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32. 피테르 브뢰겔의 <눈 속의 사냥꾼>
브뢰겔 죽기 전 가족 위해 정치적인 성격을 띤 소묘작품 없애 달라 부탁
리얼리즘 시각으로 세상을 기형과 괴기스러움에 빗대 현실 날카롭게 비판
북유럽 르네상스
미켈란젤로의 제자이며 건축가인 조르지오 바자리(Georgio Vasari, 1511~1574)는 미술가로서의 명성보다는 그가 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때문에 이론가로서 더 유명했다. 재생, 부활이라는 뜻을 가진 '르네상스(Renassance)'라는 용어는 바로 바자리의 저서 서설에 처음 등장하는 말이다. 1400년대 초기 유럽은 신의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하였다.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리스키(Fillippo Brunelleschi, 1377~1446)를 중심으로 한 미술가들이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낡은 미술 개념에서 벗어나고자 시작되었다. 르네상스의 영향은 처음 로마와 베네치아로 퍼져나갔고, 1500년경에는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으로 전파되었다. 이를 북유럽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은 정교하게 그리는 사실주의 요소가 강하고, 종교적이면서도 가정적인 묘사가 많다. 또한 부르주아와 농민의 초상이 등장하는데 개개인의 성격을 잘 표현했으며 화면은 복잡하고 불규칙적인 구도를 선호했다.
르네상스 시기 형식면에서 4가지 혁신적인 요소로는 유화의 발명에 의한 새로운 안료의 등장, 원근법을 이용한 거리감의 확장, 명암 대조법을 통한 인물의 감정과 깊이감의 표현, 피라미드 구도를 통한 안정적인 구성력의 확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혁신적 내용적 특징으로는 인간적 관점에 의한 신의 권위의 상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현실 세계를 더욱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은 과학, 자연 및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학에 심취하였고, 과학을 숭상하였으며, 자연과 진리 탐구에 열정을 발산하였다.
북유럽 르네상스에서 네덜란드 미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플랑드르 지방으로 불렸으며,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지역을 일컫는다. 네덜란드는 북해와 근접해 있으며 라인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으로 해상과 하천 교통이 매우 발달하였다. 또 네덜란드는 해운업과 방직업의 발달로 도시가 번영하고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도로 발달한 덕에 남부 유럽 국가인 이탈리아와 함께 당시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 북유럽에서 가장 기억될 만한 것은 유화(油畵)의 발명이다. 유화의 발명자는 휘베르트(Hubrecht, 1366~1426)와 얀(Jan)이라는 이름의 반 에이크(van Eyck) 형제로 플랑드르(벨기에) 메제크 출신이었다. 이들은 유화의 발명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우상처럼 여겨져, 형 휘베르트 반 에이크는 생전에 그의 오른팔이 성스러운 유품으로 보관되도록 예정되었을 정도였다. 유화를 가지고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준 동생 얀 반 에이크는 더욱 명성을 얻었다. 새로운 회화 기법을 개척한 반 에이크 형제는 사후 교회의 묘지에 모셔졌다.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가족의 협력을 얻고 있었으며, 대를 이어 전수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브뢰겔(Breughel) 집안이다. 브뢰겔 집안에서 유명한 사람은 피테르 브뢰겔이며, 다음으로 피테르 브뢰겔(큰 아들), 그리고 얀 브뢰겔(작은 아들)이다.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의 계보는 반 에이크, 바이덴, 피테르 브뢰겔, 루벤스, 렘브란트 등이다. 피테르 브뢰겔(Pieter Breughel, 1525경~1569)은 16세기 네덜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로 유럽 회화의 역사상 최초로 농민의 삶을 기초로 한 풍속화를 그렸다.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농민화가 브뢰겔'이라고 불렀다.
피테르 브뢰겔의 태어난 해와 출생지에 대해서 미술사학자들은 대개 1525년경으로 추정하며, 태어난 곳은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부 브레다로 예상하고 있다. 브뢰겔의 부모는 농부였다. 브뢰겔은 20대에 안트훼르펜에서 피테르 코크 반 알스트로부터 화가 수업을 받았다. 1551년 피테르 발텐과 함께 메켈른의 장갑 제조 조합을 위한 제단화 바깥 부분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이 제단화는 남아 있지 않지만 브뢰겔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같은 해에 안트웨르펜의 성 루가 화가 조합에 마이스터로 등록되었고 상인인 한스 프랑케르트와 친분을 쌓았다. 1552~53년 브뢰겔은 남부 프랑스와 알프스를 거쳐서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때 지도 제작자인 오르텔리우스와 같이 동행하였다. 여행 중 로마에 머무는 동안 세밀화가 줄리오 클로비오와 함께 작업하였고 이때 그린 풍경 스케치가 여러 점 전해 온다. 1556~57년 안트웨르펜에서 히에로니무스 코크의 판화 공방을 위해 <네 개의 바람>의 밑그림을 그렸다. 판화로 제작된 브뢰겔에 작품 중에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큰 물고기>와 <학교의 당나귀>라는 작품이 있다.
