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길에서 묻다-모슬포 알뜨르 ‘눈물길’

조선 시대 유배의 기억 넘어 근·현대사 그늘 벗어나지 못해

일제 군사기지·섯알오름 ‘백조일손’ 등 아릿한 동통과 동행

 

 

▲ 1950년 8월 예비검속으로 붙잡혀온 지역주민들이 감금됐던 옛 고구마저장고 터. 시간이 흐르며 그 때를 기억하는 길만 남았다.

무언가가 땅 밑으로 끌어내리는 느낌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 길에만 서면, 그저 그 길만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사연이 많기도 힘들다. 어느 순간 편하게 마음 한 번 내려놓지 못하고 하릴없이 걸음만 옮기게 되는 길. 섬을 감싸는 길에서 역사를 읽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지만 온전히 대면하는데 보통 내공으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바닥은 평평하지만 칭칭 가슴을 옭아매는 친친한 기운에 제대로 발을 딛기가 어렵다. 역사가 만들어낸 깊은 골이다.

 

# 외세 거친 발길 ‘못살포’

길을 나섰다. 일제의 대미 최대 일선 대공방어기지에서 민간 학살의 현장으로 다시 한국전쟁 당시 군사시설로, 제주 서남부 대정읍 모슬포 알뜨르 땅은 기억해야할 역사의 공간으로 제주 근·현대사의 한 가운데 서있다. 하지만 섬의 바람은 그보다 더 멀리 가야 한다 연신 등을 떠민다.

요상한 기계음을 휘날리며 시간을 되돌려 찾아간 그 곳은 회한과 원한 따위로 범벅이 돼 있다. 그냥 길을 걸을 뿐이다. 제주 섬에서 가장 모질게 바람이 불어서, 태평양을 향한 넓은 가슴 탓에 외세의 거친 발길에 뭇매를 맞은 탓에 ‘못살포’라 불리는 그 곳은 쉽게 자신을 내보이지 않는다.

공들여 찾아간 길, 어김없이 바람이 불고 짙은 안개 끝에 추적추적 비까지 흩뿌린다. 잔뜩 웅크린 어깨에 어설프게 뜬 눈 앞으로 흐릿한 그림자가 지나간다. 하나가 아니다. 둘, 셋 아니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인간 군상이 무리를 지어간다. 애를 써도 표정을 읽을 수 없다. 대신 아릿한 동통이 후벼 파듯 가슴을 때린다. 아프다.

근·현대사의 상처는 무딘 날로 만든 상처마냥 쉽게 아물지 않는다. 사실 그 길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많은 역사를 품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곱씹게 하는 묘한 느낌의 올레 11코스며 집념에서 인연, 사색으로 이어지는 추사 유배길이 동맥처럼 과거를 실어 나른다.

▲ '위리안치'. 정작 추사 김정희는 제주 섬 곳곳을 둘러봤지만 담장 밖을 넘지 못하게 했던 유배의 고달픔에 시선을 뒀던 올레는 가깝고도 멀게만 느껴진다.
조선시대 제주, 그리고 ‘대정’은 말 못할 아픔을 품은 유배지였다. 당쟁과 사화의 희생자 등 200명에 가까운 유배인이 제주와 인연을 맺는 동안 이 땅은 저절로 단단해졌다. 고증을 거쳐 1984년 복원된 추사적거지의 낮은 담장을 따라 그가 추사가 애틋해했다는 제주 수선화가 피었다. 8년 3개월. 탱자나무 담장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는 위리안치의 형벌을 받았던 그였지만 넉넉히 제주를 품었다. 제주추사관을 따라 송계순 집터와 정난주 마리아묘를 거쳐 대정향교로 8.6㎞의 ‘집념의 길’이 이어진다. 정난주 마리아묘는 천주교도인 정난주의 무덤이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딸 정난주는 1801년 남편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돼 제주목의 관노로 유배된다. 그녀는 신앙에 의지해 3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추사가 유배되기 2년 전인 1838년에 눈을 감는다.

 

# 아직 아릿한 근·현대사의 상처

휘적휘적 마을 안으로 들어서다 멈칫 발이 멈춘다. 시계는 ‘1950년 8월 20일 새벽 4시’를 가리킨다. 수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제주4·3이 진정된 후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예비검속된 210명의 마을 쥔들이 감금됐던 을씨년스런 고구마 저장소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생활용품 매장으로 모습을 바꾼 지 오래다. 앞으로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이른 새벽 끌려 나갔던 사람들은 까닭도 모른 채 목숨을 잃고 암매장됐다.

▲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기도 전 영문도 모른채 목숨을 잃어야 했던 사람들의 구슬픈 울음 소리가 뱅뱅 귓가를 맴돈다.
모슬포 시계탑 사거리를 따라 대정중 앞을 거쳐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 주민들은 목숨줄마냥 서로의 손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나 둘 신발과 허리띠를 던지기 시작한다. 누군가 자신들의 가는 길을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조각조각 길이 됐다. 일제가 남기고 간 섯알오름 탄약고터는 고스란히 무덤이 됐다. 무눈과 입, 귀를 막고 그것도 모자라 가슴까지 막아선 역사는 무려 5년 9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 트였다. 그렇게 찾은 ‘가족’은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이 녹고 뼈가 엉킨 상태였다. 여러 성씨의 아들들이 하나로 엉킨 비극적인 상황으로 1993년부터 ‘백조일손(百祖一孫)’의 이름으로 합동 위령제가 치러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웅웅 울음소리가 난다. 아픔이 아로새겨진 울음의 시작점은 좀 더 시간을 돌려야 찾을 수 있다.

송악산의 바닷가 해안절벽에는 일제 강점기의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의 본토 상륙에 대비하기 위해서 제주도 구축한 ‘결사항전’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거친 바닷바람에 제주에서는 흔한 귤나무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는 황량함의 상징인 이곳은 단지 태평양을 향해 있다는 이름으로 근·현대사의 굴곡을 뒤집어썼다.

아직도 남아있는 알뜨르 비행장의 흔적은 중국을 폭격하는 중간기지에서 전쟁말기 ‘결7호 비밀작전지역’으로 미국 상륙에 대비한 군사력 집중기지였던 아픔으로 점철된다. 해안진지 동굴, 19개의 격납고, 잔디밭 활주로 등 일제의 흔적은 ‘근대 건축문화유산’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보태지며 기억되고 있다. 단순히 기지만 보면 그 터 어느 한 구석 대정 주민들의 땀과 피가 어리지 않을 곳이 없을 정도다.

▲ 멀리 섯알오름이 보인다. 태평양을 향한 지형에 잔디 비행장까지, 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이 땅은 그래서 더 많은 상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군용비행장 등 군사시설은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한국군이 그대로 물려받는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이곳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됐다. 그렇게 사람들이 오고 가면서 한 때 제주의 대표적인 상업 거리로 자리를 잡았다지만 지금은 다 옛말이다.

아프다는 소리 한번 제대로 내보지 못했던 그 곳을 살피는 내내 발이 무겁다. 다 채워지지 않는 안타까움에 ‘들어가면서 울고 나오며 다시 우는’ 섬의 사정이 밟힌다. 더디 가라, 그만가라. 3월을 다 넘기도록 기세등등한 칼바람이 귀를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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