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신간사 대표·재일동포 고이삼

 구체적으로 그의 아이덴티티는 제주도다. 도쿄. 돈을 벌기 위해서는 책 보다 김치를 파는 쪽이 더 나을지 모를 일. 더구나 베스트셀러 대박을 꿈꿀만한 책도 아닐터엔. 그러나 낸다. 그것도 해마다 10여권 안팎으로 잘 안팔리는 책들. 허나 꼭 나와야될 책들. 사회과학서적 전문 출판사. 재일한국인, 재일제주인, 제주4·3 등이 주제어다. 이 출판사를 25년을 이끌어온 이는 제주출신 재일동포. 이제 신간사는 재일동포사회의 하나의 발언이다. 신간사 대표 재일제주인 2세 고이삼. 재일동포 지문날인 반대 투쟁을 대중운동으로 이끌어냈던 사람. 그는 활자의 힘, 책의 힘을 믿는다 했다. 책은 한 인간을 바꿔놓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생은 활자와 함께 고향의 굴레인 4·3, 재일동포들의 역사와 삶을 엮는 여정속에서 흘러간다.

   
 
 

 재일동포 2세 출판인 고이삼은

 1951년생. 일본 출생. 출판사 신간사 대표. 아버지는 우도, 어머니는 법환리 출신. 도쿄에서 초·중·고교와 중앙대학을 나왔다. 대학졸업하면서 잡지사 「삼천리」지에 입사. 1987년 신간사 출판사를 만들어 각종 재일 코리안 관련 책들을 출간하고 있다. 지금까지 낸 책들은 160권이 넘는다. 1986년 재일동포의 문화와 역사 등을 연구하는 모임인 동경 탐라연구회 멤버, 도쿄 '4·3을 생각하는 모임'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신간사 25주년을 기념해서 재일 연구자 고선휘의 「재일제주인의 생활과정」과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의 3·1운동 당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여운형 선생의 역할, 그리고 삶에 대해서도 완결할 예정. 가을에는 여운형 관련 심포지엄 등을 개최할 예정. 또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일본어판 출간계획을 갖고 있다.

 
 
그의 집념, 그의 열정, 그의 시선은 항상 제주도를 향했다. 재일동포들을 담은 말들로 세상에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말을 걸었다. 재일동포들이 먼저 뜯어낸 4·3의 봉인을 출판으로 알알이 꿰내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때론 유머러스한 언변처럼 콧수염과 턱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인 이 남자. 이번에 그를 만난 건 우연. 얼마전 오키나와의 4·3위령제에서였다. 여기서도 생각은 제주도다.

 "오키나와 장단같은 것도 제주도와 너무 닮지 않습니까. 지역적인 특성상 가까워서 그렇고, 아마 옛날 표류해서 거기로 가던 제주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 그럴겁니다. 정말 가깝지요. 그런 닮은 것들도 우리가 연구해야 합니다." "내가 보기엔 제주사람으로서 우수한 학자, 문학가들은 다 서울에 가고 제주도에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효도는 일본 사회를 향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아버지는 아들이 가고자하는 출판 일을 말렸다. 돈을 주면서 다른 일을 해보라고도 했다. 돈 안되는 출판사에 뛰어들 때였다. 허나 그런 아들을 아버지도 조금은 이해했던 것일까.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어요. 제가 출판 일을 하면서 나온 기사들을 스크랩해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결국은 아들에게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또 다른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효도라는 것은 매일 부모를 만나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확실하게 일본 사회를 향해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재일동포들이 경영할 수 있는 파친코라든가 다방 같은 것을 외면하고 봉급은 작아도 삼천리사에 취업한 것은 표면적으로 본다면 불효였다는 그다. 

 그동안 그가 낸 책들은 굴절된 시대를 살아내야했던 재일동포의 역사가 됐다. 그가 빚내면서도 고집스럽게 이 일을 하는 것을 알만한 이들은 안다.

 # 신간사, 재일제주인 관련 책 출간 주력

 "최근 3년 정도는 책 출판을 보통 때보다 반 정도 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올해부터는 예전처럼 일년에 열 권 정도는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꼭 만들어내야 할 책 하나가 있다. 지금부터 10년 전에 만들어진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일본어판. "한국어판이 나올 때 같이 나와야했어요. 사람들은 하자 하자 말은 잘하지만, 실제로는 실천을 잘하지 못해요. 그래서 신간사에서 하려고 합니다. 지원금을 기다리면 10년, 20년 걸리지 않겠습니까? 일본어로 번역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단호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그의 어조에서 그동안 재일동포에 대한 고향의 섭섭함이 묻어난다.

 그의 출판사는 작다. 허나 그가 그동안 낸 책들은 무겁다. 열거할 수 없다. 재일동포, 북한과 한국, 아시아 각국의 인권과 차별에 관한 책들. "내가 참 좋다 생각하는 첫 번째 것은 스기하라 교수의 「재일동포들의 생활사」. 참 좋았어요.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도 좋았구요. 잡지 「제주도」 등도 얇지만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지요." 그동안 젊고 가능성 있는 작가들의 책을 많이 낼 수 있었던 것이 보람이라는 이 재일 출판인.

 그를 이 가난한 출판인의 길로 이끌어가게 한 것은 조국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었다. 냉정과 열정의 대학시절. 그는 독재에 저항하던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가슴이 자글자글 끓었다. 졸업하면서 그가 간 곳은 이철 선생이 주도하던 잡지 「삼천리」. 때문에 얼마전 이철 선생의 부음은 충격이었으리. 「삼천리」에서 청춘의 한 시기가 지나갔으니. 그럭저럭 10년 세월이 흘러갔으니. 그렇게 재일1세들을 바로 곁에서 모셨다.

