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은자의 '예술작품 기행'] 35. 김홍도의 <빨래터>

▲ 김홍도 작 <소림명월도>
김홍도, 풍채가 아름답고 그릇이 커서 그에게 "신선 가운데 사람"이라 말해
회화 전 분야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김홍도의 그림, 천재 화가의 시대적 초상

도화서 화원화가

이동주(李東洲) 선생에 의하면, 조선시대 그림에 있어서 두 개의 절정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조선 전기의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顔)의 시대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조선 후기의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시대를 가리킨다. 이런 절정기는 조선 전기의 세종과 세조의 성세(盛世), 그리고 조선 후기의 영조와 정조의 치세·중흥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원 김홍도는 조선 후기 절정기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이다.

단원 김홍도는 세간에 풍속화가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풍속화만을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산수(山水)·화조(花鳥)·영모(翎毛)·사군자(四君子)·고사인물(故事人物)·도석(道釋) 등에도 능했다. 산수는 금강산 등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그림이고, 화조는 꽃, 나무, 새를 그린 그림이다. 영모는 개, 호랑이, 고양이 등의 동물을 그린 그림이고,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고사인물은 중국의 명사(名士)의 일화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도석은 도교(道敎)의 노자나 불교의 보살, 여래 등을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회화의 큰 줄기는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양반 사대부들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문인화, 도화서 화원들의 그림인 화원화(畵員畵), 일반 민중들의 그림인 민화(民畵)가 그것이다. 그 가운데 도화서 화원화는 왕실의 각종 의례화, 초상화, 장식화, 관방지도 등을 사실적인 채색화로 그린 그림이다. 단원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도화서 화원 화가이다.

도화서(圖畵署)는 태조 원년에 창설한 공무원 화가를 관리하는 기구를 말하는데 처음에는 도화원이었으나 후에 도화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화서는 잡과에 해당하며 중인계급이 세습하다시피 했다. 도화서는 낮은 관아(官衙)로 종 6품에 해당하는 별제(別提)·선화(善畵)·교수(敎授)가 최고직이다. 그래도 화원으로서 종 6품에 이르게 되면 출세한 경우이고,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영영 종9품에 머물게 된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직급이 낮은 이유는 문기(文氣)를 우선시하는 분위기 때문이며, 환쟁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화가를 하나의 기술자(工匠)와 같은 수준으로 보았다.김홍도는 화원화가로 나이 30세에 임금의 영정을 그리는 어용화사 후보로 뽑힌 바 있고, 영조의 용안(龍顔)을 그린 공으로 문신(文臣)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37세에 정조의 어진(御眞) 초본을 그렸고, 후에 연풍 현감을 지냈다.

▲ 김홍도작 <남해관음도>,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

김홍도(1745~1806년경)는 영조 21년인 1745년에 태어났다. 자는 함장(含章) 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취화사(醉畵史),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농한(農漢), 단노(檀老), 단옹(檀翁) 등이다. 당호(堂號)는 대석암(對石菴), 오수당(午睡堂)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아버지는 석무(錫武), 할아버지는 수성(壽星), 단원의 5대조가 수문장(守門將)을 지냈고, 고조부가 별제(종6품), 증조부가 만호(종4품)를 지냈다.

그는 7세를 전후한 어린 나이에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문하에서 화법을 익혔다. 표암은 김홍도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그에게 시문서화(詩文書畵)를 가르쳤다. 안타깝게도 김홍도의 청소년 시절에 대해선 전해오는 바가 없는데 21세 때에 영조가 열었던 행사의 병풍을 제작했다고 하나 전해오지 않는다.

