1000㎞ 떨어진 거리. 허나 그 후유증은 규슈까지 강타했다. 가장 많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35%이상 떨어진 것. 그들은 솔직하게 말한다. 제주올레 브랜드의 힘을 활용해 매력적인 하이킹 코스를 만들자는데 착안했다고. 규슈올레 4개 코스는 지역 공무원이 발품을 팔며 찾아낸 길이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참가했던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은 일본의 동경·오사카 등 일본내의 사람들에게 치유의 길로서 더 사랑받을 수 있기를 기대했다.

 제주 고유의 이름 '올레'의 '문'은 이제 세계를 향해 열렸다. 브랜드 수출? 제주어의 확장과 동반 상승의 효과를 의미한다. 규슈 사람들이 4월엔 제주올레를 걷는다. 규슈 올레. 산과 들, 바당올레, 화산땅 제주의 돌과 같은 색감. 숨은 숲길에선 신음이 터진다. 어디서나 제주도를 꼭 닮은 듯한 익숙한 풍경이다. 규슈올레? 어디를 꼽겠는가. 그 물음엔 당신의 취향대로다. 아득한 산천과 농로, 죽림과 도자기와 역사의 길, 온천과 바다 어디든 규슈의 속살은 자기만의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함께 규슈올레를 걸었다. 4개 코스를 걷는 동안 사흘간 비가 내렸고, 때로 반짝 볕이 났다.

 빗속을 걷는다. 섬의 생명력을 느낀다. 이땅에, 그리고, 모순으로 얼룩진 나의 땅 아름다운 제주도, 길의 평화를 염원하며 걷는다. 걸으며 온 몸으로 받는다. 규슈올레 곳곳에서 온 몸으로 밀어내 꽃을 피우고, 온전히 몸으로 밀어내는 매화의 생명력을, 이리저리 널린 유자향을, 산과 바다의 기운을. 그렇게,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친절함을, 참화의 시간을 견디고, 봄은 피어나고 또 오고 있음을.

 소소한 길 위에는 낙화하는 것들이 있다. 푸른 대숲에 작은 떨림들, 바람이 비틀거린다. 역시 길은 한사람이 걸을 만큼 좁은 길이 매력적이다. 빗소리에 몸서리치는 죽림의 길. 오래된 대나무들은 꼿꼿하다.
조선 도공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길을 걷는다. 그 도공의 후예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가마를 만들었을까. 120개의 가마라니. 길은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어진다. 언제 화산의 격렬한 요동이 있었는가. 그 고통을 넘어 화산은 1300년된 순도 100%의 다케오 온천을 선사했다.

   
 
  사가현 다케오 신사의 거대한 녹나무. 수령 3000년의 명목이다.  
 
  다케오 신사의 거대한 녹나무 앞에서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수령 3000년의 명목. 저것은 그냥 나무가 아니다. 사람들 정신의 안식처다. 떠났다 고향에 돌아오는 자들, 이 위대한 스승 앞에서 두손 모은다. 5월, 진초록의 계절엔 더 왕성한 잎을 피우리. 지구 환경을 몸으로 표현하는 지구의 안테나다.

 뿐인가. 멀지 않은 곳에 3000년의 세월을 몸으로 받아냈다는 또 하나, 사가현의 츠카사키 녹나무. 저것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40년 전 벼락이 떨어져 쪼개버렸다니! 이리저리 난 혹, 깊게 파인 구멍, 어느 하나 성치 않아 뵌다. 온갖 내·외부의 힘에 순응한 흔적이다. 안그랬다면 일본 제일의 녹나무 자리를 내주지 않았을 거다. 허나 젊은 한때를 연상하게하는 장엄한 위용에 압도당한다. 쪼개진 몸의 안으로 들어가 흙색의 살과 질감에 손을 대본다. 거룩한 노스승이 그런다. 함부로 하지 말라, 인간아. 저 거목은 시간의 흔적이다. 시간을 살아낸 자의 함성이다.

 좌 대숲, 우 수국. 젖은 몸이 도열한 곳을 지났을 때였다. 적막한 산사에 피아노 소리가 흐른다. 규슈 최대의 마애석불이 있는 후쿠지 절. 이름하여 '피아노절', 아마도 저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도, 지장보살들도 이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겠다.

 연녹색 이끼가 생존의지를 보이는 돌담을 구비 돌아서 간다. 오지를 걸어야 하는 오쿠분고 올레. 하여 더 자연으로 돌아간다. 산비탈의 묵정밭, 비에 젖어 질척질척한 다랭이 논밭이 늙은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 충청도 출신은 한국에도 흔한 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논의 배치에 탄성이 난다. 거목엔 여지없이 제주 비자림의 나목에 다닥다닥 기생하는 초록 콩짜개난같은, 이끼 같은 것들, 살려고 애를 쓴다.

 어디서 치는 장쾌한 물소리. 아소산의 분화 때 이뤄진 암반은 강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소가와 주상절리를 이룩했다. 조심스럽다. 제주의 주상절리와는 전혀 다른, 아기자기한 걸작이다.
비구름으로 휘장을 두른 잡목들, 멀리 안개바다에 휩싸인 봉우리들은 신령스럽다. 오카성 터 가는 길은 과거의 길이다. 안개비가 붓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칠한듯 안 칠한듯 첩첩 한 폭의 수묵화다. 절벽 아래로 인간의 차들이 쌩쌩 지난다. 아마쿠사 이와지마에서도 제주의 전형적인 어촌 풍광을 만난다. 조망하기 좋은 산봉우리에 안개가 휩싸였다. 아쉽다.

   
 
  아소산의 분화 때 이뤄진 암반에 강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소가와 주상절리.  
 
  JR최남단역 니시오야마(西大山驛)에서 출발하는 이브스키 올레. 태양의 땅이라했던가. 세계에서 유명한 천연 모래찜질 온천도 품었다. 제주올레 10코스를 닮았다. 좁은 밭두렁 사잇길로 제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조랑조랑 작두콩. 화산땅 검은밭과 유채꽃. 뾰족 솟은 삼각 봉우리의 가이몬다케(924m)와 함께 걷는 길. 간이역은 시적이다. 철도의 시작에서 철도의 끝까지 걷는 길. 역에는 행복을 전해주는 노란 우체통 두 개. 역시 길에서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고 가라는 신호다. 행운을 불러준다는 종도 쳐본다. 규슈올레 4개의 코스 중 가장 나른하고 굴곡이 없다. 홀로 걸어야 할 만큼 좁은 잡목 숲길. 그 숲으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바스라진다.

 나가사키바나 아름다운 해안선을 걷는다. "먼저 걸은 사람의 발자국 위를 밟으면 쉬워." 애순씨가 그런다. 그렇지. 카이몬다케는 어느새 구름 모자를 둘러쓰고 있다.
바다 모래밭 위에 두 황혼이 앉아있다. 저 두 노인은 지팡이를 모래에 꽂아 놓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석양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규슈(九州)는
일본 최초의 문명을 꽃피운 역사의 태생이자 문화의 창 역할을 한 섬. 일본을 구성하는 4개의 큰 섬 중 한국과 가장 가까운 곳. 부산에서 남쪽으로 200㎞. 한국의 절반면적에 인구 1300만명. 7개의 현 가운데 이번에 개장한 4개의 코스는 사가현 다케오 올레(14.5㎞), 오이타현 오쿠분고 올레(11.8㎞),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의 이와지마 올레(12.3㎞), 가고시마현 이브스키 올레(20.4㎞). 모두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는 코스들이다(규슈관광추진기구 홈페이지: www.welcomekyushu.or.kr).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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