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잠녀'에서 미래를 읽다 - '잠녀학'적 접근 어디까지

▲ 대학생이던 지난 2002년부터 제주 잠녀를 촬영, 지난해 ‘좀녜, 그 10년의 기록’사진전을 열었던 김흥구 작가가 사각 프레임에 담아낸 노 잠녀의 모습.
제주잠녀 문화재 보호 근거 마련 불구 구체적 추진 방향 아리송
수산업 인구→관광자원→문화유산 등 평가 환경 대응 제자리걸음

'제주 잠녀'를 국가지정무형문화유산으로 보호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2009년 꼬박 3년의 산고 끝에 '해녀문화 보존 및 지원 조례'가 태어나면서 시작됐던 기대감이 다시 3년 만에 결실을 맺는 것으로 분위기가 고무되고 있다. 지난해 제주잠녀·문화 세계화 5개년(2011~2015) 기본계획까지 마련된 터라 일련의 작업만 유기적으로 진행된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하지만 아직까지는 장밋빛 전망에 불과하다. '제주잠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대책 마련은 여전히 제자리만 맴돌고 있다. 전국적으로 전례가 없는 '생애력 작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가 하면 해녀축제 규모화 등 상품화 가능성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잠녀'라는 껍데기만 남을 공산이 크다.

# '나잠 어업' 지켜야 할 이유있나

'제주잠녀의 정체성 확립'이 중요한 데는 이유가 있다.

제주 잠녀가 전국적으로 관심을 끈 배경에는 '제주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 있다. 옛 문헌까지 들추지 않아도 제주잠녀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평가는 시대 흐름에 따라 눈에 띄게 달라졌다.

1960년대 언론에 비춰진 잠녀의 모습은 원시적인 방식(나잠)으로 수산물을 채취하는 여성이었다. '최고령 해녀'가 기사화됐을 정도다.

▲ 고무옷을 입은 제주잠녀의 얼굴엔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흥구 작
1970년대 들어서는 산업 일꾼이자 경제 환경 변화로 사라지고 있는 직업군으로 접근한다. 1974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 8면 '해녀 줄어드는 삼다도' 기사를 보면 "'농지 개간'과 '밀감 재배'가 늘어나면서 해녀가 줄었다"며 산북에 비해 감귤농사가 활발했던 산남 잠녀의 수가 급격히 감소한 것을 그 이유로 꼽았다.

그 사이 잠녀는 제주 관광의 중요 아이템으로 부각된다. 1956~7년 제작된 제주 첫 관광안내서에서 '잠녀'는 제주 대표 상징으로 활용된다. 물론 '나체로 작업을 한다'는 사실과 동떨어진 부분도 있지만 제주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제주잠녀를 위치를 수산업의 일개 구성원이자 주요 관광 자원으로 옮겨 놨다. 잠수병과 고령화와 이로 인한 감소 문제가 구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실제 1984년 작성된 '법원 판결로 본 자유업 가동연령'을 보면 잠녀의 정년을 50세로 잡고 있다.

이후는 계속해서 고령화 문제와 명맥 단절에 대한 접근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부터 정체성의 혼란이 시작된다.

수산업 인구로 포함했을 때 이들의 고령화와 명맥 단절은 분명 이유가 있다. 수산업이 발달하면 나잠어업을 일부러 보호하고 지킬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양식어업 등이 발달하고 규모화·기계화 추세가 뚜렷해지는 만큼 간단한 도구를 가지고 별다른 지원 장비 없이 '사람'에 의존하는 어업을 굳이 장려해야할 필요가 없어졌다. 시대 흐름에 따른 자연 소멸일 뿐 고령화나 감소 위기에 특별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제민일보 잠녀 취재팀의 ‘발로 딛는 제주잠녀’취재 모습.
# 복합 학문적 접근 주문 계속

그래서 더더욱 잠녀학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사실 제주 잠녀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방법으로 진행돼왔다. 제주 민요 중 대표적인 노동요를 이어오고 있는 데다 무속굿 등을 통한 춤과 의식, 타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제주 사회에 대한 접근을 위해서 '잠녀'는 꼭 거쳐야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이런 복합적 성격 때문에 잠녀는 여성학이나 인류학, 사회학, 민속학의 그릇에 담기에는 넘치는, 또 해양문명사적 접근을 하기에는 너무 포괄적이라 곧 한계에 부딪혔다.

