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오름 나그네] <35>성불오름

문헌들 '성불암' 기록… 정상부 스님 형상석도
전형적인 옥문형 분화구 '유명' 탐방에 1시간
성불오름은 왠지 '불심(佛心)'이 느껴지는 오름이다. 비단 이름 자체에 불교의 최고 덕담인 '부처가 되시라'는 성불(成佛)이 들어가 있어서만은 아닌 듯하다. 모양부터 범상치 않다. 정상부 바위는 염불하는 스님의 모습을 닮았다고도 한다. 그리고 고려시대 창건돼 약 500년간 부처를 모셨던 성불암도 있었다. 그 사찰의 기운이 지금까지 남아서 은은하게 불심을 전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특히 성불암은 북동사면이 여성의 '고샅'을 연상케 하는 전형적인 옥문형(玉門形) 분화구로도 '유명'하다. 생명의 근원을 닮은 형상을 하고 불심을 나누는 듯한 성불오름이다.
성불오름 소재지는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266번지다. 동쪽으로 번영로를 달리다 부대악·부소악을 지나면 대천동사거리 너머 바로 직선으로 보이는 오름이다.
성불오름은 북동쪽으로 터진 말굽형 분화구와 남쪽과 북쪽 2개의 봉우리를 갖고 있다. 비고는 97m로 도내 368개 오름 가운데 125번째이고 면적은 38만707㎡로 97번째다. 저경 711m에 둘레는 2221m다. 한자로 성불악(成佛岳)·성불암(成佛岩)이라 쓰고 성부람·성보람·성불오름 등으로 불렀다. 어원은 2가지로 모두 '불교'와 연관이 있다. 우선 고려시대 성불암(成佛庵)이라는 암자가 있어서 성불오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음은 동사면 정상부 바위가 염불하는 스님의 모습을 닮았다는 데서 연유했다는 설이다. 일부에선 부인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문헌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성불암이 존재했고, 그래서 성불오름이라 부른 게 아닌가 여겨진다.

성불오름은 제주시에서 약 26㎞다. 번영로(탐방로지도 K)를 타고 대천동사거리에서 직진해 2㎞여를 가면 된다. 제주시 기점으로 '성불오름' 표석이 세워진 곳(〃B)까진 26㎞이나 요즘은 300m 전에 마련된 '성불오름가는길' 무인카페 주차장(〃A)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꿩엿·전복엿·감귤조청·귤쨈·해초쨈 등도 파는 이곳에선 커피나 토스트 등 요기는 물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다.
어느 곳을 출발해도 3분이면 성불목장(〃J)을 가로지르는 탐방로 입구(〃C)다. 270m의 완만한 경사의 풀밭 길을 지나 오름 초입에서 들어서자마자 하부 갈림길(〃D)이다. 오른쪽으로 오르는 게 낫다. 경사도 상대적으로 덜 가파르고 성불천도 아껴뒀다 나중에 볼 요량이다. 출발 후 10분 상황이다.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한 숲속을 거슬러 7분정도 올라가면 개활지다. 가을을 알리는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며 반가이 맞이한다. 관목들 사이로 거문오름·부소악·부대악과 민오름 등 성불오름 북쪽 오름군들이 눈에 들어온다.
정상부까진 관목지대와 억새밭 등이 번갈아 나타난다. 탐방 시작 30분 만에 최정상인 남쪽 봉우리(〃E·표고 361.7m)다. 남쪽은 깎아지른 듯 경사가 아주 급하다. 정상부 능선을 따라 남쪽에서 동쪽으로 30여m 구간에 대형 노두(露頭)가 발달해 있다. 화산 분출시 용암 반죽 같은데 달라붙은 스패터(spatter)다.
이들 바위 중에 염불하는 스님의 모습이 있다고 하나 주변의 관목과 수풀들이 무성해 확인이 힘들다. 성불오름이라는 이름에서 연유, 여러 바위 가운데 하나에서 스님의 모습을 찾아낸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해본다.
정상에서의 경관도 일품이다. 멀리 북동쪽의 높은오름부터 거미오름·백약이·좌보미·비치미·개오름·모구리·영주산을 거쳐 남쪽의 영주산·모지·따라비·새끼오름과 남서쪽의 대록산과 소록산까지 180도에 걸친 파노라마다. 서쪽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오름군들의 실루엣도 펼쳐진다.
내려오는 길은 쉽고 짧다. 정상을 출발해 5분이며 성불천 가는 갈림길(〃F)이다. 좌회전해 조금 올라가면 과거 이 지역 주민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던 성불천(〃G)이다. '탐라지(1653년)'는 "정의현 부근에서는 오로지 성불오름에서만 물이 난다"고 기록할 정도다.

