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교육 희망순례] 8.청소년 인문토론 모임 '정세청세'

'학교 밖' 실험…자발적 소통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 주목
'학교 밖'이란 말은 종종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업'이라는 사회적 기준 밖으로 나가는 학생들을 정리해 말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학교 안'에서는 다 해결할 수 없는 지식이나 예·체능 활동의 대안을 설명하는 경우다. 사실 두 가지 모두 '학교'라는 틀을 기준으로 삼았을 뿐 생각하는 것을 행동에 옮겼다는 것은 같다. 아직 답이란 것이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할 수 있다' '해냈다'가 주는 성취감, 그리고 삶의 가치에 대한 생각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늘 복잡하고 어렵고 불편한 기성세대와 오늘의 한국 사회에 대한 따끔한 지적들 역시 청소년이어서 가능하다. 기초학문이란 이유로, 더 솔직하게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슬그머니 밀어둔 인문학을 골라낸 것 역시 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게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 나선 아이들을 '학교 밖'에서 만났다.

"'왜?'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든 해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또 이런 궁금증을 이상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하는 세상을 꿈꿉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조차 둔감해진 오늘날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인문학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소년, 세계와 통하다'라는 말을 줄인 '정세청세', 청소년 인문토론 모임이다.
인디고 서원 주최로 지난 2007년 부산에서 부터 시작한 이 모임은 현재 전국 17개 도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동시에 개최된다.
제주는 2011년 4월 꾸려져 김지수(20)·고은비(19)·김지영(18)·김영현(17)·양가연(17) 학생을 중심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까지 토론에 참여했던 김지수양은 올해 대학생이 돼 더이상 토론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모임이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정세청세 안에서 청소년들은 모임별로 주제를 정하고 관련된 영상을 보며 토론한다. 분명 학교나 학원에서는 쉽게 꺼내기 어려운 것들이다. 자기 안의 내밀한 생각들 또는 본질적인 물음을 끄집어 낸 뒤에는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소통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 지에 대해 고민한 다음 단계는 '실천'이다.
이 곳에서 '주입식'이니 '강압적 교육'같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는 하지만 가능한 청소년들이 주체적으로 배우고 나누며 스스로 깨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어느 순간 경쟁에 익숙해져버린 아이들이 상대방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변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익히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토론을 통해 생각의 잘못을 찾아내거나 보다 긍정적인 답을 찾아내면서 저절로 변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올해 세 번째 정세청세 모임이 지난 26일 제주시참사랑문화의집에서 열렸다.
16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열린 이날 모임의 주제는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였다.
1조와 2조로 나뉜 참여자들은 EBS '지식채널e'에서 방영된 '서른 살, 젊은 여자의 죽음' 'out of use' '네 잘못이 아니야' '눈물의 룰라' 등 짧지만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4편의 영상을 함께 보고 토론을 시작했다.
처음 참여하는 학생과 기존 참여 학생들 간의 어색한 침묵은 잠시 공간은 아이들이 쏟아내는 생각들로 이내 뜨거워졌다.
정치·경제·사회를 아우르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학교 안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비애와 슬픔, 폭력 등으로 이어졌다.
학교 폭력과 관련한 생각들은 무조건 대책만 앞세우는 기성세대들의 가슴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지금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하면 들어줄 사람'이고 '누가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두려움을 떨쳐낼 용기'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소속감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나만 아니면 된다는 자기합리화와 무관심'에 대한 답이다. 절대 누구를 어떻게 처벌하고 학교에 어떤 불이익을 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끼리'와 '우리'가 주는 묘한 어감의 차이가 학교폭력 문제를 푸는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에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날카로움이 묻어나는 그들의 토론은 그렇게 1시간 30분가량 계속 이어졌다.

기성세대의 가장 취약점인 '실천'단계에서 아이들의 강점은 빛을 발한다. 일단 의견이며 주장을 두서없이 쏟아놓고 주어 담지 못하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혜안을 던진다.
토론을 끝낸 아이들은 조별로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한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찾은 답은 공감대 형성.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모두가 함께 연대해 나가야 한다는 결론의 실천 방법으로 'UCC 영상 제작'을 결정했다. 작지만 짧은 영상이지만 자신들의 메시지를 함축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하고 동참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란 판단이 보태진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여건 안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고 가장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글을 써서 알리거나 캠페인 같은 방법도 있지만 여기에는 개인의 성향이나 자발성이 결여되는 약점이 있다. 자유·웃음·존중·배려·이해·공감 등 아이들이 생각하는 소중한 가치는 개개인의 연대를 통해 함께 지키고 키워나갈 수 있다는 것이 아이들의 생각이다.
"생각보다 일이 커져버렸다"며 수줍게 웃던 김지영양은 "솔직히 어떻게 꾸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정말 기대돼요"라는 짧은 말로 다음을 기약했다.
정세청세는 소통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만 있다면 14~19세 대한민국 청소년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문의=010-3087-1141(김지수 정세청세 제주총괄기획팀장). 변지철 기자 jichul2@jem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