 그들의 문장은, 사상은, 젊은 그를 충분히 가슴 치게 했다. 해서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보다 여러 방면의 공부로 가슴을 채웠다. 그의 길을 선택한 것도 그때. 그랬다. 2세들에게 가능성을 걸고 싶었다. 그것은 신간사를 시작하는 두가지 의미가 됐다. 

 "첫째는, 1세 선생님들을 도와주는 것만으로 끝나게 되면 안된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당시 이철·강재언·김석범·박경식·이진·윤학준·김달수 선생 모두 같이 잡지사에 있었어요. 김시종 선생님도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요. 둘째는, 유명하진 않지만 2세 소설가·역사가들을 돕는 것이 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했지요. 지금까지 낸 사람들 가운데는 강상중·문경수·김중명 같은, 이젠 유명하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 4·3은 제주도와 더 가깝게 된 '운명'

 결국, 여러개의 삶의 길 위에서 그도 하나를 선택했다. 그에게 철컥, 삶을 바꿀만한 큰 전환점이 된 계기는 조국의 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자이니치(在日)들의 가슴에 꼭꼭 한을 묻은채 살던 상처, 제주의 4월이 그를 쳤다.

 "김석범 선생의 책을 보면서, 탐라연구회의 김민주 선생과 만나면서 제주4·3사건을 알았고, 나는 제주사람이다는 자각을 더하게 됐지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나를 바라봤을 때, 나는 한국, 조국, 그때 조선. 어떻게 해야될지 몰랐어요. 나에게 있어 4·3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가질 수 없던 구체적인 아이덴티티는 제주도라는 것. 제주도와 굉장히 가깝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순수하면서도 우직했던 청년 고이삼. 그때 제주도를 위한 일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이제 재일동포 연구자들에게는 하나의 고전이 된 탐라연구회가 발간하던 잡지 「제주도」도 신간사가 냈다. "4·3을 생각하는 모임도 특히 김석범 선생이 중심이 돼서 조동현 선생과 함께 문경수, 고이삼 등이 함께 해왔죠. 당시 일본에 유학온 강창일, 김명식씨가 제40주년을 맞아 제주, 서울, 도쿄, 오사카에서 동시에 4·3 추모행사를 열자고 제안했죠." 1988년 도쿄 거주 제주인을 중심으로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할 때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그는 조국이 날세워 4·3을 막았을때 재일동포들이 먼저 애를 썼다는 자부심도 갖는다. 그렇게 한 시대, 젊은 날을 책을 만들며 보냈다.

 # 어려서 꿈 포기…김대중 납치사건 변화 계기

 부모님은 제주 사투리를 했다. 그때부터 '난 한국사람이다'는 생각을 죽 갖고 있었다는 고이삼. "어려서 꿈을 갖지 않았지요. 꿈없는 인간이었지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은 공무원, 학교 선생님, 금융원도 할 수 없었죠. 아무리 노력해도 트럭운전사라든가 다방 지배인, 사채업, 그런 일 밖에 할 수 없었어요."

 반농반어의 재일생활이었다. 부모는 바다일, 녹두 야채장사 등을 했다. 1945년 스무살에 도일한 어머닌 오오시마에서 서른다섯까지 해녀일을, 열한살에 도일했다가 4·3때 재도일한 아버진 사공을 했다. 파친코도 하고 찻집도 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동경에서 전부 일본학교를 다녔다. "조센징 한국인이라고 하는 것이 싫었어요. 괴롭힘 당한 기억은 없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되니까. 모든 것에 다 열심히 했지요."

 고교 졸업후 아주 잠깐 아버지가 차려준 다방을 경영한 적도 있었다. 허나 틀을 갖춰서 일을 하고 싶어서 대학에 들어갔다는 그를 변화시킨 것은 김대중 납치사건. 그 사건이 나를 변화시켰어요. 그 사건이 없었다면 아마도 저는 일반적인 일본인이 되어서 제주도도 모르고 한국도 모르고 그런 채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가 처음 고향땅을 밟은 건 김대중정권 때. 1980년대에는 그가 지문날인 거부를 해서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처음 고향에 갈 때 비행기가 한라산을 이렇게 돌지 않습니까. 아, 제주도가 나를 환영해주는구나. 기뻤습니다."

 이젠 역으로 제주도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는 이 재일 출판인. "4·3연구소는 어떻게 되고 있는지, 강정마을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제주도 전부가 걱정됩니다. 우물물을 마실때는 그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4·3사건이 정부로부터 무시 당할 때 그때 노력했던 사람들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느새 아카섬에서 출발한 배는 오키나와 본토로 도착하고 있었다. 아직도 남은 꿈을 물었다. 재일조선인문학전집 등 할 일이 많다. 솜씨좋은 아내가 하는 한국음식점이 잘되서 돈을 많이 번다면 좋은 책을 더 낼 수 있을 거란 꿈도 꿔본다. 작년 60을 보냈다는 그는 앞으로 5년 혹은 10년 정도 더 해서 출판일을 그만 둘 생각이란다. "새로운 생각을 하는 이들이 이런 일을 했으면 합니다. 시대정신에 맞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출판사를 그만두면? 제주도에 가고 싶습니다."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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