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28. 프리다 칼로의 <우주의 사랑의 포옹.....>

▲ 프리다 칼로, <우주의 사랑의 포옹, 대지, 나, 디에고, 그리고 애견 세뇨르 솔로틀>
"프리다는 까다로운 여자" 리베라와 결혼 후 멕시코 전통의상을 즐겨 입어
바람기 많은 남편 어린애로 표현, 역설적으로 리베라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

꿈의 기억과 악몽, 무의식을 그리는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현실 참여 문제는 시대적인 조건과 연관돼 있다. 그러나 그 시대적인 조건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예술가 자신의 문제가 된다. 예술가들은 사회적인 문제와 자아의 문제 사이에서 늘 기울기처럼 살아간다. 

사회 참여적인 예술가들은 정치·계급적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사회적 가치를 지향할 것이고, 자아의 심상을 그리는 예술가들은 자신의 조형성을 탐구하면서 개인의 표현적 가치를 향해 질주한다.

미술사에서 무의식에 주목한 화가들의 유파를 '초현실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 영향을 받아 꿈의 기억과 악몽, 이상한 세계의 공포와 낯선 풍경들을 환기시키는 그림을 그린다. 초현실주의는 1924년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의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시작된다. 이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는 시인 아뽈리네르의 희곡 <티레지아의 유방 1917>에서 유래하였다.

시인이자 심리학자였던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 선언에서 "초현실주의는 이성의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또한 일체의 미적 ·도덕적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떠난 사유의 기술"이라고 규정하고, 이성의 통제에 의해 가려져 있던 무의식과 욕구를 자동기술적으로 그리는 기법을 생각해냈다. 이런 초현실주의적 경향은 어느 특정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미술사의 다양한 시기에 걸쳐 등장한다.

▲ 프리다 칼로 모습
멕시코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환상적이고 충격적인 그림을 그린 멕시코의 여성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정작 프리다 칼로 자신은 "사람들은 내가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오산이다. 나는 결코 꿈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훗날(1940년)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와 함께 '국제 초현실주의자전'에 출품하였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시티 교외의 아름다운 마을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9살 때 다리에 소아마비 증세를 보여 학우들로부터 절름발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녀가 15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네 딸 가운데 유일하게 그녀만을 국립대학 예비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1925년 9월 17일, 프리다 칼로는 대형교통사고를 당하여 골절과 탈골 등 전신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병상 생활을 잊기 위해 누워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 무렵 그녀는 첫사랑이었던 알레한드로가 유럽으로 떠나버려 육체적인 고통 위에 다시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 아픔과 실의(失意)에서 벗어나기 위해 1928년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했고 그 곳에서 운명적으로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당시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 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전설로 여겨졌고 멕시코 공산당의 열성당원이었다. 그는 '멕시코의 레닌'이라는 칭호로 불렸으며, 수많은 스캔들로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1929년 8월 21일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프리다는 결혼 이후 아름다운 멕시코 전통의상을 즐겨 입었는데 그런 행동은 자신이 멕시코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혼 생활 중 리베라는 공산주의 이념을 접어두고 사업가로서의 기질을 발휘했고, 수지가 좋은 미국대사의 벽화 의뢰를 계기로, 멕시코 공산당은 이중적인 도덕성을 비판하여 그를 공산당에서 제명하였다. 이때 프리다 칼로도 남편을 지지하기 위해 같이 탈당하였다. 그러나 그 이중적인 도덕성에는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비서와 모델들과의 잠자리를 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프리다가 임신 3개월 만에 유산하게 되면서 둘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1930년 리베라가 벽화를 그릴 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프리다 칼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 시기 그린 작품은 자신과 남편을 그린 초상화 스케치였다. 1932년 4월 프리다 칼로는 남편을 따라 디트로이트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프리다는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으나 그 아이마저 유산되고 말았다. 당시 유산의 아픔을 그린 그림이 <헨리 포드 병원>이라는 작품이다. 그 해 가을에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는 슬픔도 겪었다. 남편이 벽화로 유명세를 탈수록 멕시코에 대한 그녀의 그리움은 더욱 커갔다.

