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면] 1.프롤로그
거센 파도·세찬 바람 이겨내고 묵묵히 견뎌왔던 삶의 무게
갇힌듯 하나 트여 있고 가고 싶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 곳
섬의 매력은 일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섬으로 여행으로 떠나곤 한다. 제주도 본섬에 속한 유인도에는 오래전부터 제주인들의 삶과 문화가 깃들어져 있다. 그것은 제주 본섬과는 다른 형태로 공존한다. 하지만 그 섬에 터전을 잡고 거센 바람과 세찬 바람을 이겨내야 했던 주민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바다에 갇혀 있지만 언제나 트여있는 곳, 가고 싶지만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 바로 마라도·가파도·비양도·우도·추자도다.
| <글 싣는 순서> |
#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
태풍의 길목 마라도의 자연은 거칠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에도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이다.
마라도에는 사람 키를 넘는 나무를 찾아보기 어렵다. 섬 전체를 둘러봐도 나무 그늘을 찾을 수 없다. 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뜨거운 태양에 살갗은 자극한다.
마라도는 분명 거칠고 척박한 땅이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섬사람들이 있다. 마라도에 사람이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김(金)·나(羅)·한(韓) 등 3성(姓)의 몇몇 영세농민이 들어오면서부터다. 지금은 매일 적게는 1000여명, 많게는 4000여명에 달하는 관광객들도 이 섬의 일부가 됐다.

때문에 마라도의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마지막 배를 맘 편히 보낼 수 있는 결단도 필요하다.

# 청보리 물결 출렁출렁
제주의 부속섬 중 4번째로 큰 섬, 가파도. 최고봉은 약 20m, 구릉이 거의 없이 평판한 지대로, 국내 유인도 중 가장 낮다.
가파도는 애매했다. 국토최남단 마라도와 모슬포 사이에 위치, 가파도의 존재감은 희미했다.
관광객들에게 가파도는 그저 마라도 가는 뱃전에서 잠시 눈으로 흘깃 스쳐지나가는 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말은 물론 평일에도 가파도를 찾는 관광객들로 온 섬이 출렁인다. 그동안 '볼 것'이 없었던 가파도에 '청보리 파도'와 함께 '인파'가 덮친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것이 변했다.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 단산, 군산, 고근산까지 여섯 산이 보이는 제주의 유일한 곳이다.
섬에서의 삶이 만만하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이곳의 교육열은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인 김성숙 선생이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1921년 지금의 가파초의 전신인 '신유의숙'을 설립했다. 이 작은 섬에서 항일운동가와 여성운동가가 배출됐음은 우연이 아니다.
가파도의 또 다른 볼거리는 바로 고인돌이다. 지금은 선사문화공원으로 지정돼 고인돌이 보호받고 있지만, 일부는 이미 원래 자리를 벗어나 밭담 등으로 쓰이고 있다.

# 흰 모래가 연출하는 옥빛 바다
책자마다 비양도는 '천년의 섬'이라고 소개돼 있다. 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때문일 터이다. 기록에는 '고종 5년(1002년) 산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솟아 나왔는데, 산꼭대기에 4개의 구멍이 뚫려 붉은 물이 솟다가 닷새 만에 그쳤다'라고 남아있다. 이처럼 역사시대의 화산활동 기록을 갖고 있는 비양도는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질 때까지 제주의 다른 유인도에 비해 관광객들이 찾지 않았던 곳이다.
섬은 고운 모래밭이 연출하는 옥빛 바다, 섬을 둘러싸고 있는 용암바위, 바닥으로 바닷물이 스며들어 형성된 연못 펄랑, 비양도를 지키고 있는 비양봉 등 발길 닿는 곳곳마다 감탄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생을 이어왔던 주민들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화산 등성이에는 같대만 무성하고 밭은 없어 식량 마련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해저파이프로 식수가 공급되고 있지만, 예전 비양도는 '물 없는 섬'이었다.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비양도 인근 어장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비양도를 마주보는 제주 서북해안 마을 어촌계가 이곳에서 대대적으로 전복 등을 채취해왔기 때문이다. 비양도에서의 삶은 옥빛 바다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었다.

# '우도팔경' 이면의 거친 숨비소리
소를 닮아 우도(牛島)라고 불리는 섬. 성산항에서 불과 10여분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섬이다. 사(홍조단괴)며 이곳저곳을 귀동냥하며 둘러보던 곳이었다. 최근 들어 우도를 찾는 관광개수는 한 해 100만명을 헤아린다. 오죽하면 자동차 출입 대수를 제한했을까.
우도는 17세기까지만 해도 방치된 무인도였다. 1697년(숙종 23년) 우도에 목장을 설치한 것이 개척의 시작이다. 이후 1844년 마을이 형성, 지금에까지 이르렀다.
우도에는 '우도팔경'이라는 풍경이 있다. 낮과 밤(주간명월·야항어범), 하늘과 땅(천진관산·지두청사), 앞과 뒤(전포망대·후해석벽), 동과 서(동안경굴·서빈백사)가 바로 그것.
섬의 남동쪽 쇠머리 오름에는 우도 등대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 오르면 눈 앞에 장애물 하나 없이 드넓은 바다가 열린다.
하지만 우도의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치열한 삷과 생존을 위해 절박한 현실 속에 가족을 위해 굳세게 살아온 억척스러운 '우도 해녀'들의 거친 숨비소리가 있다.

# 제주·호남의 징검다리
추자도에서는 제주도 방언을 듣기가 쉽지 않다. 행정구역상 제주도에 속해 있지만, 자연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제주와 호남의 '징검다리'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전라도에 딸린 섬이었다. 1946년에 북제주군에 편입됐으니 제주도에 적을 둔 것은 불과 60여년이다.
특히 청정해역으로 유명하다. '바다낚시의 천국'이라고 할 정도로 바다낚시를 얘기하면 추자도를 떠올린다.
물살이 빠르고 수심의 깊은 암반층으로 구성된 청정해역인 추자도 연근해는 예로부터 고급어종인 참조기, 삼치, 참돔, 돌돔, 농어, 방어가 회유하는 우리나라 황금어장이다.
이로 인해 추자도는 끊임없이 왜구에게 시달렸다.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수적'이라는 도둑떼가 설쳐댔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산자원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이 이곳에 진을 쳤다. 섬의 원래 주인들은 섬의 한 구석으로 밀려났다.
추자도는 또한 누군가에겐 절망의 섬이었다. 절해고도에 귀양을 온 이들의 삶은 너나할 것 없이 기구했다. 몇몇은 풀려나 섬을 떠나고, 몇몇은 종신형으로 섬에서 살다가 추자도의 조상이 되어 뼈를 묻었다. /글=강승남 기자 / 자문위원=김완병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 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