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동복리 소리꾼 양금녀

 아버지가 부르던 소리입니다. 죽은 자들 영혼을 달래던 소리, '회심곡'이지요. 허나 그 소리는 산자들 복받게 하는 소리입니다. 어려서부터 북망산천 불렀다는 제주 동복리 소리꾼 양금녀. "우리 제주도 어머니들은 옛날에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밭에 가고 물에 들고. 회심곡은 어머니 가심(가슴) 풀려고 하는 겁니다. 스트레스 없이 다들 건강하게 살라고 하는 겁니다. 영혼들은 영혼들대로 풀고. 김녕 오름이 북망산천이우다." 어려서부터 목청이 살아있다했습니다. 부끄럼 많던 열여섯부터 '행상소리'하다보니 북망산천 가면 목이 탁 터지면서 통하게 된다는 '회심곡' 문화재. 삼십대에 죽음 문턱갔다가 '회심곡' 부르면서 살아났다는 이 소리꾼, 만났습니다. 동복리 그의 집이 보이는 마을어귀, 연두 봄물 피워 올리는 늙은 팽나무 아래서.

 # 퉁소소리 아버지 무릎에서 노래 배워

   
 
 

 동복리 소리꾼 양금녀는

 1942년 김녕리 출생. 2006년 북제주군 향토무형문화유산 제3호(동복리 회심곡)로 지정. 1955년 제주 양천길 민요노래 사사. 제주탐라민속예술단. 한국국악협회 제주도지부 회원. 2005년 제주동복민속예술단 창설 단장. 1986년 KBS전국민요경창대회에서 영주십경으로 최우수상 수상. 1982년 1월부터 4월까지 재일본 제주도민회 대판초청 공연때 고 김주옥 명창과 참가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2000년 제158회 국립민속박물관 민속한마당 토요상설공연 출연. 한라문화제, KBS 국악한마당 등 각종 공연에 참가. 1964년 부터 불교신도 및 재일동포들을 위한 공연을 하거나 4·3으로 억울하게 떠도는 위령을 위한 회심곡 상여곡 등을 불렀다. 2010년 '상여소리'와 '회심곡' CD 출반.

 
 
아버지 목청은 퉁소소리였습니다. 지나던 사람도 그 소리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 목청이 하도 좋아서. 여기 바람 불면 북촌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합니다. '밭볼림소리'를 하면 4·3으로 홀로된 어머니들이 다리 뻗고 탄식을 했다해요." 서우젯 소리, 밭볼리는 소리, 따비질 소리 등 제주민요와 회심곡. 아버지의 회심곡은 불가의 회심곡이나 경기민요의 회심곡과는 좀 달랐지요. 그것은 망자의 영혼을 달래는 소리이자 산자의 가슴을 위로하는 소리였습니다.

 1남 5녀 중 막내딸 양금녀. 그 아버지는 그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서김녕 갯거시에서 태어난 다섯 살 막내딸은 이런 아버지 무릎에 앉아 노래를 배웠습니다. 목청은 타고나는가. 부끄럼 많던 열다섯부터 가설극장 무대에 섰습니다. 한국전쟁 후 '가는 봄 오는 봄'이 장안을 휩쓸던 시대.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네 콩쿠르대회에 가서 상을 탔더니 김녕천지에 소리가 났다했습니다. 그때 부끄럼이 많이 달아났다는 소녀. 열여섯에 처음으로 상여소리 선소리했습니다. 마을 친구 부친의 장사를 치를때였지요. 김녕서 덕천까지 구슬프게 소리하며 함께 걸었습니다.

 "시집도 안간 아이가 사람들 앞에서 부를려니 용기가 있어야 허는 겁니다. 어릴때는 몰랐는데 상여소리 하다보니 '회심곡'을 다합니다. 행상 안맨지 15년. 김녕은 지금도 상여소리, 행상합니다."
김녕에선 또래들 오락시간 할때마다 처녀반장 했지요. "아버지 노래하면 선소리허게 되고. 한번 허민 삭삭 알아부런." 서른셋부터는 회심곡을 잘 했습니다. "밭에 가면 회심곡, 바당에 가도 회심곡허멍 살아온 세월이우다."