잠녀학에 대한 논의는 비교적 일찍 시작됐다.

일제 강점 초기 일본 학자들이 잠녀에 대한 접근을 시도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를 전후해 민속학적 접근을 했던 것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잠녀학'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은 1960년대 말부터. 당시 강대원 선생이 자료를 수집해 집필한 「해녀연구」는 잠녀 연구에 대한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학문적 접근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학술 연구를 살펴봐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잠녀의 이미지와 다른 점이 많다.

1960년대 학술논문인 '한국 해녀의 역사 및 생활상태'(민경임, 이화여대 이대사원, 1964)에서는 "제주 여자는 11~12세만 되면 물질을 했다. 여성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 소득을 얻어내며 남편 등 남성과의 사회적 지위에 있어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로 직업을 포기할 수는 없으나 36%는 후손에게 잠녀라는 직업을 물려주겠다고 답했다"는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조사 잠녀 55%가 문맹일 만큼 사회적 환경이 열악했고 고무옷이 보급되기 전이란 점을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동아일보 1965년 8월7일자에 실린 잠녀 기사.
고무옷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허술한 차림의 잠수옷 등 등 외부에 드러내 보이기에는 불편한 부분이 많았다. 이후 바깥물질이 활발해지는 과정에서는 상대적으로 생활력이나 기술력이 뛰어난 제주 잠녀에 대한 견제와 고의적인 폄하가 공공연했다. 결론적으로 사회 환경적 변화에 따라 학력이 높아지고 사회진출 기회가 늘어나면서 굳이 힘든 물질 작업을 선택해야할 개연성이 떨어졌고 여기에 외부에서의 불편한 시선까지 보태지면서 제주해녀에 대해 사회적 인식(험하고 천한 일, 주변의 홀대나 험한 일을 한다는 불편한 시선 때문에 대물림하지 않음 등)이 고착화됐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진행된 '해녀 조사 연구'(김영돈·김병국·서경림, 제주탐라문화연구소, 1986)에서는 해녀를 경제적 측면과 법사회적 측면, 민속학적 측면에서 살피고 있다. 이 연구에서 주목할 부분은 '민주적 합의에 따른 관리의무'에 대한 언급이다. 연구진은 공동어장에 입어할 수 있는 권리나 공동작업 효율을 위한 '해녀회(잠수회)'조직, 입어권 분쟁 등에 주목했다.

1990년 진행된 '제주의 해녀'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고 김영돈 제주대 교수가 정리한 「한국의 해녀」(1991, 민속원)는 책 서두에 "문화인류학적·민속학적 관점, 경제적 관점, 생리학적·의학적 관점, 해양과학적 관점, 구전문학적 내지 민족음악적 관점, 법사회학적 관점, 어학적 관점, 여성학적 관점 등 다원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그 후 적잖은 시간이 흘렀고 제주잠녀 연구자들의 저변도 확대됐지만 아직까지 '제주 잠녀·잠녀 문화'의 정의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조한혜정 교수가 잠녀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을 시작하면서 '잠녀학'은 학문으로서의 가능성을 검증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고 김영돈 교수를 비롯해 한림화·고창훈·좌혜경 등 많은 학자와 연구가들이 잠녀 연구에 열정을 쏟아왔고 제주섬학회 등도 '잠녀학'의 필요성은 물론이고 가치 평가와 활용을 위한 지역 사회적 관심을 강조해왔다.

이 흐름만 제대로 읽고 연구자들의 의지에 지역의 일관된 공감대가 보태졌다면 '잠녀학'은 지역학으로 자리를 잡고 제주잠녀·잠녀문화의 '지속가능한'발전을 위한 학문적 지지 기반을 만들어졌어야 맞다. 하지만 아직도 논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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