28세에 김홍도 외 15명의 도화서 화원들이 궁궐 건축의 그림을 그렸다. 29세 때 영조의 어진 및 정조의 왕세손 시절 초상화 작업에 동참 화사로 참여했다. 정조 어진 제작에 참여한 공으로 변방의 장수직(將帥職)에 임명됐다. 1774년 30세에 별제가 돼 스승 강세황과 사포서에서 함께 근무했으며 이때 이미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34세 봄 부채 그림과 <행려풍속도>를 제작했고, 그 해 12월 단원의 대표작의 하나인 <서원아집도)를 제작했다.1782년 38세에 스승 강세황과 함께 호랑이 그림을 그렸고, 39세 때 12월 28일 경상도 안기 찰방에 임명되자 이듬 해 정월에 안기 찰방으로 부임하였다가 3년 후인 42세가 되는 5월에 안기찰방의 임기를 마치고 도화서로 복귀했다. 44세의 9월 13일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스승 강세황과 동행했다. 김홍도는 장안사, 백탑동 일대와 유점사를 사생하고 회양 관아를 들러 스승 강세황을 만나서 그동안 그린 작품을 보여주고 작별의 글을 가지고 한양으로 귀경했다. 이후 50미터가 넘는 두루마리 그림 <금강산도>를 채색화로 제작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1790년 46세에는 용주사 불탱 작업을 216일 동안 주관하여 완성한 공으로 정 6품 사과 벼슬에 임용됐다. 47세 1월 23일 스승이자 평생 곁에서 후원을 해준 표암 강세황이 77살의 일기로 타계했다. 같은 해 9월 22일 정조 어진 초상화 제작에 동참 화사로 참여한 공으로 12월 22일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됐다. 김홍도는 연풍 현감으로 재직할 때 관아의 구휼미에 의지하지 않고 재량껏 죽을 끓여 백성을 구제했으나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1796년 52세가 된 봄에 <단원절세보첩>20점을 그렸고, 56세 정월 초에 <주부자시의도(朱夫子詩意圖)>8폭 병풍을 그려 진상하자 정조는 이 작품을 보고 감명을 받아 김홍도가 쓴 주자의 원시(原詩)에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 정조는 김홍도의 제주를 지극히 아끼었고, 그의 최고의 후원자였다.

60세에 김홍도는 자비대령화원이 된 후 속화를 많이 그렸고, 2년 뒤인 1806년 62세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홍도작 <빨래터>
김홍도의 <빨래터>

냇가의 빨래터는 한국인에게 매우 친근한 장소이다. 주로 여성들이 드나드는 곳인 빨래터는 제주의 불턱과 같은 여성 공론의 장이기도 했다. 김홍도의 제자로 알려진 신윤복의 <단오풍정(端午風情)>은 김홍도의 <빨래터>와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슷한 구도와 여인들의 포즈, 훔쳐보는 시선은 김홍도의 <빨래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윤복의 그림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훔쳐보는 사람이 선비에서 동자승으로 바뀌었고, 그네 타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구도에 있어서 김홍도가 X자 구도인 반면, 신윤복은 원형 구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다르다.

스승 강세황은 김홍도를 평가함에 있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홍도는 풍채가 아름답고 그릇이 커서 자질구레한 예절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그를 일러 "신선 가운데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홍도는 "모든 그림에 경지를 이루었고, 특히 신선 그림에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김홍도는 조선의 인물과 풍속을 묘사하기를 잘하여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린 것이 없으니 옛적에도 이런 솜씨가 없었다."고 했다.

또한 강세황은 "풍속을 그리는 데에 능하여 인간이 일상생활의 모든 것과 길거리, 가게, 과거장면, 놀이마당 같은 것도 한번 붓이 떨어지면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김사능(金士能)의 풍속화가 바로 이것이다. 머리가 명석하고 신비한 깨달음이 있어서 천고(千古)의 오묘한 터득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고 했다.

회화 전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던 김홍도의 그림은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화가의 시대적 초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쟁이에서 현감까지 신분이 상승했던 그 이면에는 한국미술의 천재가 된 김홍도의 보이지 않는 슬픔과 땀이 영글어 있다.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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