 # 4·3때 죽은 시신들 수습 달구소리 부르던 아버지

 아버지는 세시가 되면 베개가 젖도록 울었습니다. 막내딸은 그 이유를 뒤늦게 알았지요. 열아홉살 오빠가 태평양전쟁에 징집돼 일본 어느 바다에서 행방불명됐다는 것을. 호열자로 두 자식 묻고 또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했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한을 그가 조금이라도 풀어낸 것은 1982년 고인이 된 제주명창 김주옥과 일본에서 재일동포 위한 노래도 하고 4·3으로 희생당한 영혼도 위로하는 굿공연하러 갔을 땝니다. (스무살부터 노래 같이 하던 월정의 김주옥 명창은 언니 동생했고, 그에겐 잊을 수 없는 은사였다.)

 "그때 일본 이 바당에서 우리 오빠가 죽었구나. 막 가슴이 아파. 죽는 것이 실겁하나 같았주. 축 고하고, 바람타고 구름타고 같이 가자고해서 제주에 왔는데 아팠습니다. 오빠 이름 비석 세우고 '회심곡' 해드렸더니 많이 풀렸습니다."

 피할 수 없었던 이 땅의 4·3은 아버지 가족에게도 덮쳤습니다. 독자였던 아버진 집짓자니 친족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김녕에 살았던 아버진 화마를 피했지만, "그땐 무서워서 못하고 4·3 몇년 지나서 동복 양칩 친족들 죽은 시신들 갯것으로 해서 돌 속에 숨겼다가 수습했습니다. 우린 4·3에 죽진 안허여도 고생많이 허연. 아버지가 달구소리 상여소리 부르며 많은 봉분 만들고." 아버진 그로 인해 놀라서 10년 넘게 아팠습니다.

 "재산 다 팔고 굿 일곱 번, 쉐(소)여섯 다 팔았수다. 한맺히고 기맥혔습니다. 마을에선 무덤에 겹담 안하던 시절에 고맙다고 아버진 봉분에 겹담해줬수게."

 # 구룡포까지 출가물질 나간 노래하는 해녀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요네 자손 네 어딜가리…." 이 바다만큼 큰 가슴을 가졌다는 여인. 거침없이 한 대목이 흘러나옵니다. "메역조물멍 물에 드는 소리했주." 밭일에다 안해본 장사 없다는 그녀. 열여섯부터 물질도 했습니다.

 구룡포 출가물질도 갔었지요. 시집가기 전 스물한 살이었고, 친구들과 30∼40명이 함께였습니다. "그때 돈 5만원 벌어완. 스물두살 9월에 시집갔는데 2월에 구룡포 강 왕창 벌었수다. 구룡포에서 메역, 솜을 하고 동복밭 10만원 할 때 두 개값 20만원으로 시집갈 것 다 챙겨왔수다. 동복바당은 얕고. 김녕바당은 깊고 물건좋고 해녀들도 어디강 떨어지지 안허여."

 친정어머닌 큰 배로 하나씩 물건을 조물던 대상군. 언니들도 다 물질 잘했습니다. "비료없던 시절, 밥먹기 전, 김녕갯것이로 종달리 알까지 바당알로 듬북허연." 그 잘하던 물질도 15년 전에야 설렀습니다. 바다 가서 다리를 다친 후 입니다.

 물질하던 그가 부르는 '회심곡'. 그 서곡은 그가 직접 곡을 지어 넣은 대목입니다. "옛날 옛적 제주도 해녀 여러분 님네/동지섯달 설한풍에 백설이 펄펄 날리는 데/이제는 고무 옷이나 있건마는 옛날에 빨갛게 벗어 들어가며…."

 # 김녕 소리꾼 동복리 시집 가 소리로 사랑받아

 천상 소리꾼 양금녀. 시원시원한 성격에 노래 잘해서 사랑만 받아온 인생이랍니다. '은딸 금딸'하며 막내에게 사랑주던 친정 어머닌 바당만큼 마음이 넓었습니다. 친정어머니는 가진 것 다 주려고만 하던 보살님.