1559년 <미덕>에 관한 7점의 인그레이빙 판화 연작을 제작하였는데, 화가의 이름 표기를 'Brueghel'에서 'Bruegel'로 서명을 바꾸었다. 네덜란드 종교 축제인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풍속적인 주제의 <네덜란드 속담 그림> 등과 같은 일상적인 주제를 다룬 그림을 많이 그렸다. 1560년 네덜란드는 교회가 금지하고 있던 시체 해부를 연구 목적을 위해 허용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이 해에 그는 <어린이들의 놀이>를 그렸다. 1562년 브뢰겔은 <바벨탑>, <사울 왕의 자살>, <죽음의 승리>, <반항 천사의 추락> 등 성서 주제의 그림을 많이 그렸고 1563년 스승의 딸 마이켄 쿠케와 결혼한 직후에 브뤼셀로 집을 옮겼다. 이듬 해 첫 아들 피테르가 태어났다. 피테르는 공상화를 잘 그렸다.
1565년 달력 그림으로 <눈 속의 사냥꾼>, <음산한 날>, <건초 수확> 등을 그렸고, 신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이카로스의 추락>, <아펠레스에 대한 모함>을 그렸고, 1566년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제작했다. 이듬 해 펠리페 2세가 6만 명의 군사와 알바 공작을 네덜란드 브뤼셀에 급파하면서 무자비한 피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 때 약 8천여 명의 네덜란드인 민중 봉기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이 해에 극한적인 학살의 시대를 비웃듯이 브뢰겔은 그의 대표작이 된 <결혼식 피로연의 춤마당>, <게으름뱅이 천국>을 그렸다. 1568년 둘째 아들 얀이 태어났다. 얀은 후에 벨벳의 브뢰겔로 알려졌다. 얀은 큰 아들과 반대로 장미, 복숭아, 살구 그림을 벨벳 같은 질감이 느껴지도록 잘 그렸기 때문이다. 브뢰겔은 둘째 아들을 낳은 해에 <교수대 위의 까치>, <원숭이 두 마리>, <염세가> 등을 완성했다.
브뢰겔은 1569년 12월 5일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병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주검은 그가 결혼했던 브뤼셀의 노트르담 드 라 샤펠 교회에 묻혔다. 이 해에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의 학정에 저항하는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1604년 카렐 반 만데르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담은 『화가들의 생애』를 출간했는데 여기에 피테르 브뢰겔의 작품들이 실렸다.반 만데르에 의하면, 브뢰겔은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불똥이 튈까봐 정치적인 성격을 띤 소묘작품들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피테르 브뢰겔은 풍속화, 풍자화, 공상화의 대가이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허무주의적이고 풍자적인 그림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그의 그림에는 농부들의 생활상을 풍속화 차원으로 확장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또 그는 풍자를 통해 당시 스페인 지배 하의 네덜란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죽음을 패러디하거나 소경들의 괴이한 모습을 통해 사회적인 비판을 가하였다. 그는 세상을 리얼리즘 시각으로 보아 민중들의 생활상을 생생히 묘사하였다. 브뢰겔은 파노라마 기법을 구사하여 화면 가득하게 인물을 등장시켜 흥미로운 상황을 연출한다. 등장인물의 표정과 동작을 디테일하게 표현하는데 선은 간결하고 색채의 대비를 강렬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의 그림은 다양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과장과 왜곡을 통해 사건의 내용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예전에 중학교 미술교과서에 눈 밭 위를 개들과 함께 걸어가는 사냥꾼을 그린 피테르 브뢰겔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 멀리 마을의 공터는 얼어붙었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타거나 춤을 추고 있고 몇몇은 쓰러져 있다. 흑백의 대비처럼 선명한 색채는 흰색의 눈과 녹회색의 하늘과 얼음으로 구분돼 있어 더욱 추운 겨울임을 느끼게 한다. 꿩이 나는 싸늘한 풍경, 온 세상이 얼어붙은 가운데 개와 함께 사냥을 다녀오는 사람들은 검은 색으로 그려졌다. 이런 그림의 유형은 중세 후기 귀족들의 기도서에 실려 있었다.
예를 들어 1월에는 영주가 풍성한 연회를 열어 손님을 초대하는 그림이 실린다. 2월에는 농부가 나무를 베는 그림, 3월에는 농부가 밭을 가는 그림, 4월에는 젊은 귀족이 시골에서 약혼식을 거행하는 그림, 5월에는 말을 타는 그림 등이 실리는 식이다.
제주대학교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