리베라가 록펠러 센터의 벽화작업을 의뢰받았으나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자 의뢰인이 그 계획을 취소하였다. 1933년 12월 둘은 다시 멕시코시티로 귀향하였다.

프리다 칼로에게 새로운 기회가 왔다. 뉴욕의 화상 쥘리앵 레비가 프리다의 독특한 작품 얘기를 듣고 그룹전에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했다. 1938년 10월 전시회 준비 차 뉴욕으로 프리다는 홀로 떠났다. 이듬해 앙드레 브르통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 것을 권유하자 리베라는 그녀를 설득하여 1939년 1월 프리다를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앙드레 브르통의 파리의 전시회 기획은 엉망이 되었다. 그때 프리다의 팬이었던 마르셀 뒤샹이 잠자리며 그룹전을 소개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파리의 화상 피에르 콜르가 주관한 '멕시크(Mexique)'라는 전시회에서 프리다의 작품들은 고대 멕시코의 형상들, 19세기 멕시코 화가들의 작품, 멕시코 근대 사진작가들의 작품들 사이에 걸려 관람객들의 관심을 독차지하였다. 이 전시에서 루브르 박물관은 프리다의 작품 한 점을 구입하였다.

파리에서 뉴욕을 거쳐 멕시코에 돌아온 프리다에게 기다리는 것은 디에고와의 이혼이었다. 그러나 둘은 1년이 채 안 돼 재결합하여 프리다의 고향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1943년 신설된 국립미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녀의 진보적인 교육방식은 많은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병세가 악화되자 통근할 수 없는 프리다를 위해 학생들이 집으로 찾아와 수업을 들었다.

프리다의 교통사고 후유증은 점점 악화되어 누워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육제척인 고통과 함께 리베라의 외도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1946년 뉴욕에서 척추 대수술을 받았지만 고통은 잠시 완화되었을 뿐 다시 보정기구를 착용해야 했다. 다시 실의에 빠진 프리다는 강한 진통제와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1948년 프리다는 공산당에 재가입하였다. 1950년 프리다는 다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프리다는 간병인에 의지하는 몸이 되었고, 다시 독한 술을 약과 섞어 마셨다. 그래도 힘이 닿는 한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하였다. 육체의 아픔은 화풍마저 거칠게 변화시켰다. 리베라의 종잡을 수 없는 태도 때문에 프리다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하였다. 1953년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린 그림을 모아 멕시코시티의 현대미술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걷지 못하는 프리다는 구급차를 타고 들것에 들려 전시장 안에 마련된 침대에 앉아 오픈식을 열었다. 전시회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전 세계로부터 축하메시지를 받았지만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4년 7월 2일 프리다는 의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디에고와 함께 과테말라의 좌파 대통령을 지지하는 집회에 참석했다가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7월 13일 프리다는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멕시코시티 왕립미술관에서 거행되었고, 유골은 고대 멕시코 공예품 단지에 담겨 고향인 코요아칸의 파란집 '카사 아슬'에 안치되었다(클라우디어 바우어, 2007).

▲ 프리다 칼로가 살던 집
프리다의 작품 <우주의 사랑의 포옹..........>

프리다 칼로의 <우주의 사랑의 포옹, 대지, 나, 디에고, 그리고 애견 세뇨르 솔로틀>이라는 긴 제목의 작품은 프리다의 예술세계를 함축하고 있는 작품이다. 프리다는 리베라를 모성적 본능으로 대하고 있어, 리베라를 내 아이, 내 갓난아기, 매일 매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일기에 쓸 정도였다. 초록으로 물든 대지의 여신은 멕시코다. 대지는 모든 자연을 감싸 안고 평화롭고 넉넉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프리다는 다시 어린 아기 모습의 남편 리베라를 안고 있다. 대지의 여신, 멕시코로 투사되는 어머니로서 프리다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감싸는 위대한 대지의 어머니로 중첩된다. 수많은 여성편력을 참아가며, 관대한 모습을 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리베라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대지의 여신은 모든 것을 평온하게 해준다. 우주의 조화로움이란 바로 넉넉한 사랑의 포옹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제주대학교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