 스물둘에 동복리로 시집 갔습니다. 동복까지 소문난 그녀를 그냥 놔둘 리 없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노래 부조. 열한사람 친목어른들계에 들어오라 성화였지요. "조금 이시난 사람 죽은데 '상여소리' 나오렌. 안갈 수 엇어마씀" 그 사람들 이제 88명. 소리 공양하며 함께 놀면서 늙어온 이 계는 40년 이상 유지하고 있습니다.

 소리 잘하고, 물질 잘하고, 장사 잘하는 그녀를 한없이 사랑한 사람은 시어머니. "35년 같이 살다가 90살에 돌아가셨수다. 집에 있는 날엔 항상 며느리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는 시어머니. 결혼해서 '창부타령'이 많이 늘었습니다. 그의 동복 시댁 부칩도 시아버지 큰어머니 등 거의 다 희생당했습니다. "억울한 영혼들 맺힌 한을 풀어야 헐 것 아니우꽈. 가슴 풀리는 무료봉사허는 건 돈주고도 살 수 없는 사랑받아섭니다."

 한을 풀어주러 그는 일본도 자주 다녔습니다. "회심곡도 슬픈 사람이 하게 돼요. 공원에서 노래할 때 재일동포들 많이 울어서 가슴 아팠지요. 사람들이 막 울어."

 물론 그렇지요. 고통의 순간 왜 없을까. 서른 하나에 남편이 갑작스런 병과 싸우는 동안 애기 업고 밭일에 김녕 천지 물건 사서 밭떼기 장사했습니다. 제주도 한바퀴. 미역 양파 콩 장사. 여덟식구 살았습니다. 삶의 정신은 어머니 닮았습니다. 오일장에서 장사할 때도 '천원~' 소리하면 인기 만점. 사람들이 다 몰려 들었다.

 # '상여소리' '회심곡' CD 출반 보람

 서른셋 이 소리꾼에게도 사흘간 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고통이 찾아왔었습니다. "죽을 고비 넘겼더니 남의 고생도 알아요. 내가 복을 받으니까 남들한테 봉사하는 마음이 더 강해졌습니다. 전생에 하늘에 복받아서 산 인생입니다. 여기서 살다보면 외로움이 있지 안헙니까. 꾹 참아서 몇십년 하다보니 CD도 냈습니다."

 그는 2010년 생애 처음으로 음반을 냈습니다. '상여소리'와 '회심곡' 500장. 무료 배포했습니다. 남편은 그의 든든한 지원군. "눈 팡팡 올때 이불 뒤집어 쓰고 있으니, 사람이 한번 시작하면 해야 한다고 제주시내 김주옥 선생한테 보냈습니다."

 언니도 그가 단장인 동복민속예술단 민요분과위원장. 이젠 잘 커준 2남3녀 가운데 막내 딸도 회원으로 들어와 노래 연습도 합니다. 칠순에 돌아보니 참 사랑받고 살아온 세월, 뿌듯한 삶입니다. 틈만 나면 필요한 곳에 가서 소리로 복을 짓고 싶습니다. 

 소리는 곧 삶인게지요. 해녀노래, 이야홍, 제주민요엔 삶과 애간장 녹이는 한이 녹아있습니다. 그에게 각별한 '회심곡'은 어떤 의미일까 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가슴에 피 묻으난 저도 가슴에 피묻어가지고 그것이 병이 되언 나도 죽을뻔하다가 살아났습니다. 회심곡은 산사람들 축원이우다. 부모공양하는 마음 본받아야 자식들도 본받습니다. 자기 애기 아까우면 남의 애기 아깝곡 남의 부모도 내 부모 같이 해야 애기들 앞에 본도 보이곡 나가는 길도 보이곡 허는거 아닙니까."

 요샌 눈 수술했지만 소리는 계속 합니다. "못허쿠다 허민 사람구실을 못헙니다. 어른들 가심 풀어드려야 내가 건강헙니다."

 동복민속예술단이란 현판이 붙은 그의 집에선 180년된 마을 팽나무가 보입니다. 그 나무 아래 앉는 것을 좋아한다는 동복 소리꾼 양금녀. 곱게 미소지으며, 그가 다시 한 소절 뽑습니다. 구성지듯 애절한듯 그 소리, 서리서리 김녕바당 동복바당을 한참 떠돌아 나갑니다. 맺힌 가심 풀러다닙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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