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선이 만난 '사람']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

 강처럼 깊었고, 산처럼 험했고, 계곡처럼 구비쳤던 위대한 다산의 정신세계였다. 거기에 빠졌던 젊은 날 그의 열정이 교차됐다. 술술 구수한 전라도 맛깔로 버무려진 어투, 다산을 이야기할 때 그는 정말 행복해보였다. 당대 짓눌린 민중을 대변하던 다산에게서 좌절할 줄 모르던 진짜 민중의 얼굴을 보았다던 사람. 다산의 시 「애절양」앞에서 몸서리쳤던 사람. 가슴을 데워주는 국민교양서로 33년 스테디셀러가 된 다산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편역자.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돌아보니 민중의 희망을 위해, 민족과 민주화를 위해 감옥을 들락날락하던 그 계절에서 고비고비 살아남은 것은 아마도 조상의 음덕이겠고, 지금의 부활은 다산의 음덕이 아닌가했다. 아니다. 그의 삶과 다산을 듣다보니 그랬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1942년 전남 무안 출생. 광주고, 전남대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 다산연구소 이사장. 한중고문연구소장, 제13·14대 국회의원. 단국대 석좌교수.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5·18기념문화재단 이사장, 단국대학교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 초대원장 등 역임. 1971년 석사논문 「다산 정약용의 법사상」은 법학분야에서 다산에 관해 쓴, 대학사회에서 회자된, 최초의 논문. 1973년 유신반대 유인물인 전남대학교 '함성'지 사건에 연루돼 1년 동안 복역하면서 감방 안에서 다산 저술에 대한 연구 수행. 민족과 민주화운동에 투신 네차례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저서로 「다산 기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 「다산 시 정선(상·하)」 등 다수. 역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애절양」,  「흠흠신서」 등 많음. 2004다산학술상 공로상 수상.

 
 
 "썩지 않은 것은 없고, 썩다 못해 문드러졌다."고 한탄했던 다산의 시대를 잊지 말라. 올해는 다산 탄생 250년. 기념행사, 강연요청만도 빽빽하다는 그를 만났다. 서울 중구 다산연구소. 좁은 공간 칸막이 책상에서 그는 다산 정약용(1762~1836)을 쓰고 있었다.

 "다산은 천재에다 부지런까지 했어. 대단한 사람이야. 지겨운 양반이야. 엄청 창의적인 인간이야. 했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새로운 소리를 해. 이게 대단한 거야. 당대 최고의 사상가·정치가·행정가이자 의사, 지리학자, 과학기술자였지. 금년에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이 됐어. 루소, 드뷔시, 헤르만 헤세와 함께 4명. 이제 붐이야.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이야."

 명쾌했다. 얼굴에 뿌듯함이 흘러넘쳤다. 다산의 글에 뜨거워 한문을 번역하던 삼십대의  박석무. 그는 이제 35만4000여 회원을 거느린 다산연구소를 이끌고 있다. "그동안 이 작은 다산연구소가 소리없는 역할을 한 것이고, 소리없는 혁명을 한 것입니다."

 # 다산의 첫 가르침은 '효'와 형제애

 박석무. 18년간 창살 없는 감옥에서 고독한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의 참모습에 매료됐다. 그가 감동하면 세상도 감동하리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는 따스한 삶의 지침서로, 어버이의 가르침으로, 시대의 스승으로, 거듭거듭 개정판을 내며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명저. "두 아들에게, 형에게 쓴, 칠흑같이 어두운 봉건시대에 민중적 의지로 75년을 치열하게 살다간 다산의 정수지요." 실학자 다산은  생전에 지은 책 500여권. 2500여 수를 남긴 시인이었다. 한 인간의 족적이 어찌 이리할까.