2개의 옹달샘을 한곳으로 모은 형태다. 과거처럼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지금도, 비록 '졸졸졸'이지만 계속 흐르고 있는데, 이게 불가사의다. 비고가 100m되지 않는 '조그만' 오름 중턱에서 어떻게 물이 마르지 않고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강순석 제주지질연구소장은 "오름의 경우 보통 독립된 지하수 순환시스템을 갖고 확보된 강수의 범위에서 물이 솟지만 성불오름은 아주 특이해 설명하기 곤란하다"며 "수원 공급 시스템 등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특히 성불오름은 북동면이 여성의 고샅을 닮은 것으로 유명하다. 말굽형으로 용암이 빠져나간 골짜기로 좌우에 우뚝한 봉우리에서 곡선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다 가운데가 봉긋한 형상인데 그 아래쪽에서 샘물이 나오니 영락없이 '옥문형(玉門形)이다. 말굽형 오름에서 정확히 중앙부분에 고샅의 형상이 있고 그 밑에 물이 흐르는 아주 드믄 경우다. 지금은 주변의 삼나무 등이 무성, 봉긋했던 가운데가 오히려 낮게 보여 '옛 모습'을 상상할 뿐이다.
'잃어버린' 성불암터(〃H)는 성불천 위쪽 고샅 너머 화구 쪽으로 추정된다. 넉넉한 수량의 샘물과 완만한 경사의 적지 않은 면적 등 오름 어디를 봐도 암자가 들어설만한 공간은 이곳뿐이다. 그렇다면 절터는 고샅 위쪽 자궁의 위치에 해당하는 셈이다. 우리 모두가 그곳에서 생명을 얻어 이 세상에 나왔으니, '풍수상' 그 자리에 절이 들어설 법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불천을 출발, 7분이면 갈림길을 거쳐 오름 초입이다. 다시 비슷한 시간을 걸으면 출발했던 주차장이다. 전체 탐방에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성불오름의 식생은 삼나무림과 해송림 및 정상부 일부 초지로 구분된다. 오름 입구에서 시작되는 삼나무 조림지에는 알꽈리·십자고사리·큰천남성·고비·뚝갈·왜모시풀·상산·방울꽃·토현삼·털고사리 등이 분포하고 해송림 지역엔 개승마·나도생강·참취·때죽나무·산박하·산수국 등이 자라고 있다.
김대신 한라산연구소 연구사는 "성불오름은 주변 오름과 달리 형성된 샘터와 계곡 덕에 분포하는 다양한 양치식물들이 특징"이라며 "정상부근에 형성된 억새군락에는 산철쭉·사스레피나무·모새나무와 절국대·수원잔대·제비쑥·마삭줄 등이 분포한다"고 말했다. 김철웅 기자
| 다수 문헌 "성불암 고려시대 사찰" 기록 성불오름에 성불암(成佛庵)은 확실히 존재했다. 지표상에서 사찰의 건물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옛 문헌들이 '존재'를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사찰 터로 추정되는 곳에선 기와 조각과 도자기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초석까지 발견됐다는 얘기도 있다. '북제주군의 문화유적(1998년)'은 '성불암터'를 구좌읍 송당리 성불오름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 터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서적은 성불암에 대해 "지금까지 확인된 유물이나 문헌상으로 볼 때 고려시대 12세기경에 창건되어 대략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적고 있다. 옛 문헌 가운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정의현(旌義縣) 불우조(佛宇條)에서 "성불암이 성불오름에 있다"는 뜻으로 '성불암재성불악(成佛庵在成佛岳)'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도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 그리고 '제주도편람(1930년)'에는 "표선면 성불구(成佛邱·성불악)에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됐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문제는 정확한 성불암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불천 남서 방향 바로 위쪽, 즉 분화구 중심부근이 성불암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완만한 경사에 적지 않은 면적의 공간과 함께 지근거리에 '삶에 필수인' 샘이 있어 성불오름 가운데 암자가 들어설 최적의 장소다. 여러 기의 묘소가 들어서 있는 이 일대에선 지금도 기와편이나 도자기편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오름 취재 과정에서도 찾은 기와편은 대부분 어골문인 반면 도자기편은 청자·백자·일반 자기와 항아리 조각 등 다양해 성불암의 살림살이를 짐작케 했다. 이에 따라 성불암을 옛 문헌에만 두지 말고 정확한 조사를 통해 '현실'로 되돌리는 방안도 필요해 보인다. 김철웅 기자 |



