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57> 4·3보고서 발간 진통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보고서인데…" 반박
 서문 둘러싼 공방전에 강택상 해결사 역할

4·3보고서 발간 진통

   
 
  4·3진상조사보고서 서문을 둘러싸고 격한 논란이 벌어졌다. 위쪽의 활자체는 필자의 초안이고, 아래쪽의 내용은 신용하 위원이 구술한 것을 필자가 받아 적은 것이다.  
 

2003년 10월15일 4·3진상조사보고서 최종 확정, 10월31일 대통령 사과 표명으로 큰 산을 넘었다는 안도감을 갖고 진상보고서 발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대외적으로는 수정의견을 반영해서 11월말 발간 예정임을 밝혔다. 그런데 보고서 발간작업은 뜻하지 않은 일로 진통을 겪게 됐다.

고건 국무총리는 보고서 최종 발간을 앞두고, 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본문 이외에 위원장(고건 총리) 명의의 서문과 추가로 실릴 부록 등은 보고서 검토소위원회 민간인 위원들이 논의해서 결정하라고 위임했다. 검토소위 민간인 위원 회의는 주관위원인 신용하 위원을 비롯해서 김삼웅·서중석·유재갑 위원과 박원순 기획단장이 참석하는 구도였다. 여기에 강택상 지원단장과 필자가 배석했다.

수석전문위원인 필자는 소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위원장 서문 초안 등을 작성해서 보고 차 신용하 주관위원 집무실을 방문했다. 찾아간 곳은 서울 효창공원 안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이었다. 신 위원은 당시 백범학술원 원장을 맡고 있었다.

필자가 마련한 위원장 서문 초안은 이미 4·3보고서가 최종 확정되던 날 언론에 공개됐던 내용을 골간으로 작성했다. 그때 언론에 발표됐던 것은 "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중점을 둬 작성됐고, 사건의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는 앞으로 새로운 자료나 증거가 발굴되면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앞에서 밝혔지만, 고건 총리가 주재한 2003년 10월7일 제4차 검토소위에서 신용하 위원이 이 보고서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보·혁 간의 끊임없는 소모적 논쟁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전제하고 "동 보고서는 4·3사건의 성격 규정과 역사적 평가를 위한 것보다는 4·3특별법의 목적인 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란 내용을 서문에 밝히자고 제안하면서 격론이 있었다.

그런데 신 위원은 내가 작성한 보고서 초안을 보더니 뜻이 잘못 전달됐다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술할 터이니, 나에게 받아 적으라고 했다. 필자는 이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날 받아 적었던 내용을 그대로 적는다.

"본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특별법의 목적을 성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작성된 보고서이다. 제주4·3특별법은 그 목적으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의 역사적 성격, 역사적 평가와는 관계없는, 4·3사건으로 인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회복과 관련된 피해실태보고서이다. 본 보고서에 일부 역사적 평가내용이 있더라도, 그것은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것으로, 정부의 입장은 아니다"

구술하는 대로 받아 적던 나는 "정부의 입장은 아니다"는 대목에 이르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면 그동안 수없이 밝혔던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지만 신 위원의 태도는 완강했다.

11월5일 진상조사보고서 발간을 논의할 검토소위 제5차 회의가 열렸다. 나는 차마 신 위원이 구술한 내용을 그대로 보고할 수 없어서, 종전의 초안을 보고하는 형식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자 신 위원은 화를 내면서 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인격모독적인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회의가 진행되면서 김삼웅·서중석 위원과 박원순 기획단장이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의견을 개진했다. 때로는 고성이 오갔으나 신용하 위원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날 회의에선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회의가 끝난 후 박원순 기획단장(현 서울시장)은 나에게 "어떻게 그리 잘 참느냐"고 위로 겸 핀잔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더한 일도 참아냈는데 보고서 발간을 위해서 이 정도는 참자'고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이 난관을 헤쳐 갈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을 그냥 보냈다. 진상보고서를 발간해야 할 터인데, 완전히 발이 묶인 형국이었다. 내가 끙끙거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강택상 지원단장이 고맙게도 자신이 나서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강 단장이 신 위원을 방문해서 나온 절충안이 "제주4·3특별법의 목적에 따라 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들의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어 작성되었으며, 4·3사건 전체에 대한 성격이나 역사적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후세 사가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였다.

11월15일 열린 검토소위 제6차 회의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어렵게 이 절충안이 통과됐다. 김삼웅 위원은 끝까지 이런 표현에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4·3진상조사보고서는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당초 예상보다 보름가량 늦은 12월 중순에 빛을 보게 됐다. 

☞다음회는 '4·3보고서 최종본 발간'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