 아침부터 밤까지 잠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고독한 학자 정약용. 사상과 철학, 한 여인의 남편이자 엄하지만 정이 절절한 아버지로서 면면까지 그 자체가 문학이며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 "아버지 다산은 두 아들의 훌륭한 스승이었죠. 아버지 교육을 받은 두 아들이 어떻게 됐을까? 정식으로 문집을 남기거나 자료가 없었어. 최근엔 여기저기서 나타난 자료를 보니 엄청난 학자가 된 거야. 아버지 귀양갈 때 열여섯 살, 열아홉 살이었는데 대단한 형제애야. 정말로 이들은 '형제지기'였고 '형제동학'이었어요. 추사선생은 '농가월령가' 저자인 둘째아들 학유의 죽음을 두고 금세에 그런 사람을 다시 또 어디서 보겠는가 했지요. 칭찬할 줄 모르던 추사가 칭찬했다는 거요."

 다산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나오는 첫 편지는 1801년 6월 첫 귀양지인 경북 포항 근처의 장기에서 쓴 글.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전한 다산의 첫 가르침은 '효'였다. "유학자인 아버지 다산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끼리 우애함을 근본으로 한 후에야 독서를 통해 학문의 길도 열린다는 것을 간곡하게 써보낸 거지요. 또 우리 집이 폐족에서 벗어나는 길은 딱 한가지 밖에 없다. 너희들이 독서하는 길 밖에 없다 했지요."

 # 박석무 증조는 제주유배 면암 최익현 직계 제자

 박석무. 그의 증조는 호남의 유명한 유학자, 대학자였다. 민재 박임상 선생. 최익현, 기우만과 함께 무안 평산사(사당)에 모셔진 인물. 제주도로 유배갔던 면암 최익현의 직계 제자였다. 어린 그는 서당 선생이었던 조부에게 무조건 한문을 배워야 했다.

 "할아버진 갓 쓰고 상투 튼 구식양반. 아버진 상투를 하지 않았지만 한복만 입다 돌아가셨고. 학교는 안다녔으나 학문이 깊었어요. 보수적이고 구식 탱탱, 당시로선 갑갑했지. 남들은 양복입고 다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덕으로 전통 이해가 되고 한문 해독할 수 있고, 할아버지 아버지가 하던 문답이 내게는 큰 힘이 된거야. 퇴계는 어떻고, 율곡은 어떻고. 맨날 그런 이야기야. 정조대왕 역사 이야기지." 아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글 읽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지금도 생생하다. 보고 들은게 저항 투쟁이었고, 정이었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토론하는 모습은 손님들이 하는 것처럼 했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상대가 없던 아버지는 우울해 있다가도 막내 삼촌이 오시면 글을 읽고 갑자기 살아나는 거야.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부자지기였고, 아버지와 막내삼촌은 형제지기였어. 그리운 사람은 얼굴 표정이 달라지는거야. 서로 대화가 되는거야. 글만하다 돌아가신 분들이야." 어머닌 8남3녀를 낳았다. 선비집안. 일을 못해서 종가집 문답으로 겨우 살았다. 집안은 가난했으나 글 읽는 소리 하난 컸다.

 #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700회 넘겨

 둘째 형과 먼 바닷가로 유배. 끝없는 절망과 참혹한 고통과 사투를 벌여야했던 다산의 탄식을 나눠 갖고 싶었다던 박석무. 그의 시대 또한 불우했다. 폭풍의 삶이었다.
 80년 5월 전라도 젊은 교사 박석무. 5·18광주항쟁에 휩싸여 현상수배까지 가는 처절함도 겪어야했다. 불안과 절망의 시기. 희망은 안보였다. "공포에 질려 서울서 살면서 불안 공포 살 수 없잖아. 사람 안보는 온양온천까지 갔어. 드러누우면 죽음의 사신이 오는 것만 같았어." 다산에 몰입하지 않으면 죽음이었다.

 온양의 독방. 다산이 강진 유배지에서 몰입했던 것처럼 온양은 박석무, 그의 유배지였고, 감옥 아닌 감옥이었다. 그는 끝내 다산의 감옥에 유폐됐다. 아마 다산의 가슴에 들어갔다 나왔으리.

 「애절양」 「다산 산문선」은 여기서 10개월 동안 번역한 산물. "70년대 맨 먼저 다산 시를 보고 반했어. 82년 출소해서 다산의 시를 냈지요. 최초로 다산의 시가 번역돼 나온 것이야. 슬펐지만 '애절양'이 너무 좋았어. 서정시가 기가 막혀. '강행시' 절창이야. 사회비판시도 아니고 강산을 노래한 시야." 귀양살이 후 부모의 산소가 있는 충주를 찾아 성묘갈때 읊은 '강행시' 75수는 절창이란다.

 박석무. 그도 다산의 길을 간다. 다산의 말씀을 전하러 간다. 폭압의 독재정권 시대를 살아야했던 그의 시대. 다산은 그에게 한 톨 희망이 아니었던가. 유배지의 다산은 문자에 허기진 사람처럼 하염없이 문장을 읽었고, 끝도 없이 문장을 썼다. 박석무 또한 부박한 이 시대에 다산의 말씀을 덧입혀 실천의 삶을 전한다. 자신의 글을 통해 다산의 마음, 다산의 정신, 다산의 철학을 전파한다. 다산의 가슴으로 시대를 꿰뚫는다. 다산연구소 (www.edasan.org) 가 정식 발족한 2004년부터 시작, 700회를 넘긴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이 칼럼은 이메일로 회원에게 전달된다. 실제 받아보는 이는 50만은 될 거란다.

 "도덕성이나 윤리의식은 이미 사라진 세상…화려했던 권력의 시절은 지나고 이제 부와 권세를 놓치고 감옥에 앉아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분들, 그런 기회에 「목민심서」라도 읽으면서 반성의 시간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713회를 기록한 지난 7일자의 '감옥 가는 고관대작들을 보면서'의 한대목이다.

 # "4·3, 아무것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 5·18과 달라"

 5·18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던 그는 지난해에도 제주4·3평화공원을 돌아봤다. "대통령이 정식으로 국가를 대표해 사과하고 이렇게라도 기념관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란 생각이 들었죠. 인간이 짐승보다 얼마나 잔인한 족속들인지를 보여준 4·3이죠.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5·18과는 다르죠. 5·18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열사가 되었지만, 4·3은 왜 죽는가도 모르고 죽은거잖아요. 무조건 죽어갔잖아요. 앞줄 서 뒷줄 서 해서 막 죽였잖아요."

 석사 논문 쓸 때 번역서가 없어 전부 원문으로 읽어야했던 그는 이미 소문난 '한문'이었다. 어려서 한문에 친숙했으나 스스로 한학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고교 때. 전통사상을 알기 위해서였다. 대학 때 그를 아끼던 교수는 "한문은 박석무에게 물어보라"할 정도. 그의 꿈은 교수였다. 불행한 시대. 그 꿈은 날아갔으나 이제 그는 대학에서 그칠 줄 모르는 다산의 삶과 철학, 시를 강의한다. 형제같던 후배 김남주 시인, 깨볶던 친구 조태일 시인을 먼저 보내 심정이 아렸던 박석무 그도 한때 격정의 문학도였다.

 다산연구 40년. 깨알같은 글씨와 씨름하며 번역하다 보니 그 좋던 눈도 많이 쇠락해졌다는 박석무. 다산을 향한 열애. 다산의 맑은 기운을 받아선지 그는 여전히 청년의 기개다. 정치의 계절, 뛰는 이들을 향한 그의 한마디. "「목민심서」는 공무원들, 정치인들 필수과목이지. 리더십은 딴 데 있는게 아니다. 청렴하면 리더십이 저절로 나가는 것이다고 해요. 정치할라면 목민심서부터 읽어라. 공중에 떠도는 관념적인 이야기는 의미가 없죠. 현실적인 이야기로 접목시키려면. 그래서 나도 어려워요. 내가 젤 어려운 짓거리 하고 있어요."

글·사진 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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